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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54화 (54/241)

54화. 세 군대 전투 (3)

붉게 물든 정족산.

지는 석양과 붉은 낙엽 위로 피가 덧칠되어 세상이 온통 붉고 푸르게 물들었다.

만약 리자드맨들의 피마저 붉은색이었다면 제법 볼만했을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반나절이 흐르고 이곳에 서 있는 것은 오직 50명의 인간들과 100마리 정도의 늑대뿐이었다.

두 세력은 마치 대치하듯 서로 모여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인간 측도 늑대 측도 피곤해 보였다.

잠시 사람들을 둘러보던 호진은 비틀거리며 선 주호의 어깨를 붙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끝났어. 진짜 이젠 서 있기만 하면 돼.”

“아, 형. 전 괜찮아요.”

주호는 덜덜 떠는 다리를 방패로 가리며 웃어 보였다.

“……괜찮기는. 5분 안에 끝낼게.”

“……넵.”

호진은 주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하야에 올라타 늑대들을 향해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랑 역시 다친 몸을 힘겹게 일으켜 무리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느덧 가까워진 둘은 마주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호진이었다.

“백랑, 인간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

백랑이 말없이 고개를 갸웃하자 호진은 머리를 짚었다.

꽝이었다.

하야도 이카루스도 자신의 말을 알아듣기에 조금 기대했다.

하지만 늑대들은 말이 통하기는커녕 의사조차 통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포섭하려 했지만, 이번 기회에 늑대들을 정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복속은 없느니만 못하니까.

호진이 검 자루에 손을 얹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늑대들은 몸을 낮게 낮추고 그르렁거렸고, 인간들 또한 방진을 갖추고 하늘을 향하던 창을 앞으로 뻗었다.

그때 백랑이 늑대들을 향해 위협하듯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늑대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하던 기세를 풀고 끼잉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역시 똑똑한데.’

백랑은 지금의 정전이 양방의 합의가 아닌 호진의 필요로 이뤄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렇다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리자드맨들로부터 한 번 구해줬기 때문일까.

녀석은 호진이 검 자루에 손을 올렸음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이렇게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호진이 검을 뽑아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이카루스가 날아와 백랑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이카루스?”

“호오 호오.”

이카루스가 여느 때처럼 울자 갑자기 백랑이 호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통역이 되는 걸까?’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알아듣겠다면 꼬리를 흔들어라.”

“호오 호오.”

호진이 말함과 동시에 이카루스가 울었다.

잠시 멈칫한 백랑은 꺼림칙한 태도로 꼬리를 살랑거리며 흔들었다.

이렇게 보니 영락없이 강아지 같았다.

덩치는 코끼리만 하지만 이상하게 귀여웠다.

호진은 백랑을 쓰다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은 참아야 했다.

한껏 표정을 굳힌 호진은 딱딱하게 말했다.

“이해했다고 여기고 물을게. 나는 지난번 이유 없이 너희들에게 한 번 죽을 뻔했어.”

이카루스가 번역이라도 하듯 울음소리를 내자 백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이번 습격으로부터 너희들을 구해줬지.”

백랑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도 상관없다는 듯 눈을 살짝 감기까지 했다.

“필요에 의해서 구해주긴 했지만, 언제 내 사람들을 해칠지 모르는 너희를 그냥 놔둘 수는 없어. 그렇기에 내 요구에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모두 벨 거야.”

스륵 눈을 뜨고 호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백랑.

호진이 꺼낸 이야기가 의외인 것 같았지만 수긍하는 느낌이었다.

“내 요구는 간단해. 내 세력으로 들어와. 나와 함께 살고, 내 옆에서 싸워. 그럴 수 있겠어?”

호진의 요구를 들은 백랑은 잠시 멈칫했다.

한눈에 봐도 이 늑대들은 누군가에게 복속될 종족은 아니었다.

실리보다는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듯했기에, 호진은 말하면서도 가능성을 반반이라고 봤다.

굳은 표정으로 고민하던 백랑은 호진을 향해 한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숙여 하야가 딛고 선 바닥에 머리를 내려놨다.

누가 봐도 복종의 의미였다.

“됐어, 일어나. 내가 원하는 건 동료지, 노예가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백랑이 고개를 들더니 갑자기 호진의 머리를 핥았다.

일종의 그루밍으로 친근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피가 굳어 퍼석퍼석하던 머리가 침으로 범벅이 됐다.

아까도 찝찝했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더 낫지는 않았다.

호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백랑을 쓰다듬었다.

보던 대로 부드러운 털이 한 움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묘한 쾌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워 뭔가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거, 습관 될 것 같아…….’

하야 말고 이 녀석을 타고 다녀볼까라고 생각하던 찰나.

하야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속마음을 읽혔을 리는 없지만 뜨끔한 호진은 재빨리 백랑의 털을 놓았다.

호진과 백랑을 지켜보던 두 세력은 의아한 듯했지만, 이내 둘 다 긴장을 풀었다.

다행히 잘 마무리가 됐다고 생각하던 그때.

다른 한 무리의 늑대 떼가 나타났다.

그 선두에는 익숙한 녀석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호진에게 큰 위기를 선사했던 청랑(靑狼)이 200마리쯤 되는 늑대들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녀석을 본 백랑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는 분노와 약간의 실망감이 뒤섞여 있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숨어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나.’

안 그래도 종족의 명운이 걸린 전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청랑은 꼬리를 세우고 백랑에게 다가와 몇 번 그르렁거렸다.

그러자 그 둘을 사이에 두고 늑대들이 빙 둘러섰다.

‘아. 역시 실망시키질 않네.’

