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세 군대 전투 (2)
─콰짓
뼈와 살이 분리되는 파육음.
용맹하게 달려드는 늑대들은 거대한 황금색 할버드가 휘둘러질 때마다 허망하게 피를 뿌렸다.
‘무시무시하네.’
군단을 이끄는 치프의 무력은 다른 리자드맨들과 궤를 달리했다.
녀석은 거대한 병장기를 수수깡 휘두르듯 하며 정예 늑대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열세의 상황임에도 녀석이 할버드를 휘두를 때마다 리자드 기수들의 사기가 끓어올랐다.
녀석이 타고 있는 콜드 블러드 또한 남달랐는데, 우선 두툼한 피부는 마치 장갑차를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늑대들이 간간이 할퀴거나 물어보려 했지만 흠집만 조금 날 뿐이었다.
그리고 코와 이마에는 긴 뿔이 솟아있는데, 녀석은 이를 앞세워 늑대무리를 꿰뚫었다.
그 외형이 트리케라톱스와 비슷했다.
하야처럼 특별한 개체가 분명했다.
잠시 녀석의 주변을 맴돌며 다른 리자드맨 기수들을 처리하던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놈이지만 해볼 만했다.
녀석은 저번에 싸웠던 치프와 동급.
혹은 그보다 조금 못했다.
‘딱 좋은데?’
호진이 리자드맨 기수를 베어 넘기며 흡족하게 미소 짓던 그 순간.
치프의 시선이 호진을 향했다.
***
치프는 특유의 노란 안광을 번뜩이며 눈앞의 적을 위아래로 훑었다.
자신과 같은 고대의 콜드 블러드를 타고 있는 인간.
치프의 머릿속에 대족장에게 전해 들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아훅─쉬툭 남부의 위대한 치프, 칠라를 죽인 인간이 있다는.
처음에는 농담이라 생각했다.
이곳의 인간들은 형편없었기에.
하지만 눈앞의 인간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저자가 분명했다.
저 인간이라면 칠라의 상대로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치프는 그대로 고삐를 당겨 인간을 향해 콜드 블러드를 몰았다.
“텟─킬라카!”
성대를 타고 영혼의 울림이 터져 나왔다.
리자드맨의 삶의 목적이자 이유.
그것은 투쟁(텟─킬라카).
치프는 강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기쁨에 전율하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고고하게 자신을 마주 보던 인간도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대로 콜드 블러드의 몸을 돌려 뒤로 내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치프는 당황한 나머지 잠시 콜드 블러드를 멈춰 세웠다.
황당한 표정으로 인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치프는 이내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노를 토했다.
“추우테. 나완!”
평소의 점잖던 자신의 목소리와는 다른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호적수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추태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녀석은 전투의 명예를 더럽혔다.
저런 인간이 치프 칠라를 이겼을 리가 없다.
오해가 있었거나, 더러운 수를 썼을 터.
이를 악문 치프는 인간의 뒤를 매섭게 따라붙었다.
인간이 타고 있는 콜드 블러드도 제법 빨랐지만 자신의 오랜 친우보단 아닌 듯했다.
달라붙는 늑대들을 짓밟고 으깨며 내달리기도 잠시.
드디어 인간의 바로 뒤까지 따라잡았다.
놈을 향해 할버드를 휘두르려는 그 찰나, 자신을 슬쩍 돌아본 인간은 자신의 콜드 블러드에게 알 수 없는 말을 외쳤다.
“걷느라 수고했다. 이제 뛰어!”
그와 동시에 앞서 내달리던 인간의 콜드 블러드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한 걸음, 열 걸음, 그리고 백 걸음.
둘 사이의 거리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벌어졌고, 놈은 그대로 전장을 이탈했다.
“크륵?”
치프는 자신도 모르게 쇳소리를 흘렸다.
갑자기 놈의 속도가 빨라진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여태껏 일부러 천천히 달린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이유는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크르르르르르륵.”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에 비늘이 오싹했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백색의 늑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속았다.
