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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49화 (49/241)

49화. 진군가 (2)

‘와 이씨, 식겁했네.’

호진의 등으로 식은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설마하니 용재가 있는 스킬을 다 쏟아부어 가며 덤빌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눈도 감고 발도 묶인 상대에게 참마격 같은 스킬을 사용할 줄이야.

‘심지어 난 검도 아니고 알루미늄 텐트 지지대를 들고 있었는데. 미친놈.’

원래대로라면 공격을 여유롭게 흘릴 생각이었는데, 깜짝 놀라 급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놀란 나머지 힘 조절조차 실패했다.

용재가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구르는 걸 보며 호진은 재빨리 다른 변명거리를 고민했다.

잠시 후.

“눈 안 뜬다면서. 무기 안 든다면서…….”

용재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호진을 노려보자, 호진은 최대한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답했다.

“세 번째. 넌 너무 정직해. 네가 해야 할 건 대련이 아니라 목숨을 건 생사결이야. 머리를 쓰고 상대를 의심해. 그게 싸움의 기본이니까.”

사기를 칠 때는 기세가 중요하다.

뻔뻔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진지한 얼굴과 표정이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용재는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결의에 찬 얼굴로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호진의 눈앞에는 익숙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띠링

「플레이어의 격이 미약하게 오릅니다.」

‘이게…… 된다고?’

호진은 사기가 과하게 잘 먹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어찌 됐든 결과가 좋으니 된 거다.

고개를 주억거린 호진은 이내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길까 고민에 빠졌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둘을 향해 다가왔다.

“호진 씨, 용재 씨. 안 들어가고 뭐 하십니까?”

“아, 주 대위님. 죄송합니다.”

호진은 때마침 다가온 주 대위를 반갑게 맞으며 사과를 했다.

그러고 보니 이미 약속 시간이다.

“아닙니다. 저도 늦잠을 자서 서둘러 뛰어왔는데 조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바로 들어가시죠.”

호진이 몸을 돌려 주 대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막사로 향했다.

“용재 씨는?”

“쟤는 씻고 들어올 겁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춘 호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원래 지각은 마지막에 온 놈만 기억되거든요.”

“아하, 역시 똑똑하십니다.”

주 대위는 감탄을 하며 박수를 쳤다.

뭔가 조금 이상했지만, 주 대위는 이미 호진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만큼 그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호진을 따라갈 뿐이었다.

***

“왜 이렇게 늦었어?”

용재를 바라보는 예은의 목소리는 예기가 형형해 베일 듯했다.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겨울바람도 그보다 냉랭하지는 못하리라.

“그게…….”

“대답도 늦네. 다른 사람들 더 기다리게 하려고?”

“……아니, 아까 전에 형이랑…….”

“내가 뭐?”

호진은 재빠르게 용재의 말을 잘랐다.

잠시 멈칫한 용재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닙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 대위는 호진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역시 호진 씨입니다. 저희는 가볍게 넘어갔군요.”

“앞으로 잘 기억해 두셨다가 써먹으세요.”

지각한 것은 호진과 주 대위 그리고 용재였지만, 호진의 말대로 가장 늦게 들어온 용재에게 질책이 쏠린 것이다.

‘그래도 용재가 혼나는 시간이 길어지면 화살이 나를 향할지도 모르니 이쯤 끊어야지.’

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그럼 바로 본 회의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넵.””

막사에 모인 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용재와 예은에 이어, 박 순경과 주 대위 그리고 피난민들의 임시 대표까지 자리를 함께했다.

“형도 준비됐지?”

호연의 의사를 전달해 줄 스미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끼익 끼익

호진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스미스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스미스, 너는 괜찮아?”

그 질문에 하루 만에 수리된 스미스는 문제없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상관없지만…….’

아무리 AI라지만 너무 부려먹는다.

산산이 부서진 게 그저께 저녁인데 벌써부터 일하러 돌아다닌다니.

심지어 수리도 대충 했는지 상태가 영 별로다.

