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늪지대 공성전 (5)
[……괴물 같은 놈.]
울타는 쓰러진 호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호진은 격을 쌓았다.
하지만 아직 신격을 각성하지 못했기에 격을 다루지 못하는 필멸자에 불과했다.
한데…….
[어찌 신을 벨 수 있는 것이냐.]
호진이 절(切)베기를 사용한 그때, 울타는 분명히 봤다.
대족장의 몸을 가르고 지나간 검의 흔적이 뒤에 있던 아난타의 몸을 베는 것을.
눈으로 봤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강신의 형태로 잔류하던 신의 사념 같은 것이라지만, 필멸자가 검으로 신을 베어 내다니.
[도대체가…….]
중얼거리던 울타는 문뜩 자신도 시간이 다 되었음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그가 다음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놀라게 할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후후, 기대되는구나. 아이야.]
울타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조용히 이카루스의 몸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호오 호오
그 자리엔 이카루스가 눈을 빛내며 울어댈 뿐이었다.
***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눈을 감은 호진의 귀에는 쉴 새 없이 시스템의 알림음이 울려댔다.
“……이젠 이게 울려줘야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니까.”
처음에는 지쳐 죽을 것 같을 때 울려대는 알림창과 알림음이 짜증 났지만, 이젠 익숙해졌다.
호진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있는 힘껏 밀어 올렸다.
울창한 수림과 그 수림을 뚫고 희미하게 비추는 햇살이 눈에 담겼다.
왠지 여름날 계곡에서 물놀이 후, 나무 밑에 누워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그런 날이 다시 오긴 할까.”
호진은 흐릿하게 웃고는 이내 시스템 알림창에 손을 뻗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훅 쉬툭 4부족 연맹의 군주 대족장을 쓰러트렸습니다.」
「‘호수를 기는 여신’, 아난타를 베어 원래의 차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이뤄냈습니다. 보상이 가산됩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됩니다.」
「아난타의 사도의 시험을 치르던 봉사자 대족장을 쓰러트렸습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절(切)베기 LV1 → 절(切)베기 LV2」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꽤나 많은 알림창에도 호진은 익숙하게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레벨이 많이 올랐네.’
한 달간 호진을 초조하게 만들었던 레벨의 정체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호진은 속으로 상태창을 불렀다.
─띠링
「상태창」
「이호진」
「나이: 24」
「레벨:39」
「근력:48 민첩:48 지구력:30」
「스킬: 감시자의 눈 LV.1 절(切)베기 LV.2 투구 가르기 LV.7 체력 회복 LV.9 확신 LV.1 검술의 묘리 LV.1 검의 정수 LV.1 정신 내성 LV.4 파마의 검식 초감각 LV.2 출혈내성 LV.5 초급 기(氣) 검술 LV.2 투검 LV2 기승전투 LV.4 화염내성 LV1 목엽참(木葉斬)」
「직업: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
「가호: 감시하는 자 울타의 가호, 여신 릴리의 가호」
「칭호: 없음」
「잔여 포인트: 15」
이번 원정으로만 무려 9레벨이 증가했다.
이젠 오히려 레벨에 비해 스킬들의 숙련도가 낮은 건 아닐지 고민이 될 정도다.
‘근력이나 민첩은 48이네.’
호진은 포인트를 2씩 추가해 50, 50을 맞췄다.
그래도 11포인트나 여유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 전투의 성과는 ‘검술의 묘리’로 얻게 된 거합의 발전형 스킬 ‘절(切)베기’다.
‘절(切)베기’는 압축된 기를 발도하는 궤도에 따라 투사(投射)하는 사기적인 기술이었다.
물론 연속으로는 사용이 힘들 정도로 기나 체력을 많이 소모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만약 이 기술에 대해 모르는 상대라면 목이 떨어질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것이다.
‘나 역시 아난타의 첫 번째 공격을 맞았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었겠지.’
호진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실력도 있지만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잘린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지난 전투를 떠올렸다.
