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반격 (2)
“생각보다 빨리 왔네.”
호진은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기승전투 스킬 덕분에 생각보다 시간이 단축됐다.
─띠링
「플레이어의 격이 오릅니다.」
한순간 격이 올랐다.
캠프 사람들이 호진을 발견한 것이다.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직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는데도 격이 오르다니.
자신에 대한 신뢰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믿음을 준다면, 믿음으로 보답해야지.”
피식 웃음을 흘린 호진은 대검을 어깨에 둘러멘 채 천천히 둔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호진을 발견한 리자드맨들 중 하나가 나팔을 불었다.
─우우우웅!
‘음?’
다음 순간 호진은 고삐를 당겨 하야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 장난하나.”
자신도 모르게 터져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척 척 척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수천의 군세.
정문 쪽을 제외한 모든 병력의 시선이 호진을 향했다.
그 예상치 못한 행동에 호진도, 군도, 캠프의 인원들도 모두 얼어붙었다.
적막이 흐르는 전장에는 규칙적으로 울리는 북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다음 순간, 적막을 깨고 웅혼한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텟─ 킬라카! 카라시, 나완!”
─쿵! 쿵!
치프의 독전에 수많은 병력들이 동시에 발을 굴렀다.
동시에 창과 방패로 땅을 두드리니, 그 진동이 한참 떨어진 호진에게까지 전달됐다.
“나, 유명해진 건가?”
호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었다.
아무래도 놈들 사이에 자신의 존재가 알려진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놈들이 이렇게까지 반응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리자드맨 군세의 목표는 어느새 군대에서 자신으로 변해있었다.
‘물러나야 하나?’
아무리 호진이라 해도 수천에 달하는 적을 혼자 베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물며 적진에는 콜드 블러드 기수와 치프, 템플가드를 비롯한 정예 병력들이 있다.
혼자서 이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능할지도?’
전장을 둘러보던 호진은 일말의 가능성을 봤다.
혼자서 전부를 죽이는 건 무리겠지만,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놈들은 로봇이 아니다.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끼는 생물이다.
그리고 이곳엔 호진만 있는 게 아니다.
군대와 캠프의 병력들을 생각하면, 놈들의 수를 약간만 줄여줘도 힘의 균형이 자신들에게 넘어올 것이다.
“일단 해보지 뭐.”
만약 생각대로 안 되더라도, 왠지 녀석들을 상대론 죽지 않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감인지 자만감인지는 결과가 말해줄 터.
호진은 하야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하야, 조금 더 뛸 수 있을까?”
“크륵.”
마치 말이 투레질을 하듯 콧방귀를 뀐 하야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긴,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일전에는 잠도 안 자고 수십 시간을 뛰어도 괜찮던 하야다.
고작 몇 시간 달린 것으로 지칠 턱이 없었다.
“가자.”
“크륵!”
짧게 그르렁거린 하야가 적들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호진이 향하던 곳의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벼려진 수백 자루의 장창들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창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촘촘하게 뻗은 창은 마치 높고 단단한 성벽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호진은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기세에 밀려 놈들이 물러날지도 몰랐으니까.
호진은 놈들과 거의 맞부딪치기 직전까지 달려갔다.
그럼에도 놈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에 호진은 고삐를 당겨 급히 선회했다.
역시 놈들은 무장 상태가 조금 허술할 뿐 잘 훈련된 정병들이다.
뭉쳤을 때 수십 배의 힘을 발휘하는 진짜 군대.
‘이거 시작부터 꼬이는데.’
혀를 찬 호진이 일렁이는 창의 파도를 따라 내달렸다.
아무리 잘 단련된 군대라 하여도 어딘가는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런 팔랑크스 진형의 경우, 진형의 가장자리와 후방이 허술하기 마련이다.
그때 호진의 눈에 들어온 건 진형과 진형 간의 틈.
전복된 차량으로 인해 진형이 다소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멀리 돌아갈 필요 없겠네.’
호진이 재빨리 그곳을 향해 내달리자, 놈들도 급히 진형을 좁히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우직
창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호진이 진형 속으로 난입했다.
그러자 진형은 순식간에 와해됐다.
호진이 진형 안으로 들어온 순간 장창은 무기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남은 것은 일방적인 학살뿐.
분명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척 척 척
아직 몇 명 베지도 못했는데, 거대한 방패와 단창을 든 병력이 호진을 둘러쌌다.
순식간에 호진의 주위로 세워진 방패 벽.
모든 병사에게 방패와 단창을 추가로 지급했을 리가 없다.
유독 큰 덩치와 단련된 근육들.
녀석들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템플가드.”
호진은 녀석들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속았다.
애초에 허술한 진형부터가 함정이었다.
유도당한 것이다.
템플가드들은 일반 리자드맨들 사이에 숨어 호진이 진형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알겠네.’
아까 전 발견했던 불안전한 진형 자체가 자신을 잡기 위한 포석이었다.
호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호진의 모습을 보고 템플가드들은 호진을 향해 한발 다가섰다.
무력해진 적만큼 잡기 쉬운 것은 없을 테니까.
그때 호진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좋네.”
그러자 템플가드들의 움직임이 일순 정지했다.
