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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70화 (70/241)

70화. 늪지대 공성전 (4)

“울…… 타 님?”

머릿속에 음성이 들리는 순간 미동도 하지 않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 아직 이름을 기억해주고 있다니 기쁘구나. 후후.]

기쁘다는 듯 작게 소리 내 웃는 그녀의 목소리에 호진은 상황조차 잊고 잠시 멍해졌다.

맑으면서도 담백한 목소리.

저번에도 느꼈지만 정말 신기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호진이 검을 바로잡았다.

아직 눈앞의 대족장은 눈을 감고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지금이라면 벨 수 있다.

호진이 땅을 박차려 할 때였다.

[가지 말거라, 이미 늦었다.]

이카루스, 아니 울타가 날개를 펼치며 만류했다.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울타의 말에는 저번에도 그랬듯 ‘힘’이 있었다.

강제력이라기보다는 신용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할까.

“뭐가 늦었다는 겁니까?”

[강신(降神). 대족장이 펼친 것은 신을 몸에 깃들게 하는 주술(呪術)이다.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건 한낱 리자드맨이 아니니라.]

울타의 말에 호진은 대족장을 살폈다.

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몸에 흐르는 기세나 압박감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말 바뀐 겁니까?”

[아직 ‘눈’이 익숙하지 않은가 보구나. 잘 보거라.]

‘아,’

호진은 울타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고 그 즉시 ‘감시자의 눈’을 사용했다.

그러자 대족장의 뒤로 꽈리를 튼 희끄무레한 존재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숨조차 쉬기 어려운 존재감이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크윽……. 저게 무슨?”

[호수를 기는 여신. ‘아난타’다. 영악한 것은 여전하구나. 아마 접근하는 순간 갈기갈기 찢겼을 게다.]

“호수를 기는 여신이라…….”

호진이 난처해하며 중얼거리자 울타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찌 아는 것이냐?]

“잘 알지는 못합니다. 저에게 화가 많이 났다는 거, 그거 하나만 압니다.”

전에 알림 창에 뜰 때부터 묘하게 불안하더라니.

끝내 형체 없던 불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던 울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왜인지 알 것 같구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호진이 당당하게 대답한 후 말을 이었다.

“그보다 어떻게 저와 대화를 하실 수 있는 겁니까? 혹시 울타 님도 강신인가 뭔가를 하신 겁니까?”

[……네가 나를 부른 적이 없는데 어찌 강신을 하겠느냐.]

어이없어하는 울타.

그녀는 한숨 비슷한 걸 내쉬며 말했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에코(Echo)라고 부르는 능력이란다. 봉사자를 통해 목소리를 전할 뿐이지.]

“그럼 뭔가 도움을 주러 오셨겠군요. 빨리 부탁드립니다.”

호진은 대족장, 아니 아난타를 바라본 채, 어깨에 올라탄 울타에게 말했다.

호진이 함정을 눈치챘다는 것을, 조만간 아난타도 깨달을 것이다.

서둘러야 했다.

[……안 본 사이에 많이 건방져졌구나. 후, 알았다. 힘없는 내가 어쩌겠느냐. 알려달라면 알려줘야겠지.]

“그런 말이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됐다, 농담이니라.]

여자친구 한 번 없었던 호진도 알 수 있었다.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 사과드려야겠네.’

물론 사과도 목숨 줄이 붙어있어야 가능하다.

호진은 조용히 울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강신(降神)이라 해도 진짜 신이 현현한 것은 아니다. 원래 지닌 힘의 극히 일부만 사용 가능할뿐더러, 오래 지속하기도 어렵겠지. 상대법은 간단하느니라. 도망치면 된다.]

“……?”

호진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애초에 머릿속에 울리는 말이 잘못 들릴 리가 없다.

웉타는 그런 호진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지닌 격이나 힘으로는 방법이 없단다. 강신이 끝나면 대족장도 지쳐 쓰러질 게야. 지금은 물러날 때로구나.]

