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하얀 가면 (1)
“셋 하면 들어 올린다. 하나 둘 셋!”
무너진 성벽 잔해를 헌터와 군인들이 힘을 합쳐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아래 공간이 드러나며 피를 흘리는 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일동이 긴장했으나,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던 병사가 안도하며 소리쳤다.
“살아있습니다! 의무병!”
“넵!”
순식간에 들것을 가져온 의무병들은 다친 군인의 상태를 체크한 후 들것에 옮겼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호진을 향했다.
잠시 천천히 눈을 감았던 호진은 있는 힘껏 초감각을 펼쳐 주변을 훑었다.
그러곤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
폐허에 적막이 흘렀다.
더 이상의 생존자는 없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580명의 군인들 중 생존자는 428명뿐.
아난타의 검격은 10초도 채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동안 152명이나 목숨을 잃은 것이다.
호진도 안타까움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폐허에서 떨어져 나와 걸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그 사실을 기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목숨이 스러졌기에.
물론 그들의 슬픔 속에는 은은한 안도감이 깔려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장 호진조차 그랬으니까.
그럼에도 이 고요한 적막이 죽은 이들과 그들의 남겨진 지인들을 위한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나저나 퀘스트 조건 중 두 개를 벌써 달성했네.’
생각보다 기준이 후했다.
적어도 정부에게는 정식으로 인정을 받아야 할 줄 알았는데, 연대장의 약속만으로도 인정이 돼버렸다.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였지만.’
우선 처리한 것은 2번과 3번이다.
「(1) 오염된 차원문 정화 (0/1)개」
「(2) 게이트 (28/28)개」
「(3) 주변 세력으로부터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받기(1/1)」
상태창에 따르면 강화도에 발생한 게이트 28개 중 28개가 이미 처리되었다.
‘하긴 웬만하면 리자드맨들이나 마니산 캠프의 손에 정리가 됐지.’
게이트는 보스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나오면 저절로 소멸된다.
그렇기에 애초에 개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있던 것들도 경험치나 안정화를 원하던 두 세력에 의해 강제로 폐쇄됐다.
‘그러면 오염된 차원문은 뭐지?’
호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나 해서 주변에 물어봤지만, 다른 이들도 다들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나마 몇몇 사람들이 가물가물하지만 처음 플레이어로 각성할 때, 게이트와 더불어 차원문이라는 것을 넘을 수 있게 됐다는 문구를 본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마 그거인 듯싶은데…….
호진은 왠지 자꾸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아니, 이건 너무 신경과민인가?’
군인들의 죽은 모습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탓일 거다.
호진은 그렇게 스스로 되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
어스름한 어둠이 낀 초저녁.
“하~암.”
춘필은 캠프의 감시대 위에서 크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원정대의 부재로 인해 마니산 캠프의 실질적인 관리 역할은 춘필이 맡고 있었다.
‘말이 관리지, 감시부터 농장일 그리고 경영까지…… 온갖 일이란 일은 다 시키고 말이야.’
시민 대표로 뽑히고 좋아했던 것도 잠시, 점점 늘어나는 업무량에 숨이 턱 막혔다.
“이건 아무래도 이호진에게 밉보인 거야.”
춘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세 중의 실세에게 찍혀 버렸으니 앞으로 어째야 하나, 하는 고민에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부스럭
‘벌써 교대 시간인가?’
그때 옆에서 나는 인기척에 춘필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기도 잠시.
“다, 당신. 누, 누구요!”
그는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사람이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와 입도 없는 새하얀 가면엔 오직 눈구멍만 뚫려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둡기 때문인지 눈구멍의 안은 텅 빈 듯 새까맸고, 그렇기에 더더욱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끔찍한 적막이 흐르고 춘필의 등이 축축하게 땀으로 젖어왔다.
춘필이 조심스레 주머니 속에 든 비상 사이렌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하얀 가면이 말을 건네 왔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뭐요?”
춘필은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멈추고 다소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갑자기 신은 무슨 신이란 말인가?
하지만 가면의 질문엔 뭔가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 난 무교요.”
그 말을 들은 하얀 가면은 돌연 박수를 탁하고 쳤다.
“좋군요. 그럼 이걸.”
가면이 어딘가에서 책을 꺼내 들고 책장을 펴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춘필은 약간 어지럼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그러자 가면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이내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당신은 이미 믿고 있는 신이 있군요. 아니면……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누군가가 있든가.”
그 말을 들은 춘필은 자신도 모르게 호진을 떠올렸다.
인간 같지 않은 무력을 지닌 사람.
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해내는 사람.
만약 춘필이 뭔가를 믿고 있다면, 그건 본 적도 없는 신이 아닌 호진일 터였다.
조금 불만은 있었지만.
하얀 가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아,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가면이 잠시 텀을 두고 물었다.
“혹시 여기 이호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뭐야, 대표님 지인이었나?”
그 질문을 듣고 춘필은 얼굴을 활짝 폈다.
생긴 거나 언행이 너무 기괴해서 잔뜩 겁먹고 있었는데, 이호진의 지인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괴물 같은 늑대마저 동료라고 데리고 다니는데, 이런 사람 한둘쯤이야.’
춘필은 손을 들어 이마에 흐르던 식은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대표님은 지금 잠시 일을 보러 나갔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사내는 가면을 매만지다가 이어 말했다.
