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반격 (3)
잘못 생각했다.
수천 수백 자루의 창들을 보며 호진은 자신들의 전력이 밀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계산이었다.
힘의 저울은 한 번도 적들을 향해 기운 적이 없었다.
호진이 치프의 수급을 쥔 채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지고 무너진 진형들 아래 수백 구의 시체가 싸늘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수천의 리자드맨들이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 명확해 모를 수 없었다.
공포, 그리고 경외.
호진이 수급을 들어 올리자, 그제야 놈들은 하나둘 꿈에서 깬 듯 움찔거리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호진은 스읍 하고 한번 숨을 들이마신 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음!”
그 소리에 수천의 군세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하나둘 몸을 돌리던 녀석들은 어느 순간, 둑이 터져나갈 듯한 기세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륵!”
“키이이익!”
달린다. 부딪힌다. 넘어지고 젖히고 뛰어넘고 짓밟고.
뿔뿔이 흩어지는 리자드맨들은 이제 더 이상 적도, 전사도 아니다.
그저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사냥감들일 뿐.
─삐이이이이이
뼛조각을 불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하야.
호진은 재빨리 하야를 타고 도주하는 녀석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많은 적들의 수를 혼자서 줄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호진이 검을 휘두르며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쾅! 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늑대를 탄 감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진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자, 선두에 달리던 도훈이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도망치던 적의 머리 위로 무심하게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사방에 푸른 피와 살점이 튀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감시단은 핸드캐논을 주로 쓸 뿐, 모든 무기가 사용 가능하다.
도망치는 적을 상대로 장전이 느린 핸드캐논을 사용하는 건 비효율적일 터.
메이스는 좋은 판단이었다.
뭐 어차피 면전에 대포를 갈기나 메이스로 내려찍나 그로테스크한 건 매한가지니.
‘거 그런데 저건 감시단 취향…… 인 건가?’
도훈을 시작으로 감시단이 메이스, 철퇴, 망치를 휘두르자 호러 무비의 한 장면이 연출됐다.
최대한 적을 깔끔하게 베어 죽이는 호진으로선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 잘만 죽이면 됐지.’
하지만 이내 호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적들을 베어 넘겼다.
감시단의 합세로 적들을 더 빨리 줄여나가기 시작했지만, 애초에 호진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녀석들은 이제 따라잡기엔 너무 멀리까지 도망갔다.
‘아쉽네.’
호진이 혀를 차며 근처의 리자드맨들을 베고 있던 그때.
멀리까지 도망쳤던 적들이 주춤했다.
‘뭐지?’
호진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다행히 제때 도착한 모양이다.
“이 몸 등장!”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단독으로 움직인 용재가 수백의 늑대 무리를 이끌고 나타났다.
늦게 참전한 게 아쉬운 듯 미친 듯이 날뛰는 용재와 수백 마리의 늑대 떼.
그들이 합세하자 적들은 눈에 띄게 수가 줄어나갔다.
포위망을 뚫기 위해 장갑을 두른 거대한 콜드 블러드 하나가 늑대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백랑이 무서운 기세로 콜드 블러드의 목을 낚아챘다.
훨씬 작은 덩치의 백랑은 콜드 블러드의 목을 비틀어 들어 올린 뒤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를 보고도 덤벼드는 적은 없었다.
이젠 정말 각자 운에 맡기고 포위가 없는 곳을 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그렇게 도망치는 적을 베기도 한참.
어느 순간 주변에 서 있는 적은 아무도 없었다.
호진들의 승리였다.
***
─띠링
「아훅 쉬툭 동부의 리자드맨 치프를 쓰러트렸습니다.」
「아훅 쉬툭 연합군을 물리쳤습니다.」
「‘호수를 기는 여신’이 크게 분노합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초감각 LV1 → 초감각 LV2」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기승 전투 LV.3 → 기승 전투 LV.4」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화염 내성 LV1」
뭐가 많다.
한동안 뜸했던 알림창이 잔뜩 울려대니 반가움도 잠시, 정신이 사나웠다.
우선 차분하게 살펴보자.
남부, 북부, 동부의 치프들을 모두 죽였다.
‘남은 건 서부뿐인가?’
어쩌면 중앙에도 한 명쯤 있을지 몰랐다.
와이번을 타던 그놈은 다른 치프들에 비하면 뭔가 달라 보였으니까.
그리고 다음으론…… 여신이 크게 분노했단다.
처음에는 적대하는 수준이었는데, 아무래도 알림창을 읽어보니 이젠 사과해도 안 받아줄 것 같다.
이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지 모르니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은 보상이다.
「거대 늪의 비전 스크롤」
「종류: 스크롤」
「정보: 거대 늪에 전해져 오는 주술서의 최상위 주술 중 하나가 담긴 스크롤. 사용 시 무작위의 오래된 신비가 발동된다.」
아이템 설명이 늘 그렇듯 불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요약하자면 사용 시 랜덤한 스킬이 하나 발동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는 스킬들.
전투 중에 얻은 깨달음으로 초감각과 기승 전투 레벨이 성장했다.
그리고 화염 내성은…….
“어우, 고기 탄내.”
그을린 코트를 들어 냄새를 맡자, 고기 냄새가 올라왔다.
