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50화 (50/241)

50화. 진군가 (3)

“젠장, 무슨 풀이……. 여기가 아마존도 아니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풀을 헤치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자 앞서가던 애기 아빠가 살짝 웃으며 답했다.

“하하, 그러게. 그래도 흔적이 가까우니 목소리는 조금 낮출까?”

“앗, 죄송합니다.”

대학생이 곧바로 목소리를 낮추자 애기 아빠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음, 저건 가산점이지.’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노트를 꺼내 그에 대한 추가점수를 부여했다.

‘몬스터의 흔적을 발견했고, 팀원에게 무안을 주지 않고 경각심을 줬네. 좋은데?’

점수를 부여한 호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들의 성장세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호진이 하는 것은 일종의 평가였다.

캠프 내에 인원들의 역량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분배하고 대우해 주는 것.

어찌 보면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인력이 부족한 지금, 인원들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중요했으니까.

그 방법 중 하나가 이것이다.

‘기피 직종의 우대와 장려라고 할까.’

캠프에서는 누구도 맡기 싫어하던 헌터 직종을 우대했고, 그중에서도 성과에 따라 대우를 달리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모두가 꺼리던 헌터 직종에 지원자들이 나타났고, 기존 헌터들도 경쟁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뭐, 덕분에 헌터들과 생산직 생존자들의 비율이 적절하게 맞춰지고 있으니 다행이지.’

호진이 수풀을 해치는 1조의 헌터들을 보며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호진의 초감각에 뭔가가 걸려들었다.

‘음, 다가오는 속도나 위치로 봐선. 목표가 우리네.’

다행히 위험하지는 않은 듯했다.

물론, 호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잠시 후, 앞장서던 애기 아빠가 멈칫하고 걸음을 멈추고 팀원들에게 정지신호를 보냈다.

그러곤 귀를 바닥에 가져다 댔다.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오는 진동이 느껴진다.

‘이 거리랑 각도면…….’

애기 아빠는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났다.

“방패 똑바로 들어! 젠장, 온다! 5, 4, 3, 2…… 지금!”

커다란 방패를 든 애기 아빠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구령에 맞춰 오주호와 다른 한 명이 방패를 어깨와 무릎에 밀착시키고 충격에 대비했다.

다음 순간.

─쾅

수풀에서 튀어나온 녀석은 큰소리를 내며 방패와 부딪쳤다.

하지만 3명이 만들어낸 방패 벽을 뚫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크륵! 크르르르르르…….”

초록색의 피부.

단단하고 다부진 근육.

세로로 쭉 찢어진 눈과 커다란 매부리코까지.

호진은 이 녀석을 잘 알고 있었다.

‘쇼핑몰에서 봤던 녀석이랑 같은 놈이네.’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녀석을 보고 있자니 익숙한 창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감시자의 눈’의 효과.

푸른 창에는 놈의 종족과 명칭 특징 따위가 쓰여있다.

그때는 멋대로 고블린 챔피언이라 불렀었는데, 이제 보니 정식 명칭은 ‘고블린 대전사’이다.

강한 녀석이지만 그렇기에 의미가 있었다.

호진은 팔짱을 낀 채 헌터 1조를 가만히 응시했다.

“투창!”

녀석의 태클을 무사히 흘려낸 애기 아빠가 재차 소리쳤다.

그러자 방패조가 몸을 낮추고, 그 즉시 뒤에 있던 다른 두 헌터가 창을 얹은 효자손 모양의 장비를 휘둘렀다.

투창기(投槍器).

그중에서도 아틀라틀(Atlatl)이라 불리는 이 장비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투창의 위력을 극대화한다.

물론 창대를 손으로 잡고 던지는 것보단 익히기 어려웠지만, 숙달만 된다면 속도와 위력이 손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커다란 짐승을 사냥하기에 투창만 한 것도 없다.

좋은 판단이었다.

‘기서라고 했던가?’

호진의 열렬한 신자 중 하나인 애기 아빠, 기서는 헌터 1조의 조장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진 꽤나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날아간 창은 대전사의 허벅지와 어깨에 꽂혔다.

대전사가 방패에 부딪혀 비틀거리고 있었고, 거리가 가까웠음을 감안하면 조금 아쉬운 결과였다.

“크아아아아아아!”

녀석이 고통과 분노에 휩싸여 고함을 내지르자 헌터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다.

맹수의 울음소리에 담긴 주파수는 인간의 근육을 경직시킬 수 있다고 한다.

그와 같은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녀석이 지르는 고함에는 쇼핑몰의 호진도 몸이 굳었었다.

‘굳는 건 어쩔 수 없어. 중요한 건 대처지.’

호진이 기서를 유심히 살펴봤다.

