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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51화 (51/241)

51화. 진군가 (4)

피난민들과 캠프에 돌아오고 벌써 2주가 흘렀다.

눈 깜짝할 시간이었다.

새로운 캠프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았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움직인 덕분에 급한 불은 꺼진 상황이었다.

가장 우선시한 건 정찰이었다.

정찰은 호연의 드론과 헌터들의 도움으로 주변 일대의 정찰부터 시작해 점점 범위를 넓혔다.

식수, 식량, 각종 자재 같은 것들부터 생존자들의 수와 위치, 나아가 몬스터들의 분포까지.

정찰은 생존을 위한 시작이자 끝이었다.

초반의 정찰은 드론이 주를 이루었고, 헌터들은 물자 확보와 생존자 구출에 집중했다.

그렇게 1주일 정도가 흐르자 피난민의 수가 늘어 헌터가 3조까지 늘어났다.

이때를 기점으로 헌터들도 점차 몬스터 사냥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지만, 점차 실력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특히 1조의 경우 전체가 평균 13레벨 정도로 모두 전직을 앞두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캠프로 복귀하는 와중에 기서를 포함한 방패조 모두 전직에 성공했다.

‘전원이 하스타티(Hastati)로 전직할 줄이야.’

호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스타티는 분명 로마의 군단, 레기온(Legion)의 일부 병종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집단으로 사냥했던 게 영향을 미친 것 같기는 한데…….

“실제 하스타티는 방패를 안 썼단 말이지.”

호진은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들기다가 아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별다른 이유는 없을 거다.

분명 레기온에서 가장 말단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일 터.

‘나중에 다시 전직을 하게 되면 상위 직업으로 바뀌겠지.’

여신의 축복이라는 이 시스템은 뭔가 허술한 곳이 종종 보였다.

만약 소설이나 게임이었으면 욕을 한 바가지로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회의를 준비하던 주 대위가 지도 위에 깃발을 꽂다 말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 아닙니다. 마저 설치하시죠.”

“네? 아, 네.”

호진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주 대위는 다시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 따라 호진도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마니산을 중심으로 확대된 지도에는 강화도의 남쪽 일대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캠프를 중심으로 섬의 남쪽과 서쪽으로는 군데군데 노란 깃발들이 꽂혀있었다.

이건 위험도가 낮은 몬스터들을 뜻했다.

그 분포가 촘촘하지도 않기에 생존자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 또한 서쪽과 남쪽이다.

반면, 북쪽 일대는 붉은색 깃발들이 새카맣게 수 놓여 있었다.

이건 리자드맨 군단의 분포였다.

호진과 대립했던 리자드맨 세력은 북쪽 일대를 장악했다.

원래 거대했던 세력은 2주라는 시간 동안 세를 확장해 북쪽 전역을 집어삼켰다.

놈들이 확장하지 않은 방향은 남쪽뿐.

어찌 보면 호진이 그들의 확장을 막은 셈이었다.

하지만…….

‘확장을 마치고 세력이 안정화된다면, 놈들의 시선도 이쪽을 향하겠지.’

지금 캠프의 발전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지만, 리자드맨들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호진은 답답함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북쪽으로는 마음 놓고 구출조차 할 수 없다.

세력의 확장조차 몬스터들을 경계하며 해야 했다.

게이트 이전 세계에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젠 당연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이곳은 인간들만의 땅이 아니었기에…….

다른 나라의 사정을 들은 적은 없지만, 다른 나라라고 사정이 다를 것 같지도 않았다.

호진이 지도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주 대위가 마지막 남은 깃발을 지도에 꽂으며 입을 열었다.

“다했습니다. 현재 놈들의 배치는 이렇습니다.”

그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놈들의 방위가 가장 허술한 곳은…… 이곳인가요?”

호진이 붉은 깃발이 듬성듬성 꽂힌 지역을 가리키자 주 대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다만, 저희 군인들만으로는 조금…….”

“조금이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호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주 대위의 생각보다 놈들의 기동성과 신호 체계는 뛰어나다.

무엇보다 총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주 대위는 수많은 리자드맨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주 대위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럼, 저희가 강화대교 캠프로 갈 방법은 없겠군요. 너무 늦었습니다.”

강화대교 캠프.

그것은 강화대교 인근에 자리 잡은 국군 캠프를 의미했다.