그리고 인벤토리를 열어 보상을 확인했다.
역대급으로 강한 상대였던 만큼 기대가 컸다.
「나가(Naga)의 내단」
「종류: 영약」
「정보: 아훅쉬툭의 대족장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온 신물(神物). 복용함으로써 초월적인 힘을 얻게 되며, 사용자가 사망 시 회수가 가능하다.」
“이건 또 뭐야.”
호진의 입에서 불만이 토해져 나왔다.
영약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다.
먹는 것만으로 강해지는 소설 속 주인공 성장을 돕는 대표적인 기연이 아닌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기연에는 약속된 클리셰가 있다.
‘잘못 복용했다가는 기운을 얻지 못하거나, 재수 없으면 죽을 정도로 고통이 동반된다지.’
흔히 소설에선 양기 혹은 음기를 지녔다는 이런 영약들은 잘못 복용하면 속에서 이는 화(火)기나 냉(冷)기를 견디지 못하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곤 했다.
‘알림창 속 정보에는 그런 말이 없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죽으면 회수가 가능하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무슨 고무공도 아니고, 먹으면 몸 안에서 안 빠져나가고 어딘가 붙어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뭔가 찜찜한 설명이다.
‘일단은 보류겠네.’
당장 성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체불명의 것을 함부로 먹고 싶지 않았다.
‘남은 알림창은…… 어라, 퀘스트?’
실로 오랜만에 등장한 퀘스트다.
감시자의 숲에서 정체가 밝혀진 이후 잠잠하던 여신이 오래간만에 퀘스트를 꺼내 들었다.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성역(聖域) 선포」
「A─3 지역 중 ‘강화도’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기. 제한 시간: 30일」
「(1) 오염된 차원문 정화 (0/1)개」
「(2) 게이트 (28/28)개」
「(3) 주변 세력으로부터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받기(0/1)」
「보상: 선포한 영역 내에 결계 발동. 다른 신격의 간섭 배제 및 적대세력의 침입 방지.」
“생각보다 유용할 것 같은데?”
어차피 강화도를 평정하는 것은 호진의 계획에 포함된 내용이다.
이미 할 예정의 것을 하는데 보상을 챙겨준다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획득 조건 2번은 이미 획득한 상태이기도 하고.
심지어, 결계라니.
얼마나 유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여름날 모기장이 있더라도 모기향이 하나 더 있어서 나쁠 건 없듯이 방비와 예방책은 다다익선이었다.
이 정도면 얼추 볼 건 다 본 듯했다.
호진이 몸을 일으키는데 빛이 무언가에 반사되며 반짝거렸다.
손으로 빛을 가리며 다가가자 정체를 드러내는 황금색의 검 한 자루.
대족장이 들고 있던 의장용처럼 생긴 검이었다.
호진은 검을 향해 홀린 듯 손을 내밀었다.
내심 기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띠링
「정수를 흡수합니다.」
「대족장의 검식 파편을 얻었습니다.」
「검식 파편: 강신무(降神巫) : 0/10000」
“대박이다.”
‘검의 정수’가 발동 가능한 무기라니.
몇 개월 만에 처음이다.
생각해보면 검을 든 적과 싸운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아니, 처음인 거 같기도 하고.’
확실히 몬스터들은 검보다는 투박하고 거친 둔기류를 선호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손끝을 타고 푸른 기운이 몸에 스르륵 흡수됐다.
다음 순간 머릿속엔 낯선 검술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적을 베기 위한 검술이 아닌, 신이 내려오는 길을 갈고 닦는 검술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효과는 아마 짐작이 갔다.
‘강신(降神)을 위한 기술이겠지.’
대족장이 마지막에 아난타를 불러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호진은 새로 얻은 검을 인벤토리에 갈무리하는 동안, 아난타의 공격에 휩쓸려 쥐죽은 듯 엎드려있던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근처에서 싸웠던 용재와 예은 그리고 헬기에서 추락했던 주 대위였다.