기서는 이를 악문 후, 덜덜 떨리는 턱을 열어 소리쳤다.

“위, 위에 방패!”

그 소리를 들은 방패조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었다.

‘좋은 판단이네.’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사는 어깨에 꽂힌 창을 뽑아 곧장 뒤쪽의 투창조를 향해 던졌다.

사람보다 큰 키 때문에 뒤쪽에 헌터들이 창에 노출된 상황.

기서는 대전사의 눈이나 투창의 각도를 보고 노림수를 파악한 후 명령을 내린 것이다.

─텅!

충격음과 함께 주호가 뒤로 나뒹굴었다.

날아든 창이 방패를 두들긴 탓이었다.

“주호는 그대로 뒤로 빠져서 투창조와 투창 준비. 남은 방패조 발검.”

“발검!”

“투창 준비!”

떨림이 조금 가신 듯한 기서는 빠르게 정비를 명령했다.

그러든 말든 천천히 다가오는 대전사.

한 손에는 허벅지에서 뽑은 투창용 창이 들려있었다.

“크르르르르. 케륵!”

대전사는 기서를 향해 창을 내찔렀지만, 기서는 뒤로 주르륵 밀려나면서도 창을 방패로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기서는 대전사의 공격을 예상했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

한 손에 검을 든 방패조원이 방패를 들고 달려들었다.

대전사는 내찌른 창을 휘둘러 창대로 방패조원의 방패를 후려쳤다.

그 순간, 3개의 창이 빛살처럼 날아들어 대전사의 몸을 꿰뚫었다.

“크아아아아아!”

정확히 몸에 박힌 창들.

박힌 위치나 깊이나 치명적일 것이 분명했다.

창을 던진 주호는 속으로 기뻐하며 다음 투창용 창을 집어 들었다.

“돼, 됐다!”

투창조에 있던 대학생이 자신의 창이 박혀 들어간 것을 보고 기쁨에 차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소리는 고통에 신음하던 대전사의 눈을 끌었다.

“도망쳐!”

수상한 낌새를 느낀 기서가 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쾅!

대전사의 신형이 흐릿해짐과 동시에 투창조의 머리 위로 거대한 녹색 손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

주호는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주마등이라는 걸까.

과거의 기억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미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삶을 대략적으로 훑었는데도 끝은 오지 않았다.

살아온 인생이 짧기 때문일까.

하긴, 60년을 산 것도 아니고 고작 17년밖에 살지 않았다.

아니, 이게 맞나?

그래도 너무 긴 거 아닌가?

주호가 희미하게 눈을 뜨자 눈앞에는 익숙한 뒷모습이 초록 괴물을 가리고 서 있었다.

그 순간 초록 괴물의 신형이 옆으로 허물어졌다.

쓰러진 괴물은 양손도 머리도 없었다.

얼마나 깔끔하게 절단된 건지, 원래부터 없었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오주호 5점 감점.”

괴물을 쓰러트린 남자는 품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 적으면서 중얼거렸다.

“예? 왜요?”

“…….”

슬쩍 고개를 돌린 남자, 즉 호진은 주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다시 메모장을 끄적였다.

“본인의 잘못도 모른다라……. 감점 1점 추가.”

“아, 알아요! 눈 감아서 그런 거잖아요.”

“응, 맞아. 알고 있는데 모른척했네. 태도 점수 1점 추가 감점.”

“아아악!”

경외감이 든 것도 잠시, 주호는 호진의 말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호진이 형. 제발 1조에서 내쫓지 말아 주세요…….”

“이거 안 놔? 누가 보면 내가 악덕 건물주라도 되는 줄 알겠다.”

호진은 자신의 소매를 붙잡은 주호를 쳐다보며 인상을 썼다.

1조는 엘리트 헌터들의 집단.

이번 호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소속될 수 없었다.

“음, 반면 기서 씨는 훌륭하시네요. 저번에는 조금 아쉬웠는데, 지금은 제가 한 수 배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 아닙니다. 투창조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는걸요.”

“음, 확실히 그 점은 조금 아쉽긴 했습니다만, 잘못을 알고 계신 만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시겠죠. 제가 아는 기서 씨는 그렇습니다.”

“아, 아!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책하던 기서는 호진의 극찬에 예상치 못했던 듯 울먹거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그럼 계속 1조 리더를 맡아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지금의 기서는 호진이 불구덩이로 뛰어들라고 해도 뛰어들 것 같았다.

─띠링

「플레이어의 격이 미약하게 오릅니다.」

‘이렇게 광신도들이 되는 거구나.’

호진은 자신의 재능이 이토록 무서웠던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교주 노릇이 이젠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니, 사실 노력할 필요도 없이 그냥 평소처럼 행동해도 격은 알아서 잘 올랐다.