청랑 저 녀석은 정말 난세의 간웅이다.

위험에서 발을 빼 상태를 지켜보다가,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내고 우두머리 자리를 탐하는 것이다.

뭐, 명분이야 청랑이 그르렁거리며 호진 쪽을 몇 번 쳐다본 것으로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인간에게 복종하다니 치욕이다, 뭐 그런 거겠지.’

확실하진 않지만 비슷한 것일 터다.

호진은 피식 웃으며 하야에서 내린 후, 둘을 빙 둘러싼 늑대들 사이를 지나쳤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늑대무리를 뚫고 호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금방이라도 맞붙을 듯하던 백랑과 청랑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카루스!”

호진의 외침에 이카루스가 푸드덕 날아와 팔에 내려앉았다.

“저놈한테 전달해. 이제 무리의 우두머리는 나라고. 대결을 신청하려면 상대가 잘못됐다고.”

“호오 호오.”

이카루스가 몇 번 지저귀자 백랑은 난색을 표했고, 청랑은 분노하여 낮게 으르렁거렸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받아주지.”

호진은 일부러 도발까지 해봤지만, 사실 이 대화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

청랑은 한참 호진을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그를 따르는 늑대 200여 마리도 함께.

‘진짜, 현명하다니까.’

청랑은 호전적이고 과감하지만 절대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인간으로 치면 타고난 지장이자 자존심을 굽힐 줄 아는 명장이리라.

다만, 이건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호진은 발을 굴러, 물러나던 놈의 앞을 순식간에 가로막았다.

순간 청랑의 얼굴에 의아함과 경계심에 뒤이어 낭패감이 흘렀다.

똑똑한 녀석인 만큼 호진의 의도를 이해한 것이다.

“누가 돌려보내 준대. 너도 선택지는 둘 중 하나야. 내게 복속되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죽거나.”

“크르르르르륵…….”

녀석은 낮게 그르렁거렸으나 그게 끝이었다.

이 전쟁을 지켜본 녀석이 이제 와서 호진에게 대결을 신청할 턱이 없었다.

청랑은 잠시 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녀석은 조금의 여지를 줘도 안 돼.’

호진은 고개를 숙인 녀석에게 다가가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눌렀다.

녀석의 입에서 늑대보단 개에 가까운 깨갱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의 어리광이나 잔머리를 봐주는 건 이번만이야. 여기의 우두머리는 나다.”

이야기가 잘 전달됐는지 청랑은 연신 흙바닥에 고개를 비비며 끄덕거렸다.

호진은 손을 놓아주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익숙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띠링

「한 세력을 복속시켰습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오릅니다.」

예상치 못했던 수확이다.

이번 전투를 통해 제법 얻은 것들이 컸다.

동쪽 지역을 얻어냈고, 늑대들의 복속도 받아냈다.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 일대에서 늑대들에게 덤빌 수 있는 것은 리자드맨뿐이다.

한동안은 동쪽의 관리를 맡겨도 될 것이다.

또한 동쪽을 얻으며 북쪽의 강화대교 캠프에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됐다.

조만간 정비가 되는 대로 강화캠프와 연계하여 북쪽의 리자드맨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헌터들도 이번 전투를 통해 크게 성장했고, 호진도 심심치 않게 레벨을 올렸다.

치프를 잡고 보상도 받았으니 있다가 확인해봐야 한다.

“잘 해결됐네요. 모든 게 순조로운 것 같아요.”

누군가의 플래그 꽂는 소리에 호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박 순경이 흐뭇한 표정으로 늑대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강화도가 우리 주호 주연이가 살기에도 위험하지 않은 곳이 되겠죠.”

“그─마안! 박 순경님, 미치셨어요?”

호진이 박 순경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박 순경은 그런 호진의 행동에 당황해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왜, 왜 그러세요, 호진 씨?”

“박 순경님은 평소 만화나 영화도 안 보십니까?”

“예? 예. 사실 그런 것보다는 스포츠 경기를 더 좋아해서.”

호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세상엔 미신 같은 징크스도 있지만, 미신으로 위장한 진리도 있습니다. 박 순경님은 방금 저희를 큰 위험에 빠트리신 겁니다.”

“그,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취소하겠습니다.”

박 순경이 허겁지겁 사과하자 옆에 있던 용재가 한심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무시하세요, 박 순경님. 형이 이상한 데서 새가슴이라니까요? 저번만 해도 제가 비슷한 말 했을 때도 난리를 쳤는데 그때도 별일 없었어요.”

“……별일이…… 없었다고? 갑자기 아파트로 감염자들이 개떼처럼 몰려들고, 뜬금없이 와이번이 길 한복판에서 우리를 막아섰는데, 별일이 없었다고?”

“에이, 그런 건 다 우연이지.”

“…….”

호진은 숨이 턱 막혔다.

미신을 믿지 않았던 자신이 누구 때문에 이런 징크스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호진이 억울해서 부들거리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풉.”

“푸훗.”

전장에서 호진은 전신(戰神)을 연상케 했다.

압도적인 무력과 존재감.

가끔 풍기는 기세에 같은 편조차 무릎이 떨려왔다.

그런 호진이 부대의 공식 바보 용재와 말싸움을 하니 웃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호진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지자, 예은이나 주 대위 같이 친한 이들은 아예 박장대소를 했다.

호진은 헛기침을 하며 사람들에게서 슬쩍 몸을 돌렸다.

화제를 돌릴 겸 호진은 전해야 할 말을 입에 담았다.

“끝났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호진이 슬쩍 고개를 숙이자 사람들은 흐릿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에 늑대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쫑긋하며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눈치 좋은 백랑이 길게 하울링을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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