호진은 비틀거리며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런 호진을 본 사람들은 허겁지겁 호진을 향해 달려와 부축했다.
“무사하셨네요.”
“멀쩡합니다. 조종사까지 구해낼 정도로 여유였습니다.”
추락해서 불탔던 헬기에 타고 있던 주 대위가 씨익 미소 지었다.
“나는 왜 걱정 안 해줘?”
옆에서 용재가 불만스럽게 묻자 호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감시단과 헌터들 쪽은 모두 무사하니까. 각성자들이 초감각에 더 잘 잡히거든.”
“……진짜 점점 괴물 같아지네.”
그런 용재의 중얼거림에 동의한다는 듯 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용재랑 예은 씨가 성문을 지켜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크게 어렵진 않았어요. 용재가 고생 많이 했죠.”
“후, 후훗. 하긴, 나도 이제 ‘괴물’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고 할까.”
용재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예은과 호진의 표정이 동시에 썩어들어갔다.
호진이 대족장을 상대하는 동안 용재는 예은의 조력을 받아 서부의 치프를 처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도 자기 입으로 자신을 괴물이니 뭐니…… 보는 호진이 더 부끄러웠다.
“얘, 여자들한테 인기 없었죠?”
“여자는커녕 남자들한테도 별로…….”
“그건 좀 슬프네요.”
예은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용재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의 멋짐을 몰라주는 형, 누나가 불쌍해.”
“…….”
“……어, 그래.”
호진과 예은이 귀찮다는 듯 돌아서자 용재는 시무룩해져서 졸래졸래 뒤따라왔다.
저 상태는 저것대로 귀찮았지만 금방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회복될 것이다.
잠시 후, 일행들은 아난타의 공격이 쏟아진 곳에 도착했다.
죽은 사람은 없지만 부상자는 꽤 되는 듯, 쓰러져 피 흘리는 헌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면 군인들 쪽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수가 많기도 많았고, 하필 작전구역이 아난타의 검격이 퍼부어진 곳에 있던 탓에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호진은 참담한 얼굴을 한 연대장을 향해 다가갔다.
호진을 알아본 연대장은 깊게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고, 호진도 최대한 예의를 다해 인사를 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연대장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네. 사방에서 병사들의 피와 비명이 터져 나왔지.”
텅 빈 듯한 연대장의 동공은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네. 말 한마디 꺼낼 수 없더군.”
잠시 입술을 꽉 깨무는 연대장.
이윽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존재를 목도한 순간, 내가 한없이 무력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거든.”
처음 보는 신의 위압감은 일반적인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연대장은 아난타의 본신은커녕, 대족장을 본 것만으로도 패닉에 빠진 것이다.
이에 호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호진과 눈을 마주쳤다.
“한데 자네는 그런 존재를 상대로 싸웠네. 그리고 이겼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
연대장의 동공은 가늘게 흔들렸다.
그것은 두려움이었고, 경외였으며, 동경이었으며, 의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냥…… 했을 뿐입니다.”
대답을 들은 연대장의 몸은 천천히 떨림이 멎었다.
그 무심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한 뻔뻔함 때문일까.
허, 하고 짧게 숨을 토해낸 연대장은 이내 늘 그랬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랬겠지.”
잠시 중얼거리던 연대장은 호진에게 말했다.
“우리 군은 캠프의 방위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네. 하여 정부의 도움을 받아 강화도에서 철수하려 하네만.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저희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이곳에 남아 독자적인 방위를 구축하고 강화도를 안정화하고자 합니다.”
호진의 대답에 연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자네 편이 되겠다는 말. 그건 진심이었다네. 정부 쪽엔 내가 잘 전달해보지.”
“감사합니다.”
“뭘, 내가 감사하지.”
둘은 옅게 웃음 지으며 악수를 나눴다.
다음 순간 호진의 눈앞에 익숙한 창이 어른거렸다.
─띠링
「(3) 주변 세력으로부터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받기(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