마니산 캠프의 힘만으로 리자드맨들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호진은 군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전파는 물론 무전기조차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북쪽으로는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가 직접 강화대교 캠프까지 가야 했다.

그 임무에 지원했던 건 다름 아닌 군인들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군인들이 마니산 캠프에 녹아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니산 캠프에선 헌터들이 물자를 챙겨오고 생존자들을 구출했다.

헌터들이 점차 강해지며 캠프 내에서 입지를 굳히는 반면, 군인들의 입지는 붕 떠버렸다.

물론 호진은 캠프의 경계를 서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대우해줬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을 붙잡을 순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호진의 사람이 아니었고, 그걸 알기에 호진도 적극적으로 군인들의 성장을 돕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호진은 그들의 지원 요청 겸 부대 복귀를 허락했다.

애초에 허락하고 말고 할 위치도 아니기에, 수긍한 것뿐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요.”

주 대위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동안은 호진 씨랑 더 함께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어쩔 수 없다는 그의 말과는 달리 주 대위의 입꼬리가 자꾸 실룩거렸다.

호진의 격을 높이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는 주 대위.

언제부턴가 호진의 신자가 된 주 대위는 복귀를 거부하고 호진과 함께하고자 했다.

오히려 그가 군에 복귀하길 바라는 것은 호진이었다.

호진은 아직 대한민국 시민이었고,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그것을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호진의 캠프는 정부에 속하지 않았을뿐더러, 자체적인 색이 강했다.

어쩌면 정부는 캠프의 자치와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해산 명령을 내릴지도 몰랐다.

캠프는 호진이 세운 은신처이자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공동체였다.

적절한 대응책이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호진은 그 명령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호진은 정부와 군에 눈과 귀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엔 복귀를 거부하던 주 대위는 호진의 거듭된 부탁을 이기지 못했다.

그런 주 대위에게 떠날 수 없다는 소식만큼 좋은 핑계도 없을 터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네? 하지만 분명 방금 전까진…….”

그런 호진의 말에 주 대위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북쪽은 완전히 막혔습니다. 제가 가서 뚫는다고 해도 금방 막히겠죠. 저희가 향할 곳은 이쪽입니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의 한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그 손가락을 따라간 주 대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캠프 동쪽에 꽂힌 푸른색 깃발들이었다.

“이쪽은…… 늑대 녀석들의 영역 아닙니까?”

주 대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호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이곳만이 활로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주 대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놈들의 영역을 몰래 넘어가자는 건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백랑(白狼)이 이끄는 늑대들은 리자드맨 이상으로 척후가 발달해있다.

그들의 예민한 후각에 안 잡히고 영역을 지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호진이 말하는 것은 점령전을 뜻한다.

물론 동쪽 지역을 차지하면 리자드맨들로부터 고립을 피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긴 하지만…….

“너무 위험해.”

그때 눈을 감고 있던 용재가 입을 열었다.

종일 도끼를 휘두른 용재는 방에 가서 편하게 자라는 호진의 말에도, 막사에 들어와 꾸벅꾸벅 졸며 앞으로의 계획을 같이 듣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호진의 질문에 용재는 천천히 대답했다.

“너무 도박이야. 늑대들의 영역을 우리가 차지한다면 지켜야 할 곳도 늘어나. 지금의 인원으로도 부족할 텐데. 전쟁 이후 피해를 입은 헌터들로는 턱도 없이 부족해.”

호진은 용재를 보고 새삼 놀랐다.

설마하니 용재 입에서 저렇게 정확한 분석이 나올지는 몰랐다.

“……뭐 잘못 먹은 건 아니지?”

“사람을 아주 물로 보네.”

“아니, 난 널 용재로 봤지.”

“……고마워?”

어리둥절해하는 용재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이래야 용재지.’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좋은 지적을 해줬어. 네 말대로 수비에 공백이 생길 거야. 큰 피해 없이 늑대들을 잡는다 해도 분산된 전력으론 리자드맨들에게 각개격파 당하겠지.”

“들을수록 동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주 대위가 어렵사리 입을 열자 호진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 일은 이 친구가 다 할 거니까요.”

호진은 주머니에서 꺼낸 오카리나 같은 뿔피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처음엔 자신의 귀를, 다음에는 눈을 의심한 용재는 고민에 빠졌다.

눈앞에 있는 물건이 사실 피리 모양을 한 핵무기 버튼인 걸까?

아니면 호진이 드디어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

잠시 고민하던 용재는 문득 전쟁과 피리의 조합을 떠올렸다.

