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세 군대 전투 (1)
정오의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완연한 가을에 접어든 탓에 뜨겁다기보다는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햇살은 얼어붙은 사람들의 긴장을 부드럽게 녹여줬다.
어느새 거의 져버린 낙엽들을 밟으며 도로를 나아가는 호진과 50인의 전사들.
정비되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었음에도, 도로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직 호흡이 흐트러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나아가던 중 선두에 선 호진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움켜쥔 주먹.
다음 순간 뒤따르던 이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멈춰 섰다.
하야 위에 올라탄 호진의 귀에 소음이 잡혔다.
물어뜯고 찢고 베고 찌르고 울고 고함치는 전장의 소리가 언덕을 넘어 들려왔다.
‘다 왔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손을 흔들어 대열을 정비했다.
길게 늘어섰던 행렬은 순식간에 5열 횡대가 되었다.
호진의 쭉 편 손이 정면을 향하자 골렘을 선두로 한 이들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언덕에 오른 호진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괴물들의 대규모 전투였다.
강화 정족산.
늑대들의 영역 안쪽에 위치한, 본진과 다름없는 곳.
그곳을 지키기 위해, 늑대들 수백 마리가 수천의 리자드맨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다.
호진의 옆으로 다가온 주 대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경악했다.
전투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전투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놀랐습니까?”
호진의 질문에 주 대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젠 상관없습니다. 안 그래도 저쪽이 우릴 눈치채줘야 일이 진행이 되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계획이신 겁니까?”
주 대위는 꾹 참았던 궁금증을 토해냈다.
그러자 호진이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저희의 목표는 지원입니다. 지원 대상은 저기 늑대들이고요.”
“…….”
주 대위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하자 호진은 말을 덧붙였다.
“3일 전 밤. 늑대들은 적에게 기습을 받았습니다. 수십 마리가 죽고 다쳤죠. 하지만 늑대들은 참았습니다. 적이 ‘콜드 블러드’였으니까요.”
콜드 블러드, 즉 냉혈동물.
일반적으론 외부의 열을 얻어 체온을 유지하는 생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상태창에서는 다른 녀석들도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불렀으니, 그건 바로 리자드맨들이 타고 다니는 괴물들이었다.
근처에 놈들을 다루는 건 리자드맨들밖에 없었으니 늑대들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힘의 차이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도 습격이 반복됐습니다. 늑대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죠. 놈들은 곧바로 근처 리자드맨 캠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고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주 대위가 놀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호진이 타고 있는 하야를 보고 덜컥 고개를 멈췄다.
검은 광택의 비늘과 땅을 딛고 있는 날카로운 발톱과 날렵한 꼬리.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차가운 피.
“설마?”
주 대위의 목소리가 떨렸다.
“주변에 온통 적뿐인 지금만큼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쓰기 좋을 때는 없죠.”
주 대위의 예상대로 야밤을 틈타 늑대들을 기습한 건 다름 아닌 하야였다.
늑대들의 입장에서는 꼼짝없이 오해할 만한 상황.
호진은 재차 말을 이었다.
“저 리자드맨과 늑대들은 각자 세력을 형성하고 있고, 겪어본 바론 지능도 높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다면 이용할 수도 있죠.”
호진이 슬쩍 웃은 후, 스미스에게 말했다.
“슬슬 시작하겠습니다. 용재야. 개전(開戰)의 나팔을.”
“응!”
용재는 호연이 만들어준 스피커가 달린 나팔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숨을 들이쉰 후, 나팔의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었다.
공기가 떨렸다.
낙엽이 떨어졌다.
흔들리는 금속관을 따라 모든 게 진동했다.
웅혼하게 퍼져나간 소리가 전장을 뒤덮었다.
낮게 내리깔린 관악기 소리에 전장은 찬물이 부어진 듯 차갑게 식었다.
