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지원 (4)
“……저라면 시간을 끌 겁니다.”
“음?”
이제껏 나왔던 의견과는 전혀 다른 의견이다.
주 대위는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호진 씨라면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적의 본진을 치겠죠.”
“…….”
또 그 이름이 나왔다.
이호진.
도대체 그가 뭐 길래 이렇게까지 믿는 걸까.
천에 달하는 병사와 전차조차 당했다.
고작 창과 칼을 든 수십의 민간인으로 적의 본진을 어떻게 친다는 건지.
아니 혹여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적들이 본진으로 못 돌아가게 붙잡고 있는 겁니다. 지휘관을 잃은 녀석들은 알아서 와해될 테니.”
“……미끼로군. 그들이 승리해도 우리는 꼼짝없이 거의 다 죽겠어. 그러면 무슨 소용인가?”
“캠프의 시민들이 살겠죠.”
“…….”
김 대령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최악이라 생각한 상황보다 더 밑바닥이 존재했다.
최악의 경우가 군의 전멸인 줄 알았는데, 캠프라니.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존재했고, 그것이 턱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게 최선의 결과인가?”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주 대위의 대답에 김 대령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백 중령도, 주 대위도 자신의 라인을 타지 않아 내심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작전 수행능력은 비상한 인물들이다.
“우리의 희망은 그 남자라는 건가…….”
김 대령이 허무한 듯 웃던 그때, 1대대 대대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듣지 마십시오, 연대장님.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다잡으셔야 합니다.”
“……대대장. 그럼 자네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넵, 저희가 비록 적들의 비겁한 공격에 피해를 입었으나, 놈들에게도 큰 타격을 줬습니다. 놈들이 저희를 포위했다지만 그렇게 수가 많지 않다더군요. 놈들이 날고 기어봤자 도마뱀들이라는 증거입니다. 포위를 위해 병력을 분산시키다니. 저흰 이대로 포위를 뚫고 전진해 적의 본진을 쓸어버려야 됩니다.”
“…….”
“불만 있나, 주 대위? 왜, 자네가 말하던 기사님을 전력에서 빼먹어서 그러나?”
주 대위가 인상을 찡그리자, 대대장이 냉소하며 물었다.
주 대위가 반응하지 않자 대대장은 더욱 신나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자네 눈에는 지금 우리가 절체절명으로 보이겠지. 총을 들고도 창을 쥔 적을 무서워하니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하지만 우리에겐 전투 헬기와 사기 높은 보병이 남아 있…….”
─둥!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대대장은 말을 끊었다.
스산한 기운이 가슴께에 감돌았다.
고막을 울리는 북소리가 마치 죽음을 고하는 장송곡처럼 들렸다.
뿌우───!!
대학 건물 앞으로 펼쳐진 큰길을 따라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검은색 파도가 일렁였다.
전부 몇 마리일까.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적어도 수천 마리일 테니까.
놈들은 수비에 유용해 보이는 대학 건물로 진입하고 싶지는 않은지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포위를 풀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수천의 병력을 과시하는 녀석들.
그 목적은 분명했다.
바로 자신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것.
“우리에게 뭐가 남았다고요?”
“…….”
그리고 그 작전은 효과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주 대위의 질문에 대대장은 대답하지 못했으니까.
대답은커녕 얼굴이 하얗게 질린 대대장은 비틀거리다 옥상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정도 수의 적이라면 탄이 떨어지는 게 먼저일 거다.
적의 대략적인 전력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몇 주 전에 헤어진 호진의 정보가 군대보다 더 정확했다.
주 대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눈앞의 군대를 바라봤다.
“텟─ 킬라카!”
─쿵 쿵 쿵 쿵
황금색 투구를 쓴 리자드맨이 울부짖자 뒤에 도열한 수만의 군세가 일제히 발을 굴렀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천지가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이를 악물지 않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커다란 위압감.
“다다무 아훅툭 글로리카!”
─쿵 쿵 쿵 쿵
자신들이 충분히 시선과 시간을 끌 수 있을까.
주 대위는 그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때.
─쾅!
명백한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가 주 대위의 귓가를 때렸다.
그와 동시에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황금투구를 쓴 리자드맨도 수천의 군세도 누군가 일시 정지를 누른 듯 멈춰 섰다.
“안 돼!”
그 즉시 주 대위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지금 놈들을 공격한다면, 놈들은 전면전에 돌입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시간을 끈다는 당초의 계획마저 이루지 못할 터.
‘끝이다.’
주 대위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으려던 순간.
김 대령이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가 아니네.”
“……?”
우리가 아니라면, 리자드맨들이 포를 쏘는 법이라도 익혔다는 말일까.
주 대위가 고개를 들어 김 대령의 시선을 좇던 그 찰나.
─쾅!
두 번째 발포음이 귀에 울렸다.
동시에 주 대위는 대학의 동남쪽에서 불꽃이 번쩍이는 걸 보았다.
이윽고 흑색화약이 만들어낸 검은 안개가 점점 흩어지자, 그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잿빛의 짐승을 탄 경장 차림의 사람들이 손에 대포 비스무레한 걸 들고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자신들을 쫓는 리자드맨과 점점 거리를 벌리던 사람들.
그들은 갑자기 우뚝 서더니 뒤돌아서 방아쇠를 당겼다.
─쾅!
세 번째 발포 음이 울리자 뒤를 쫓던 리자드맨 무리가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그리고.
