75화. 시리온 공국 (1)
62명.
이번 습격으로 죽은 사람의 수였다.
경비 인원을 제외하면 밖에서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당했다.
제때 대피소나 은신처로 피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공동장례가 치러졌다.
식은 간소했다.
시체들을 수습한 당일 초저녁, 공터에서 단체로 화장식을 진행했다.
마른 장작에서 튀는 불꽃이 하늘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으득
이를 지켜보던 용재가 이를 갈았다.
반면 예은은 텅 빈 눈빛의 유가족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너무 급하게 하는 거 아닐까요?”
그 질문에 도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적습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언제까지고 붙잡고 있을 순 없지.”
“그래도…….”
“게이트가 생기고 몇 명이나 장례를 치렀을 것 같나? 저들은 운이 좋은 편이지. 그쪽도 알 텐데.”
예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박 순경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끝나자마자 달려왔으면 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
어제 리자드맨들과의 전투가 끝나고 빠르게 돌아왔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진과 일행들은 군인들의 구출작업을 돕고, 장갑차를 회수할 겸 캠퍼스까지 함께 했다.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뭔가 불안했던 호진은 캠퍼스에서 몸을 추스르고 다음 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호진의 불안감은 다른 곳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 잘못입니다.”
호진이 입을 떼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자 박 순경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방심했고 오판했습니다.”
무전이 되진 않았지만, 마음만 먹었으면 캠프의 상황을 알아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호진은 그러지 않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책임자의 자리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호진은 허리에 찬 진검을 힐끗 본 후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저는 차원문을 넘어가겠습니다.”
놈이 나타났던 캠프 정문 앞의 숲.
그 숲의 안쪽에선 이전엔 보지 못했던 것이 발견됐다.
던전 게이트와는 다른 기분 나쁜 모양의 포탈이 말이다.
‘감시자의 눈’을 지닌 호진은 그것이 퀘스트에서 말하던 차원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얀 가면이 말한 한 달 뒤라는 말과 퀘스트에 적힌 30일이라는 시간 제약.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 시간 안에 호진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비극이 반복될 것이다.
어쩌면 이번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이번엔 혼자 갈까 합니다.”
호진의 말에 다른 이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너무 위험합니다!”
다른 이들의 만류에도 호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로 깨달았습니다. 캠프의 전력을 쉽게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을.”
“…….”
애초에 캠프의 전력을 키운 것은 방어를 위한 수단이었지, 무언가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호진은 이번 원정을 방어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말았다.
비 전투인원의 안전을.
그들도 캠프의 구성원으로 캠프를 위해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한데, 지켜주지 못했다.
더 중요한 일이라는 명목 아래 그들을 방치했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희생은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한 건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 순간이었다.
“난 갈 거야.”
용재가 도끼를 집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 발언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잠깐, 용재야. 이번엔 호진 님 말대로 하는 게…….”
“아니, 나도 따라간다.”
박 순경이 만류하려는 순간 도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훈의 발언엔 호진조차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에 도훈은 호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캠프에 수비를 공고히 하자는 의견엔 동의한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이다.”
“어떤 녀석들이 또 쳐들어올지 모르…….”
호진의 반박에도 도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 원정엔 캠프의 미래가 걸려있었다.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최선의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장의 말대로 어떤 적이 쳐들어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논리라면 아무리 방비를 단단히 해도 부족하다.”
잠시 많은 끊은 도훈이 말을 이었다.
“지금 단장은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후회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조금 더 침착해라.”
도훈의 말에 호진은 어깨를 떨었다.
정곡이었다.
그때 예은이 웃으며 말했다.
“호진 씨가 늘 말했죠. 결정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고. 저도 따라갑니다.”
“……당했네요.”
호진은 설핏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전부는 안 됩니다. 두 명만 저와 함께 갑니다. 뽑기로 정하죠.”
일행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뽑기왕이라 불린 제 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 박 순경님은 제외입니다.”
“……예?”
어깨를 빙글 돌리며 몸을 풀던 박 순경이 눈을 끔벅였다.
“헌터 대표이자 제 대리인이신 만큼, 박 순경님은 캠프에 남으셔야 합니다.”
“호진 씨……. 저 싫어하는 거 아니죠?”
울먹이며 묻는 박 순경.
호진은 축 처진 박 순경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박 순경님을 믿는 겁니다.”
“호진 씨……. 그런 거라면, 맡겨주시죠! 제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겠습니다.”
“부탁합니다.”
호진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자리도 자리지만 박 순경은 주호, 주연이를 포함해 가족이 캠프에 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캠프였다.
“그럼 제가 뽑기를 만들겠습니다.”
잠시 후, 박 순경은 나무젓가락 여러 개를 손에 쥐고 나타났다.
“빨간색이 칠해져 있으면 당첨입니다.”
나무젓가락은 총 5개.
확률은 5분의 2였다.
“왜 다섯 개야? 박 순경님 빠진다며.”