“그자를 만나면, 그것이 한 달 후에 다시 올 거라고 전해주시죠. 만약 그때까지 당신이 살아있다면요.”
“그게 무슨……?”
“저번에 제 일을 망친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도 전해주시고요.”
춘필이 얼떨떨해하는 동안, 하얀 가면은 목책을 훌쩍 뛰어 올라가더니 당연하다는 듯 아래로 추락했다.
높이도 높이지만 아래에는 완공된 해자가 있다.
여기서 떨어진 이상 날카로운 말뚝들로 인해 꼬챙이 신세를 면치 못할 터였다.
“어어…… 어어!?”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느끼던 춘필이 뒤늦게 기함하며 뛰어간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가면의 사내는 마치 신기루였던 것처럼 사라졌다.
춘필은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때 캠프의 정문 앞 숲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잠시 춘필은 그가 하얀 가면의 사내인가 싶어 잔뜩 긴장한 채 쳐다보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저 왔어요!”
막 스무 살이 넘었을 법한 젊은 청년이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잠시 주변의 순찰을 돌고 온 헌터 동현이었다.
실력은 1조에 속해 있을 정도로 좋지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캠프에 남겨진 수비 인원 중 하나였다.
“뭐 하다가 이렇게 늦었어!”
춘필이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동현은 여전히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저 왔어요! 문 열어 주세요.”
“기다려, 이놈아.”
춘필은 짜증을 내면서도 내심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나팔을 길게 한 번 불었다.
─뿌우우우우우
아군의 귀환을 알리는 소리였다.
나팔이 울리자 올라갔던 도개교가 천천히 내려오고 목책의 성문에선 걸쇠를 풀기 시작했다.
춘필은 도개교를 향해 다가오는 동현을 바라보다가 문뜩 이상한 이질감을 느꼈다.
‘동현이가 저렇게 키가 컸던가?’
뭔가 팔도 길쭉하고, 옷도 아침에 입고 나갔던 거와 달리 어딘가 거무튀튀했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그 인형(人形)이 오늘따라 왠지 기괴해 보였다.
‘아까 전에 그 이상한 가면도 그렇고, 뭔가 느낌이…….’
어딘가 기분이 싸해진 춘필은 급하게 성문에 문을 열고 있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문 다시 걸어 잠가!”
“예?”
문을 지키던 경비들은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춘필을 올려다봤다.
이에 춘필은 힐끔 동현을 바라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개교 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활짝 웃는 낯으로 춘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언제 여기까지?’
춘필은 경비 2명을 향해 냅다 고함쳤다.
“오늘 저녁 굶고 싶어? 문 잠그라고, 빨리!”
“예, 예!”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경비들이 열리던 문을 서둘러 다시 닫기 시작했다.
두꺼운 철문이 다시 끼릭 소리를 내며 닫히던 그 순간이었다.
동현이 돌연 반쯤 내려온 도개교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도개교를 올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저런 미친! 더 빨리 닫아, 더!”
“네, 넵!”
날듯이 도개교를 뛰어넘은 동현이 성문 앞에 안착했을 때는 이미 성문이 손 한 뼘 정도 틈을 남기고 닫혀가고 있었다.
‘됐다.’
춘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정도 틈이라면 쥐새끼라면 모를까 사람은 절대 넘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동현은 전혀 개의치 않고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어어?”
“동현이 형, 멈춰요! 손 다쳐요!”
문 경비를 서던 녀석들이 놀라 소리쳤지만 이미 기계장치로 닫히고 있는 문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달려온 동현은 완전히 두 성문이 맞물리기 직전, 한쪽 손을 끼워 넣었다.
─으그득 뿌직
끔찍한 소리와 함께 문에 낀 손에서 피와 살점이 튀었다.
“이런 미친!”
“빨리 열어!”
두 경비가 호들갑을 떨자, 감시탑에서 뛰어 내려온 춘필이 총을 경비들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열지 마! 열면 쏜다.”
“예? 아니, 그게 무슨?”
경비와 춘필이 대치하던 그때였다.
완전히 닫힌 줄만 알았던 철문이 끼릭 소리를 내며 약간 틈이 벌어졌다.
경비들과 춘필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으스러진 손이 천천히 성문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벌어진 틈 사이로 동현이 입꼬리를 힘껏 치켜올리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저 왔어요!”
그 모습을 확인한 춘필은 물론 경비들조차 끔찍한 괴리감을 느꼈다.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표정과 언행이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탕!
춘필은 그 즉시 총구를 돌려 동현의 얼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에 정확히 맞은 동현의 얼굴이 피를 뿜으며 뒤로 확 젖혀졌다.
경비들은 기겁했지만, 이게 춘필이었다.
불확실보다는 확실을, 정보다는 실리를.
타인보다는 자신을 소중히 하는 개인주의.
남들은 욕할지 몰라도, 춘필은 자신이 이런 성격 탓에 지금껏 살아남았다고 자부했다.
동현의 피 흘리는 모습을 확인한 춘필은 주머니 속에 비상 사이렌 버튼을 눌렀다.
─애애애애앵애애애애앵
캠프 전체에 침입자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즉시, 피난 장소로 이동해 몸을 숨길 것이다.
‘이대로 죽어주라, 동현아. 제발.’
춘필의 기도가 무색하게 뒤로 젖혀졌던 머리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아…… 허히──어, 와어 요.”
동현의 사라진 하관에서 고장 난 테이프의 소리처럼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