주춤한 리자드맨 무리를 향해 검은색의 바람이 날아들었다.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아까 본 폭발보다 더한 푸른 피 안개가 피어올랐다.
거침없이 내달리던 바람은 더 이상 벨 적이 없자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바람이 멈춰 선 곳엔 검은색의 짐승을 탄 검은색 코트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이쪽을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 입니다.”
주 대위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옆에 있던 김 대령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고,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평소 대령을 아는 이들에게 대령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안다고 말해줘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호진.”
잊지 않았는지, 김 대령이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비틀거린 그가 살짝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괴물이 진짜 있었군.”
주 대위는 대령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뒤집어쓴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한참이나 호진을 지켜보던 대령은 문득 의아한 듯 물었다.
“확실히 저 전력이라면 도마뱀 놈들의 본진도 노려볼 만하겠는데, 저자는 왜 이곳에 온 건가?”
질문에 잠시 멈칫한 주 대위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저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본진을 치지 않고 지원을 왔다는 사실이 의아하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지는 모습은 상상조차 가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주 대위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있었다.
***
“이쪽은 얼추 정리됐네.”
호진은 젖은 머리를 털어 푸른색 피들을 털어냈다.
그사이 청랑을 탄 도훈이 빠르게 다가왔다.
“놓친 녀석들은 정리했다. 이제 어쩌지?”
“놈들이 반응하기 전에 흩어진 병력을 최대한 잡아먹겠습니다. 지금처럼 놓친 녀석들만 정리하며 따라와 주세요.”
“쉽군.”
고개를 끄덕이는 도훈을 향해 호진은 기분 좋게 웃어 보인 후 말했다.
“아닐걸요?”
그와 동시에 호진은 북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훈은 고개를 젓고는 그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단장의 뒤를 따른다. 이 악물고 달리도록.”
““네!””
부단장 도훈을 포함한 감시단은 그들의 단장인 호진의 뒤를 있는 힘껏 따라붙었다.
그런 그들을 힐끗 쳐다본 호진은 마음 놓고 더욱 가속했다.
일순 풍경들이 뭉개져 거대한 색 덩어리들로 보인다.
그것도 잠시 전투 태세를 갖춘 리자드맨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도 호진의 존재를 눈치 챘는지 뭔가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
막상 호진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제대로 준비한 녀석은 한 놈도 없었다.
호진은 익숙하게 검을 휘둘렀다.
하야 위에 올라타 검을 휘두르는 행위도 수백 번 반복하자, 이젠 기계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경로의 창머리를 잘라내고 온갖 각도로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른다.
찌르고 베고 부수고.
휘두른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놈들을 양분하거나 급소를 갈랐다.
푸른 피가 하나둘 터져 나오다가, 어느새 공중에 솟아오른 피들이 공기와 맞닿으며 축축한 안개가 됐다.
이젠 놀랍지도 않은 장면을 가볍게 무시한 호진은 자신의 행동을 차분하게 관조했다.
처음 적진을 종횡무진할 때의 짜릿함은 잊었다.
호진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동작을 간결하게,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여태 배운 검술과 경험들을 즉석에서 조합하여, 더 좋은 검로를 찾아 조금씩 검에 변형을 준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다 보니 불필요한 동작이 점점 줄어들었다.
힘을 덜 주고 휘두름에도 검은 더 빠르고 강하게 상대를 양단했다.
─띠링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기승 전투 LV.1」
「기승 전투 LV.1(일반) : 탈것에 올라 전투하는 법을 익힙니다.」
「탈것에 올라 전투할 시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알림이 떴지만 호진은 힐긋 본 후, 오히려 눈을 감아버렸다.
지금의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감각으로 찔러오는 창을 피하고, 도망치는 적의 등을 갈랐다.
그리고 나아가 그 모든 행동을 하는 주체, 즉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스킬을 얻는 순간 균형을 잡는 것도, 검을 휘두르는 것도 한층 자연스러워지는 기분.
마치 처음 플레이어로 각성하여 스킬을 얻었을 때와 같은 감각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또 달랐다.
그때는 그저 좋아진 육체의 성능에 취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이 감각을 정확히 분석하고 활용할 자신이 있었다.
투검 이후로 한 달여 만에 얻은 새로운 스킬.
그것을 천천히 음미하며 검을 휘두른다.
더 예리하게, 더 정확하게.
마치 도축을 하듯이 적의 몸을 가른다.
─띠링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기승 전투 LV.1 → 기승 전투 LV.2」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기승 전투 LV.2 → 기승 전투 LV.3」
스킬이 동시에 오르며 호진은 하야의 고삐를 더 강하게 당겼고, 하야는 가속을 멈추지 않고 호진의 기세에 호응하듯 속도를 높였다.
마치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내달리던 호진은 문득 쥐고 있던 고삐를 슬쩍 풀며 검을 내렸다.
그에 맞춰 하야가 속도를 줄이고 호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것도 없는 산길.
고개를 돌리자 그가 지나온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리자드맨들의 잔해가 뒤집어진 흙길 위로 쏟아져 내리는 중이었다.
마치 예리한 고압의 물, 즉 워터젯 가공에 잘려나간 듯 깔끔하게 양분된 리자드맨의 시체들.
호진의 몸은 아까완 달리 피에 젖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에 씻겨나가 깨끗해진 호진은 저 멀리 푸른 피 안개를 헤치며 달려오는 감시단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거봐요. 힘들 거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