인간의 뒤를 뒤쫓다 보니 어느새 홀로 적진 한가운데에 있었다.
“크르륵, 나완…….”
더러운 인간에게 속아 유인당했다.
하지만 이런 위기는 몇 번이고 있었다.
오랫만에 겪는 위험에 치프의 피가 뜨겁게 들끓었다.
“다다무 아훅툭 글로리카!”
호수를 기는 여신을 위하여.
치프는 할버드를 높게 치켜들며 외쳤다.
그에 호응하듯 백랑(白狼)이 쇄도해왔다.
치프 역시 콜드 블러드의 고삐를 잡아당겨 백랑을 향해 내달렸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둘의 공방은 한참 동안 치열하게 이뤄졌다.
백랑은 마치 폭풍을 두른 듯 거친 돌풍과 함께 몰아쳤다.
치프의 할버드는 백랑의 날카로운 발톱에 몇 번이나 튕겨 나가고, 강철조차 상처 입힐 수 없는 콜드 블러드의 피부는 녀석의 송곳니에 너덜너덜해져 뼈가 드러났다.
오랜만에 만난 강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끝내 자신이 살아남았다.
“켁, 켁…… 크르르르르르륵.”
치프와 조금 떨어진 정면에서 백랑이 피를 울컥 토해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했지만, 그마저도 왼쪽 뒷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할버드가 힘줄을 그어낸 탓이다.
주변에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늑대들의 머리가 하나둘 아래로 처박혔다.
꼬리를 말아 넣은 모양새들이 볼 만했다.
우두머리의 패배를 직감한 까닭이다.
“다후카 움태. 자비르.”
이제 남은 것은 안식의 세계로 보내주는 것뿐이다.
그 후에 늑대 놈들을 마무리하고 전군을 동원해 남쪽의 인간들을 쓸어버리리라.
전사의 최후를 예우했기에 내려졌던 대족장의 자비는 취소될 것이다.
간악하고 명예도 없는 인간.
도망치는 실력 하나만큼은 일품이었지만, 그렇기에 멀리서 죽어 나가는 동료들을 보게 될 것이다.
치프는 천천히 백랑을 향해 다가가 할버드를 들어 올렸다.
백랑은 치프를 바라보며 끝까지 이를 드러냈다.
끈질긴 짐승이었다.
마무리를 위해 할버드를 내리찍으려던 그 순간.
치프는 섬찟한 기운에 몸을 급하게 틀었다.
─팡!
그리고 다음 순간 파공음과 함께 검 한 자루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치프가 검이 날아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공중에 무언가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어딘가 낯이 많이 익은 물체.
청푸른 색의 비늘이 덮인 두꺼운 팔.
그건 다름 아닌 자신의 팔이었다.
“케, 륵.”
그것을 인지하자 허전해진 왼팔에 격통이 몰려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흠, 생각보다 맞추기가 어렵네.”
그때 검이 날아온 방향에서 인간 하나가 유유히 나타났다.
놈이었다.
콜드 블러드에서 내려서 접근해왔기에 지금에야 눈치챘다.
치프는 조용히 어금니를 깨물었다.
설마 방금 저 인간이 검을 투척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기회였다.
놈은 콜드 블러드에 타지 않았고 손에 무기도 없었다.
심지어 투척이 장기인 놈이 지근거리에 무방비하게 서 있었다.
치프는 콜드 블러드에서 뛰어올라 인간의 머리 위로 할버드를 내려찍었다.
제법 실력이 있는 것 같지만, 너무 방심했다.
이깟 팔 하나쯤 날아가도 아무렇지 않다.
자신을 우습게 본 대가는 죽음뿐이다.
치프가 미소를 지으려던 그 찰나.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다음 순간 세상이 반전됐다.
하늘, 땅, 하늘, 땅, 하늘…….
빙그르르 하고 세상은 몇 번이고 돌고 돌았다.