호진은 힐긋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서서히 요새를 점령해가는 군인들과 헌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승기를 잡은 듯 적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하지만 만약 눈앞의 존재가 날뛰기 시작한다면…….

‘다 죽는다. 전부.’

운이 좋은 몇몇은 살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죽을 것이다.

호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껏 와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울타 님.”

[……어리석은 것.]

울타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숨을 토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왠지 너라면 가시밭길을 고를 것 같았다. 하여 한 가지 방법을 더 준비했느니라.]

“그게 뭡니…….”

─서걱

울타의 말에 호진이 반색하며 대답하는 순간.

그의 앞머리가 절삭음과 함께 바닥으로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호진이 그 머리카락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려던 찰나, 뒤의 성벽에 거대한 상흔이 새겨졌다.

뒤늦게 들려오는 굉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쾅!

거의 반파된 성벽을 보며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게 무슨…….”

[시작됐구나. 그녀의 춤이.]

호진이 시선을 돌리자 대족장의 뒤로 꽈리를 튼 희끄무레한 형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조금 더 감시자의 시선에 집중하자, 잠깐이지만 그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하반신은 뱀, 상체는 인간이며 육비(六臂), 즉 여섯 개나 되는 손에 하나씩 검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베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니…….

“제가 아는 ‘여신’과는 꽤 다르군요.”

[그녀의 종족은 나가(Naga)니까. 호수를 기는 여신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게지.]

울타의 말이 끝날 무렵, 아난타는 여섯 개의 손 중 하나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호진이 재빨리 옆으로 뛰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땅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슬슬 방법을 말씀 안 해주시면 저 죽어버릴 것 같습니다.”

호진이 흙먼지를 털며 신음하자 울타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내가 봐도 그렇긴 하구나. 방법이랄 거는 아니지만 아래를 보거라.]

호진이 아난타가 있는 아래를 보자, 대족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거대한 원형의 진이 보였다.

대략 10m 정도의 반지름을 지닌 진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원이 아난타가 직접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범위란다. 그 외에는 지금처럼 검기나 쏘아댈 뿐이겠지.]

“……그 검기라는 게 문제입니다만.”

호진은 쓰게 웃으며 뺨을 긁었다.

어찌 됐든 울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전달되었다.

울타가 등장과 동시에 말해주었던 것.

여신에게 접근하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공격이 날아들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베느냐는 건데……. 대족장만 베면 끝나는 겁니까?”

[물론이다, 아이야. 애초에 신에게 네가 피해를 주는 것은 불가능하니.]

울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난타가 빠르게 두 손을 휘둘렀다.

호진은 이를 악문 채 발을 굴렀다.

‘앞으로 숙여 피한 뒤, 왼쪽으로 3걸음? 아니, 2걸음.’

왼쪽으로 피하던 호진이 동작을 멈추자, 한 걸음 옆에서 바닥의 흙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비산했다.

호진은 앞의 공격들을 떠올리며 아난타가 휘두른 검격의 각도를 짐작해야 했다.

검기는 눈에 보이질 않았으니까.

‘그래도 피했다.’

호진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려고 하던 그때였다.

흐릿한 아난타의 신형이 스르륵 움직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군인들과 헌터들이었다.

“돌겠네.”

상대가 짐승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럴 때 여실히 느꼈다.

호진은 아난타의 함정도 무사히 넘겼고 공격도 연속으로 회피했다.

인간이라면 반복된 실패에 흥분할 법도 한데 아난타는 그렇지 않았다.

녀석은 그저 차분하게 호진의 약점, 즉 다른 이들을 공략했다.

“젠장!”

고민할 여유는 없다.

호진은 순식간에 인벤토리에서 투 핸디드 소드를 뽑아 들고 기를 가득 흘려보냈다.

그리고 어깨 뒤로 들어 올린 후,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검을 쏘아냈다.

‘투검(投劍).’

─쉐엑

공기를 가르며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강철의 바람.

그 패도적인 기세에 호진의 가슴에는 흐릿한 기대가 일렁였다.