자연치유 스킬 덕에 지금은 거의 회복됐지만, 방금 전 치프의 주술을 빠져나오며 살들이 익은 탓이었다.
‘위험했지.’
그런 형태의 공격은 처음 접해봤다.
마법? 주술? 뭐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그래도 약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 준비과정과 시전 시간은 눈에 띌 정도로 큰 리스크였다.
다음에 비슷한 녀석을 만난다면 한 번의 영창조차 허락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엔돌핀과 도파민 그리고 아드레날린을 비롯한 각종 신경 호르몬으로 뇌가 범벅이 된 탓에, 화상을 입는 동안 고통을 덜 느꼈다는 거다.
공짜로 스킬을 얻은 기분이라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내 호진은 이게 좋아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
내성 숙련도 작업.
줄여서 숙련작을 할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비집고 침음이 흘러나올 정도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다.
나중에 불에 타 죽으며 후회하기는 싫으니까.
재생의 상징과도 같은 히드라도 불에 지져져서 죽었다.
지금 호진의 회복력은 분명 대단한 편이다.
자연 치유 스킬은 웬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시켰다.
다만, 방금 안 거지만 화상은 회복이 더딘 편이었다.
아마, 유일한 약점이지 않은가 싶은데, 여기에 화염 내성까지 더해진다면…….
‘트롤이 따로 없겠네. 본 적은 없지만.’
호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누군가 호진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주 대위님.”
“호진 님…….”
주 대위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호진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주 대위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차마 보고 싶었다는 말까진 하지 못한 호진은 애써 말을 골랐다.
그러나 그것도 충분했는지 주 대위는 감격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그 모습을 어색하게 웃으며 바라보던 호진은 재차 말을 건넸다.
“옆의 분도 소개해주시죠.”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주 대위가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이쪽은 30여단 연대장님입니다.”
“반갑네, 대령 김정연이네.”
“마니산 캠프 대표, 이호진입니다.”
호진과 연대장은 악수를 주고받았다.
“도와줘서 진심으로 감사하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그럴 리가.”
연대장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였다면,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았을 걸세.”
호진은 조용히 연대장을 들여다봤다.
인자해 보이는 표정 뒤에는 고집스럽고 예리한 결단력이 엿보였다.
하는 행동이나 결과로 봐선 결코 뛰어난 지도자라 부를 수는 없는 인물이다.
하나, 상황 판단 능력은 나쁘지 않다.
지금만 해도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준 호진에게 저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이게 일반적인 거지만, 저 뒤에 서 있는 간부들 중 그렇지 않은 인간은 얼마든지 있다.
‘기껏해야 싸움 좀 잘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놈들의 비웃는 표정만 봐도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적을 물리쳐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벌써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권위에 찌든 인간들.
저런 놈들에 비하면 연대장은 고쳐 쓸 수 있는 인물이다.
“오히려 성격이 모나서 이렇게 온 겁니다. 저희의 전력을 잘못 평가하셨다는 걸 알려드리려고요.”
“허헛, 그건 생각 못 했군. 이거 한 방 먹었구만.”
“그렇죠?”
둘은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염치는 없지만 자네에게 부탁을 해도 되겠나?”
“들어보겠습니다.”
“놈들을 보고 느꼈네. 지금이 아니면 놈들을 뿌리 뽑기는 더 어려워질 테지. 놈들의 본진을 치는 데 손을 보태줄 수 있겠나?”
“……흐음.”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던 호진은 고민하는 척 턱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말만 하게.”
연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진은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제 친구가 돼주시죠. 어떤 상황에서든 제 편인.”
“어떤 상황이든?”
“예, 딱 그거면 충분합니다.”
“딱 그거라……. 허허. 알았네. 그러도록 하지.”
곤란한 표정을 짓던 연대장은 결국 호진의 손을 맞잡았다.
“좋은 선택하신 겁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호진이 대단한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이 말하자, 연대장은 어색하게 허허 웃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주로 약장수들이 자주 쓰는 멘트다.
연대장이 조금 불안해하던 그때, 호진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봤다.
연대장도 그런 호진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는,
“아.”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곳에 마니산 캠프의 군세들이 도열해 있었다.
장갑차 5대.
잘 무장된 헌터 60명.
30기의 골렘.
수현의 목제인형 20개.
청랑과 도훈이 이끄는 감시단.
백랑과 수백의 회색 늑대들까지.
그들을 지켜보던 연대장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한때 연대장이 무시했던 캠프의 무력집단이지만, 두 눈으로 본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적어도 몬스터를 상대로는 눈앞에 도열한 이들이 전차와 현대화기로 무장한 제식 군대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면 호진은 어느새 자신의 세력이 이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 그러면 이제 슬슬 끝내러 가보죠.”
호진이 하야에 올라타며 말하자 연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금 쉬다 가는 게 어떻겠는가? 부상자들이 많네.”
“놈들은 자신들이 승리할 거라고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패잔병들이 도착한 후에야 수성을 준비할 텐데, 시간을 주면 줄수록 불리해지는 건 우리입니다.”
“호오 그것도 그렇군. 역시 현명하군.”
연대장은 새삼 놀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면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군인들도 큰일이네.’
그렇게 캠프와 군대의 연합군은 곧바로 적들의 본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