그리고 멈춘 시야 속에 보이는 것은 힘없이 무릎 꿇고 넘어진 자신의 몸이었다.
대족장의 평가는 잘못됐다.
놈은 유달리 특출한 인간 정도가 아니었다.
방금 놈에게 느껴진 기운은 필멸자의 것이 아니었다.
알려야 한다.
알려야…….
벙긋거리던 치프의 입은 얼마 못 가 다물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
─띠링
「아훅 쉬툭 북부의 리자드맨 치프를 쓰러트렸습니다.」
「‘호수를 기는 여신’이 당신을 적대합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투검 LV1 → 투검 LV2」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거합 LV7 → 거합 LV8」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됩니다.」
좋다.
짜릿하다.
힘을 빼놓고 방심을 유도한 후 막타라니.
이보단 더 달달할 순 없었다.
상대가 단순해서 다행이었다.
설마 이 정도까지 생각한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호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치프에게 던졌던 대검을 줍기 위해 걸어갔다.
치프의 팔 한쪽을 앗아간 대검은 바위를 뚫고 박혀있었다.
‘위력은 역시 좋네.’
문제가 있다면 정확도와 속도다.
아무래도 창과 비교하면 투척용으로는 접합하지 않은 구조다.
그런 탓에 영 정확도가 떨어졌다.
이건 수없이 반복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래도 원거리 공격이 가능해지다니, 너무 좋네.’
호진은 피식 웃으며 대검을 어깨에 둘렀다.
기(氣).
그것을 익힌 후 호진의 전투 패러다임은 완전히 바뀌었다.
기를 두른 것만으로 호진의 검은 바위를 부수고 철을 갈랐다.
마치 광선검이라도 들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사냥하고 단련하며 강해졌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치프 정도의 강적과 싸워보니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확실히 강해졌구나. 이렇게까지 안 했어도 쉽게 이겼겠네.’
그래도 그 덕분에 일 처리가 쉬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호진은 고개를 돌려 다친 백랑을 바라봤다.
백랑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조금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기보단 내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불안함이 담겨있었다.
가만히 녀석과 눈을 마주하던 호진은 피식 웃은 후 목에 걸린 뿔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혼잡한 무리를 지나 순식간에 하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진인 그 위로 훌쩍 올라타며 입을 열었다.
“백랑. 넌 오늘 나한테 빚진 거다. 거기 앉아서 전쟁이 끝나는 거나 지켜봐.”
“크륵.”
백랑은 갸웃거리면서도 호진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덜덜 떨리던 몸을 바닥에 눕혔다.
우두머리가 인정을 한 탓일까.
호진을 둘러싸고 있던 늑대들이 순순히 길을 열어줬다.
‘그래, 우선 이거면 됐다.’
나머지는 전쟁을 마무리하고 천천히 이야기해도 문제없다.
‘이야기가 통하면 좋겠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너무 손이 많이 갈 것이다.
그건 좀 곤란했다.
─탁 탁
하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비켜선 늑대들이 머리를 숙였다.
두 진영의 핵심이자 중추인 최강의 패들의 전투는 늑대들의 승리로 마무리됐지만, 리자드맨 군단과 늑대들의 싸움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다.
사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전투는 끝낼 수 있다.
방법도 간단하다.
치프의 수급만 보여줘도 리자드맨들은 뿔뿔이 흩어지리라.
하지만 그것은 호진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급한 불은 껐으니 남은 리자드맨들을 잘 활용해, 데리고 온 사람들을 성장시켜야 한다.
조금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다.
북쪽의 리자드맨들의 세력은 언젠가는 부딪칠 상대다.
줄일 수 있다면 전력을 줄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 쪽 전력을 올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호진은 전쟁의 끝을 그렇게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오만해 보일 수 있지만 이건 당연한 이치였다.
전투를 끝내는 것은 승자의 권리이다.
그리고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승자는 늑대도 리자드맨 군단도 아닌, 바로 호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