하지만 그 기대는 너무나도 쉽게 꺾여버리고 말았다.

─캉!

여태 가만히 서 있던 대족장이 이쪽을 보지도 않고, 황금색 검을 휘둘러 투검을 받아쳤다.

붉은 스파크가 튀며 호진이 던진 투 핸디드 소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떨어진 곳은 아난타의 권역, 진의 위였다.

호진은 방금 단 하나 있던 멀쩡한 무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멍청한 놈.’

너무 초조해했다.

호진이 입술을 짓씹고 있자, 그러거나 말거나 아난타는 기다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흐릿한 아난타의 신형이 흔들리며 계속해서 팔이 다양한 각도로 뻗어졌다.

─콰과과과과광!

그건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쏟아지는 무형의 폭발은 신(神)의 심판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박격포에도 꼼짝하지 않던 성벽은 마치 수수로 만들어진 성처럼 허물어지고, 흙으로 된 땅을 안에서부터 폭발하듯 뒤집어졌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린 전장.

그 폭격에 손속은 없었다.

휘말린 리자드맨의 군세도 인간 측의 병력도 홍수에 휩쓸린 개미 떼처럼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 채 쓸려나갈 뿐이었다.

─뿌득

호진은 소리 나게 이를 갈며 바닥에 떨어트렸던 낡은 진검을 집어 들었다.

게이트가 발생한 첫날부터 함께한 칼이기에, 이가 나갈 대로 나간 허름한 상태다.

그래도 지금 들 수 있는 무기는 이것밖에 없었다.

이걸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처음 해보는 것이라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이게 통하지 않는다면 죽든 살든 아난타의 권역으로 들어가 대족장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할 뿐이었다.

호진은 뚜벅뚜벅 걸어 아난타의 권역을 향해 다가갔다.

[뭐 하는 게냐!]

울타의 당황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지만 호진은 멈추지 않았다.

─탁.

권역의 바로 반걸음 앞, 호진은 그곳에 멈춰 섰다.

진검의 검집을 왼손에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칼자루에 올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어깨에 힘을 뺐다.

그저 이제껏 해왔던 수도 없이 해왔던 동작을 할 뿐이다.

다만 그 속도를 수십 배까지 올릴 뿐.

오른손의 손끝을 타고 몸에서 흘러나온 검기가 검에 가득 실렸다.

어느덧 검집 안에서 가득 차오른 검기는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기세로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것을 한껏 억누르던 호진은 어느 순간 돌연 숨을 멈췄다.

사선에서 위로, 예기(銳氣)에 예기를 담아 한없이 예리함을 응축시킨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리고 휘두른 검은 빙글 돌아 검집을 훑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며 탁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울리는 서걱 하는 절삭음과 함께 대족장의 몸에서 푸른 선혈이 터져 나왔다.

“……됐다.”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본인이 하고도 믿을 수 없는 신위에 몸 전체에 저릿한 감각이 흘렀다.

거합의 극한에 다다르며 익힐 수 있었던 새로운 기술.

절(切)베기.

호진의 머릿속에 그려진 이 기술은 멀리 있는 대상을 벨 수 있는 기술이었다.

마치 아난타처럼 말이다.

하지만 설마 한 번에 성공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놈에게 먹힐 거라고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에, 호진은 얼떨떨할 뿐이었다.

“나…… 완.”

그런 호진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대족장이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광채도 꺼졌다.

그것도 잠시 비틀거리던 녀석은 그대로 까무룩 쓰러졌다.

그러곤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도 동시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디어 끝났나?”

약속된 금기.

죽은 자도 다시 일으킨다는 플래그를 세우면서도 호진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다.

두 달 가까이 지속되어온 전쟁이 끝난 지금, 호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하나뿐이었다.

호진은 거친 흙바닥에도 개의치 않고 몸을 눕히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젠 좀 쉬자.”

폐허가 되어버린 요새 터에는 호진의 숨소리만 조용하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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