용재가 고개를 갸웃하자 뒤에서 누군가 툭툭 쳤다.
“저랑 스미스도 신청했어요.”
스미스의 어깨에 타고 있는 수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꼬마야. 집이나 지키는 건 어떨까?”
“몬스터를 죽일 수 있다면 전 어디든 가요. 저번에 보니까 별 도움도 안 되던데, 아저씨나 집에 계세요.”
그런 도발에도 용재는 아무런 대답을 못 하고 부들거리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확실히 인형술사 수현이 전쟁터에서 보여 준 활약은 압도적이었으니까.
일대 다수에선 수현이 가진 ‘인형술사’만큼 강한 직업도 드물 것이다.
기세등등하게 나선 수현이 첫 번째로 젓가락을 뽑아 들었다.
“……이건”
“푸핫. 꽝이네.”
“…….”
용재가 웃음을 터트리자 수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뽑은 젓가락은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사실 스미스 거였어요. 이제 제 것 뽑겠습니다.”
“야! 꼬맹이 그런 게 어딨…….”
차마 말리기도 전에 다시 뽑기를 뽑은 수현.
그리고 그 젓가락은…… 여전히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벙찐 수현을 보며 용재는 재차 박장대소를 터트렸고, 이내 수현은 부들거리며 물러났다.
이제 확률은 3분의 2.
가벼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가 뽑죠.”
가만히 있던 예은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하나를 뽑아 들었다.
“…….”
또 흰색, 즉 꽝이었다.
“정해졌군.”
“존버는 승리한다!”
도훈과 용재는 굴러들어온 당첨을 만끽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예은은 박 순경의 손을 덥석 잡으며 중얼거렸다.
“동작 그만. 밑장 빼기입니까?”
“뭐, 뭡니까?”
박 순경이 당황하자 예은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제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입니까. 3연속 꽝이라니, 나머지 두 개도 보여주세요.”
박 순경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순순히 손을 폈다.
그러자 빨간색이 칠해진 두 개의 젓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리가.”
예은이 세상 잃은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
1시간 후, 숲 안쪽.
암벽에 생긴 차원문 앞에 호진과 용재 그리고 도훈이 함께 서 있었다.
“걘 왜 데리고 왔어요?”
“내 파트너다. 떼놓고 갈 수는 없지.”
“컹!”
청랑이 당연하다는 듯 짖었다.
“청랑 너는……. 에휴, 알았다. 이번이 2번째니까 8번 남은 거다. 그 뒤엔 마음대로 해.”
호진의 말에 청랑은 고개를 팩하니 돌렸다.
이를 보던 도훈이 청랑을 쓰다듬으며 호진을 노려봤다.
“청랑은 그렇게 속물적이지 않다. 좋은 마음으로 따라오는 건데, 너무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한다.”
“컹! 컹!”
“…….”
옳다구나 짖어대는 녀석을 보며 호진이 미간을 모았다.
늘 차분하고 객관적인 도훈이 왜 유독 청랑에게만 후한 건지.
저 여우 같은 속을 못 알아보니 답답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긴장하시고 천천히 따라오세요.”
호진은 허리에 찬 검집에 손을 올려다 놓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원문에 발을 들여놓자 게이트 때와는 달리 끈적거리고 기분 나쁜 감각이 몸을 감쌌다.
다음 순간.
뭔가 크게 일렁이더니 부유감이 몸을 덮쳤다.
마치 높은 곳에서 추락하듯 빙글빙글 도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미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서 호진은 손을 허우적거렸다.
─턱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손끝에 닿았다.
‘뭔가 있어? 아니, 그보다…….’
부유감이 사라지고 마치 어딘가 누운 듯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아늑한 게, 마치 어릴 때 농장 안에 몸을 숨긴 기분이다.
주변을 더듬자 등이 닿은 바닥을 포함해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진은 서둘러 손을 뻗어 정면을 힘주어 밀었다.
그러자 정면의 벽은 별 저항 없이 천천히 밀려 나갔다.
─드르르륵
열린 틈으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와 호진은 슬쩍 눈을 찌푸렸다.
이내 시야가 돌아오자 눈에 잿빛의 구름이 낀 하늘이 보였다.
“진짜 누워있었네.”
호진은 자신 위를 덮고 있는 벽면을 마저 밀어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풍경이 호진을 반겼다.
“……카타콤?”
중세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석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잿빛의 하늘은 무너져 내린 건물의 천장으로 보인 풍경일 뿐이었다.
수많은 관들과 어둑한 지하 터널을 보고 있자면, 이곳이 시체들을 안치하는 지하공간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호진은 자신이 나온 반쯤 열린 석관을 내려다봤다.
“내가 저길 아늑하다고 생각했던 건가.”
호진은 떫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용재랑 도훈 씨는 어디로 간 거지.”
우선은 둘을 찾아 합류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게 초감각을 퍼트리려던 순간.
─저벅 저벅
발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작은 모래가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빛이 들어오던 무너져 내린 카타콤 천장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