늑대들과 리자드맨들의 시선이 호진들에게 쏠렸다.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호진은 그 감각에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역할은 간단합니다. 이곳을 사수하는 것. 어렵겠습니까?”
““아닙니다!””
50의 전사들이 목이 찢어지라 대답했다.
작지만 단결된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믿고 맡기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흐릿하게 웃어 보인 호진은 하야에 올라탄 채 몸을 돌렸다.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 하야는 한 걸음 한 걸음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호진은 하야의 고삐를 꽉 틀어쥔 채 허리와 어깨에 힘을 주었다.
적들과 가까워지니 홀로 내달리는 호진을 보던 리자드맨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의아함, 한심함, 연민을 담고 있던 눈동자들.
하지만 점차 녀석들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아마, 이제야 다가오는 호진의 속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몇몇 빠른 녀석들은 재빨리 손에 꼬나쥔 무기들에 힘을 주고 호진을 향했다.
그러나 호진은 이를 보고 한층 더 고삐를 당겨 가속한 후 검을 휘둘렀다.
아니, 정확하게는 맞부딪쳐 오는 바람을 가르며 검을 적들이 있을 곳에 가져다 댔을 뿐이다.
그걸로 충분했다.
─쾅!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방에 피가 비산했다.
이미 인간의 신체를 아득히 초월한 호진조차도 뼈가 덜컥거릴 정도의 충격이 느껴질 정도였다.
곧이어 파육음이 귀에 울려 퍼졌다.
검에 이어, 하야의 강철 가슴 덮개에 치인 리자드맨들이 분쇄됐다.
그러고도 하야는 멈추지 않았다.
충돌 이후 속도가 줄어들긴 했으나 여전히 날카롭고 단단한 발톱으로 리자드맨들을 짓밟으며 바람같이 내달렸다.
호진은 날아드는 날붙이를 쳐내는 데 집중했다.
그가 휘두른 거대한 투핸디드소드가 날붙이들을 수수깡처럼 가르고 부쉈다.
그러고는 무기를 잃고 망연한 녀석들을 짓이기고 양분했다.
전장에 난데없는 피보라가 일었다.
리자드맨들의 뜨뜻미지근한 푸른 피가 몸을 뒤덮었다.
숨이 막히고 입에 핏물이 계속 흘러들어왔지만 호진은 멈추지 않았다.
눈을 부릅뜬 채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베어 넘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앞의 시야가 탁 트였다.
호진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푸른 하늘 아래 앙상한 나무의 가지들만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호진은 고삐를 천천히 한쪽 방향으로 당기자 하야가 몸을 돌렸다.
그곳엔 호진이 지나쳐온 피의 길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호진과 인간들의 등장에 얼어붙었던 두 진형은 어느새 다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밀리고 있던 늑대들의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잘 짜인 진형에 연신 물러나던 늑대들이 호진에 의해 흐트러진 진형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기세가 넘어온 것이다.
템플 가드들 같은 엘리트들이 빠르게 진형을 재구축하고 있었지만, 이미 피해가 상당했다.
무엇보다 리자드맨들은 호진을 지켜보느라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떨리는 시선들에서 놈들의 공포가 전해져왔다.
“하야. 지쳤니?”
호진의 물음에 하야가 콧김을 가볍게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마치 턱도 없다는 듯이.
그 모습에 호진은 빙그레 웃으며 하야의 목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그럼, 한 번 더 가볼까?”
“크르르릉.”
하야가 리자드맨들의 진형 쪽으로 발을 내딛자 가까이 선 리자드맨들이 눈에 띄게 물러났다.
재차 발을 옮기자 몇몇이 무기를 내던지고 진형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지금 적들의 눈에 호진은 재해(災害)와 진배없었다.
갑자기 나타났는데 막을 수조차 없다.
이것이 두렵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호진은 굳이 도망치는 적을 쫓지 않았다.
퇴로를 열어두고 남은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호진은 마치 적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남아봤자 손해라고.