사면초가(四面楚歌).

혹시 저 피리가 늑대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혹시 늑대들 고향의 악기 뭐 그런 건가?”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아프면 그냥 들어가 쉬어.”

호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용재는 가슴이 턱 막혔다.

너무 억울했다.

‘이상한 소리를 먼저 한 게 누군데…….’

그런 용재와 달리 주 대위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용재가 눈을 좁히며 물었다.

“주 대위님은 저게 뭔지 아시나 봐요?”

“전혀요.”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용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잠시 멍하니 있던 용재가 재차 물었다.

“그런데 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요?”

“호진 님의 말씀이시니,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합니다.”

“……아, 예.”

용재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호진을 바라보자, 호진이 그 시선을 외면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해놓으면 사람을 이렇게 광신도로 만들어 놓은 걸까.

“호진이 형의 어디가 그렇게 믿음직해요?”

용재가 별생각 없이 물은 질문에 주 대위는 눈을 반짝이며 답하기 시작했다.

“호진 님과 가까운 용재 님이 그것을 모르시다니,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이유는 수백 가지가 있지만 간단하게 간추려 말씀드리자면 대표적으로 스무 개 정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릴 것은 그 용기입니다. 그날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비가 내리던 어두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낯부끄러운 이야기들.

용재가 기겁을 하며 호진을 바라보자, 호진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미 몇 번 경험했던지라 빠르게 피할 수 있었다.

격을 쌓으려고 하긴 했으나, 요즘 주 대위를 비롯한 몇몇의 충성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누가 내 위인전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이건 진짜 농담이겠지?’

팔뚝에 돋은 닭살을 쓰다듬으며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민망함에 살짝 달아오른 뺨을 식혀줬다.

해가 진 지 오래지만, 구름이 낀 탓에 달빛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새카맣게 어둠이 드리운 저녁 하늘.

아주 적당한 날이다.

호진은 웃음을 지으며 캠프 밖으로 향했다.

***

그렇게 사흘이 지난 아침.

호진은 캠프 내의 모든 병력을 소집했다.

갑작스러운 소집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모두가 공터로 모여들었다.

완전무장한 이들은 각기 모여 열을 맞췄다.

박 순경을 필두로 한 헌터 스물다섯.

주 대위와 군인 다섯.

강화된 스미스와 골렘 스무 기.

용재와 예은까지.

얼마 안 되는 수이지만 평소 이렇게 모일 일이 없기에 긴장감이 한껏 고조됐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마지막 인원까지 모두 모이자 꾹 닫았던 입을 열었다.

“모두 잘 모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한데 모은 것은 여러분들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호진은 잠시 하늘을 힐끗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 아시겠지만, 강화대교 캠프와 교류하기 위해선 북쪽이나 동쪽 중 한 곳을 지나쳐야 합니다.”

준비해둔 지도 중 동쪽을 가리키는 호진.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이곳으로 갑니다.”

갑작스러운 호진의 선언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주 대위가 손을 들며 물었다.

“동쪽은 늑대들의 땅입니다. 지금 전면전을 하시겠다는 의미이십니까?”

주 대위의 목소리는 한껏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별다른 계획이 없다면 이번만큼은 호진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거절할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주 대위의 질문에 호진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오늘 저희가 할 것은 지원입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공터에는 적막이 흐르고 사람들 얼굴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서로를 마주 보며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향해 호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과장입니다. 중요한 건, 여러분이 다칠 만한 상황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다시 하늘을 힐끗거린 호진이 무엇인가 발견하곤 눈에 이채를 띠었다.

모인 사람들은 호진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부엉이 한 마리가 하늘을 빙글 선회하더니 호 호오 하고 울었다.

“마침 시간이 된 모양입니다.”

호진이 옆에 서 있던 하야의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출전하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그 당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다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르륵

2주간 보강된 철문이 올라가고, 아직 물이 없는 옅은 해자 위로 도개교가 내려갔다.

그 위로 호진을 선두로 50의 병력이 뒤따라 나왔다.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기세에 근처 몬스터들이 부리나케 모습을 감췄다.

─척 척

그들의 걸음걸음엔 힘이 실려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마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가장 앞에서 당당하게 하야를 몰고 있는 호진을 보면 왠지 걱정이 들지 않았다.

첫 출전을 알리는 50인의 발소리는 마치 진군가처럼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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