호진이 그렇듯이, 리자드맨들도 호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목소리에 깃든 소리는 좌절이나 무력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속삭임. 그러나 그 속삭임에 담긴 감정은…….
“좋아.”
희열과 즐거움 그리고, 약간의 광기였다.
고개를 들어 올린 호진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며 투기가 일렁거렸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긴장감.
잠깐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장.
‘아주 좋아.’
투쟁하여 승리하는 것.
이것이 호진에게 숨겨진 욕망이다.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증명하는 방법인 것이다.
호진의 두 눈을 마주한 템플가드들은 뒤로 흠칫 물러났다.
아마 뒤가 다른 리자드맨들로 막혀있지 않았다면 창을 내던지고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눈을 마주했을 뿐인데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격이 다르다는 것을.
“이리 와 증명해 봐라.”
호진은 다소 오연하게 말하며 대검을 어깨에 둘렀다.
그럼에도 아무도 호진에게 다가서는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호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내가 가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렁이는 호진의 신형.
그러자 하야 위에 있었던 호진이 사라졌다.
순간 호진의 모습을 놓친 템플가드들이 아연해하던 그때.
─쿵! 콰직
하늘에서 검은 형체가 날아들며 파육음이 울렸다.
“키이이이이익!”
호진은 놈들의 비명 소리를 뒤로하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호진이 억지로 비집고 만들어낸 틈이 점점 커져가더니, 순식간에 호진을 둘러싸고 있던 템플가드들의 진형을 와해시켰다.
또 어느 순간 하야 위에 올라타더니 무너진 진형을 벗어나 적진을 종횡무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고 정말 약한 녀석들 먼저 찾아 진형을 흔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내려친 검에 적들의 머리가 쪼개지고.
사선으로 내려그은 검에 적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럼에도 속도는 줄이지 않았다.
호진은 자신이 원할 때 검을 휘둘러 원하는 적을 벴다.
베고, 베고, 다시 또 베고.
리자드맨들이 장창을 다시 들이밀었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호진은 하야 없이 달려들어 단신으로 진형을 분쇄했다.
그리고 다시 하야에 올라타 도망치는 적을 베어 넘겼다.
그렇게 적들을 다시 베고 또 베다 보니 조금은 다른 녀석들이 길을 막아섰다.
호진처럼 콜드 블러드를 탄 기수들.
새로울 건 없었다.
이미 한번 경험해본 적들이었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호진이 달려들자, 놈들도 호진을 향해 마주 달렸다.
그리고.
─서걱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호진은 이전에 콜드 블러드들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 빠르게 놈들을 베어 넘겼다.
백랑의 땅에서 놈들과 싸운 후로 호진의 레벨은 고작 2레벨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나마도 이곳에 와서 놈들과 싸운 덕분이었다.
이전에는 콜드 블러드 기수 2마리, 혹은 3마리의 합격만으로도 진땀을 뺐는데 지금은 수십 마리가 달려들어도 여유로웠다.
‘아직 부족해.’
이 정도로는 호진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적들을 뒤로하고, 호진은 새로운 적을 물색했다.
“나완!”
어렵지 않게 발견한 강한 적.
황금투구를 쓴 치프가 고대 콜드 블러드의 위에서 호진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더니 한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녀석이 무언가를 빠르게 읊조리자, 그 손이 붉게 빛나더니 손끝에 불꽃이 맺히고 일렁였다.
잠시 후, 치프의 머리 위로 떠오른 불덩어리가 순식간에 몸집을 키우더니…….
─쾅!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불덩어리들이 호진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수백 개의 불꽃이 마치 폭우처럼 주변을 뒤덮었다.
호진은 재빨리 하야를 역소환했다.
이미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러던 중 옆에 있던 리자드맨 한 마리의 몸에 불꽃이 내려앉았다.
“크에엑!”
기름에 불이 붙듯, 불꽃이 리자드맨을 집어삼켰다.
호진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이 작열하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든 열기가 사방에서 솟아오르고, 불덩어리들은 더 빠르고 어지럽게 떨어졌다.
호진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내리는 불꽃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몸에서 시작해 주변으로.
주변에서 다시 조금 먼 곳으로.
순식간에 주변의 모습을 파악한 호진은 거침없이 오른쪽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호진이 서 있던 곳에 불덩어리가 내리꽂혔다.
이번엔 정면으로 한 발짝.
고개는 왼쪽으로 살짝 꺾었다.
그러자 불덩어리 하나가 뺨을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화기로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야와 상관없이, 근처 모든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감각.
어떤 의미에서는 한정적인 미래 예지와 다를 바 없다.
호진은 이제 뛰다시피 불꽃의 폭우 속을 내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을 휘감던 화기가 사라지고 서늘한 공기가 몸을 뒤덮었다.
호진이 스륵 눈을 뜨자, 당황한 치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치프는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려 불꽃을 손에 담았다.
하지만.
“당해주는 건 한 번뿐이야.”
어느새 다가온 호진은 치프에게 웃어 보이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여느 때와 같은 소리를 내며 양분된 치프의 머리.
호진은 머리가 공중에 떠오르기도 전에 낚아채 잡았다.
그 순간, 호진은 주위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도 리자드맨도 모두가 그저 꿈을 꾸는 표정으로 호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