어서 도망가는 것이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자리를 이탈해 도망치는 동료를 본 리자드맨들의 동공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놈들의 사기가 눈에 보이게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호진은 이제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녀석들 사이를 종횡무진(縱橫無盡)했다.
그때.
─두두두두두두
땅울림과 함께 보병들 뒤에 서 있던 콜드 블러드 기병대가 호진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선두에는 황금색 투구를 쓴 채 거대한 할버드를 든 치프가 보였다.
“이제야 움직이는 건가.”
호진은 혀를 차며 말했다.
반응이 늦었다.
이미 전황이 많이 기울었다.
자신이었다면 예상치 못한 적이 등장한 순간, 기병대를 움직여 발을 묶은 후 보병들을 뒤로 물렸을 것이다.
상대 치프의 무력은 알 수 없으나 판단력만큼은 좋게 봐주기 힘들었다.
호진은 조금은 안타까운 눈으로 기병대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움직인 것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크르르르르륵.”
다른 늑대들보다 월등히 커다란 늑대무리를 이끄는 새하얀 늑대가 기병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자랑하는 진영의 핵심이자 중추인 최강의 패들.
전력을 보전해 온전히 맞부딪쳐야 하는 그들이지만…….
호진을 목표로 공격해오는 리자드맨들은 자신들을 향해 쇄도하는 늑대무리를 보고는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갑자기 목표가 바뀐 탓인지 속도나 기세가 줄어든 녀석들을 향해 새하얀 늑대의 어금니가 짓쳐들어왔다.
백랑(白狼).
차카르타 회색늑대들의 우두머리.
일반 늑대의 5배는 가뿐하게 넘어 보이는 녀석은 원반이라도 낚아채듯 콜드 블러드 기병의 목덜미를 가뿐하게 물어뜯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집단이 뒤엉키며 붉고 푸른 피 안개가 피어올랐다.
서로 내달리던 충격만으로도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튀어나왔다.
그런 정신없는 전황 속에서도 치프와 백랑의 활약은 도드라지게 보였다.
잠시 녀석들을 지켜보던 호진은 천천히 그곳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 세력 모두 이미 호진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이었겠지만.’
호진은 즐겁게 웃으며 그 혼잡한 난전에 끼어들었다.
그를 발견한 리자드맨 기병이 창을 찔러오자, 호진이 가볍게 피하고 콜드 블러드째로 놈을 양분했다.
그걸 본 다른 두 기병이 꽤 그럴듯한 합격(合擊)을 가해왔다.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호진은 검으로 한 녀석의 창을 흘리고, 다음 녀석이 내찌르는 창을 다른 쪽 손으로 잡아챘다.
무기를 뺏긴 녀석이 당황하던 찰나.
하야가 녀석이 탄 콜드 블러드의 목을 물어 비틀어버렸다.
호진은 기수가 중심을 잃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목을 베어버린 후, 뒤를 돌았다.
파트너를 잃은 녀석은 흥분해 창을 앞세워 내달려왔지만 당연하게도 그 창이 호진에게 닿을 일은 없었다.
창의 자루를 잘라낸 대검은 녀석의 머리를 세로로 쪼갰다.
이후 잠시 주변을 둘러보자 늑대들밖에 없었다.
늑대들은 호진을 경계하면서도 달려들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자신들을 돕고 있다고 여겼거나.
혹은 호진이 두렵거나.
호진은 전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저번엔 호진이 한 방 먹었을 정도로 똑똑한 놈들이었으니까.
“뭐, 잘 부탁한다.”
호진이 주변의 늑대들을 향해 웃어 보이자 늑대들이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딱히 겁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호진이 서운해하던 그때.
저 멀리 붉은색 피가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피와 털이 엉겨 붙은 황금색 할버드가 반짝이고 있었다.
“거기 있었네.”
호진은 고삐를 당겨 하야에게 목표를 알려줬다.
전투를 끝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