어쩌면 이런 세계이기에 무(武)가 숭상의 대상이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호진이 사색에 잠긴 그때 주호가 재차 다가왔다.

“형, 진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아, 거. 안 떨어트려.”

“어? 진짜요?”

호진의 귀찮은 듯한 대답에 주호가 눈을 크게 떴다.

“1조는 기서 씨 제외하고 전체 보류야. 이틀 안에 다들 전직하도록 하세요. 그럼 1조에 남으셔도 됩니다.”

“와! 형 약속한 거예요?”

“호진 님, 정말이죠?”

“아싸, 1조다!”

호진의 말에 다들 기뻐하며 주먹을 움켜줬다.

엘리트 헌터들의 집단인 1조는 전투에 참여할 일이 많고, 목숨이 위험할 일도 많이 겪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선 주호를 비롯해 이곳의 대부분은 더 강해질 기회를 원했다.

이 세상에서 힘은 곧 자유였고,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1조는 좋은 장비를 지급받고 잦은 전투 경험을 통해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다.

또 위험한 만큼 다른 업무들에서 자유롭고, 좋은 집을 배정받으며, 먹고 싶은 걸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었다.

즉, 피난민 캠프 내에서 명예와 권력 또한 일부 인정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1조는 다른 헌터들도 호시탐탐 노리는 인기 있는 조였다.

헌터 조는 총 4조까지 있다.

처음에 2조밖에 안 되던 인원은 지난 2주 사이에 4조까지 늘어버렸다.

주변을 정찰하며 생존자들을 계속해서 구해낸 까닭이기도 하고, 캠프의 소식을 들은 일부 플레이어들이 찾아온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캠프 내의 인원이 사흘 전에 150명을 넘겼다.

‘순조롭네.’

캠프의 규모는 순조롭게 증가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책 보수나 식량 확보도 아주 순조롭다.

물론 호연이 있기에 가능한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지만 말이다.

‘심은 지 세 달 만에 수확 가능한 쌀이라고? 심지어 바닷물을 줘도 괜찮아? 무슨 해초야?’

어이가 없지만 눈으로 봤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호연의 말로는 플레이어 각성 덕분에 가능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놀라운 일이었다.

아직 수확은 못 했지만 벌써 낱알들이 달리기 시작했으니까.

농사일을 하던 사람들도 한동안 넋을 잃고 허탈하게 웃고 다녔으나 이젠 조금 적응한 듯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테스트도 이쯤이면 됐고.’

호진이 몸을 돌리려던 그때.

“저 아무 몬스터 공격이나 한 번만 더 막으면 전직입니다! 제가 앞장설게요!”

1조가 확정되어 의욕이 넘친 조원 한 명이 정글도를 들고 동쪽 숲으로 들어갔다.

“그만.”

딱딱하게 경직된 호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순간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호진을 쳐다봤다.

“거기부턴 백랑(白狼)의 영역입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모르실 수 있습니다. 다만.”

잠시 말을 끊은 호진은 잠시 말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는 것.

캠프의 대표라 불리게 되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행동하기 전에 조장의 허락을 구하고 행동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한 리더니까요.”

호진이 고개를 돌려 기서를 바라보자 남자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어김없이 격(格)이 올랐다는 창이 떠오른다.

아마 지적받은 남자가 아닌 기서가 감동해서인 듯하지만, 어찌 됐든 필요한 말이었다.

멋대로 행동한 후, 허락을 구하는 건 잘못된 일이었으니까.

그때 숲 안쪽에서 늑대의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조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보나 마나 용재가 유령들에 대해 부풀려 말한 까닭이겠지.’

뿔 달린 은신 능력의 늑대들.

호진과 예은, 용재 일행이 마니산에 오는 길에 만났던 그 녀석들의 명칭은 ‘차카르타의 회색늑대.’ 속칭 ‘눈 위의 유령’들이었다.

녀석들의 지도자는 ‘백랑(白狼)’.

실제로 본 것은 딱 한 번뿐이다.

놈은 호진에게 한쪽 눈을 빼앗긴 청랑(靑狼)과 함께 수천의 늑대들을 이끌고 캠프로 찾아왔었다.

그리고 호진과 잠시간의 눈싸움 후, 몸을 돌려 돌아갔다.

눈싸움을 오래 한 덕분에 호진은 놈들의 종족이나 우두머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후로는 동쪽에서 이쪽으로는 넘어오지 않았는데, 이곳이 바로 그 경계선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남자가 그제야 진심이 담긴 사과를 건네 오자, 호진은 괜찮다고 웃어준 뒤 숲을 바라봤다.

왠지 놈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슬슬 때가 되긴 했지.’

호진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동쪽의 백랑(白狼)과 눈 위의 유령들.

다음 목표는 바로 녀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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