‘저러니까 영화에서 맨날 AI들이 인간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호진은 찜찜한 얼굴로 회의를 시작했다.

“우선 여러분을 이곳에 불러 모은 첫 번째 목적은 조직 개편과 업무 분장을 위해서입니다.”

잠시 말을 끊은 호진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에 앞서, 앞으로 이 캠프의 방향성과 목적을 공고히 하고자 합니다. 지금 피난민들은 어떤가요, 춘필 씨?”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음식은 조금씩 주질 않나, 잠은 짐승 냄새 나는 천막에서 재우질 않나.”

임시 대표로 온 춘필이라는 중년 남성이 씩씩거렸다.

“더 있습니까?”

“지금, 캠프에서 내가 뭐라고 좀 했다고 차별하는 거야 뭐야? 헌터니 뭐니 하는 작자들은 집에서 쉬고 말이야.”

그 말에 호진이 남성의 얼굴을 뜯어보니 이전에 캠프에서 박 순경과 마찰이 있었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런 건 이 자리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더 있냐고 물었습니다만?”

호진이 싸늘하게 묻자 춘필은 움찔하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봤던 거들 때문인지 공황에 빠진 사람이 꽤 있어. 전체적으로 우울한 느낌이 감돈다고 할까.”

“음, 그렇군요.”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캠프에 도착한 안도감에 기쁜 것도 잠시 피난민들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싹텄을 것이다.

총과 대포로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던 캠프마저 한순간에 사라졌다.

기껏해야 목책이나 칼로 무장한 이들이 지키는 캠프를 믿고 마음 놓기 쉬기는 어려울 터다.

“군인분들이나 헌터분들의 상태는 어떤가요?”

“헌터들 쪽은 전혀 문제없습니다.”

“저희 군은 아직 조금 혼란스러운 듯합니다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호진은 고개를 끄덕거린 후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할 것이 있습니다. 저희 캠프의 목적이나 방향성은 간단합니다. 그건 바로 생존입니다.”

춘필을 제외한 다른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만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와중, 호진이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뭉치고 모인 것은 자원봉사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죠.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에 춘필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즉,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노약자는 제외입니다.”

“자, 잠깐. 그럼 우리보고 괴물들과 싸우라는 말인가?”

춘필이 다급하게 외치자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 외에도 캠프에 도움이 될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사해달라는 건 잘 해주셨나요?”

“무, 물론이지. 아니, 입니다. 여기 받으시죠.”

춘필은 그제야 호진에게 존댓말을 하며 두 손으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를 건네는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는 이제야 회의장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회의라는 이름과 달리 한 사람만이 주제를 말하고 혼자 답을 내리고 있다.

이곳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운영하는 캠프가 아니었다.

이곳은 한 명의 위정자가 군림하는 캠프였고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명백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호진은 춘필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받아들며 말하자 춘필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 제가 대표님이 아들 같아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실수는요. 괜찮습니다.”

호진은 춘필이 준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종이를 빠르게 훑어본 호진은 눈을 잠시 감았다가 입을 열었다.

“농사일을 해보신 분들이 스무 분 정도 계시네요. 건축 일을 해본 분이 없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뭐 배우면 되니까요.”

종이에 적힌 것은 피난민들의 신상정보였다.

나이와 직업, 특기, 신체적인 정보들까지.

호진은 어림잡아 그들에게 업무를 나눠 분배하며 말했다.

“이의가 있으신 분들은 저를 찾으라고 말해주세요. 아니면 여기 박 순경님이나요. 이유만 충분하다면 다른 업무로 바꿔드리든, 시간을 드리든 하겠습니다.”

“네, 넵 알겠습니다.”

“근데, 춘필 씨. 당신 정보만 빠져 있던데요. 흠, 헌터 수가 부족한데 헌터는 어떠십니까?”

춘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대답했다.

“저, 저는 다 잘합니다. 제발 몬스터랑 싸우는 것만은…….”

“알겠습니다. 우선 농사일을 하시는 걸로 하시죠.”

“후우. 가, 감사합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헌터들이나 군인분들에게 조금 더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게 좋을 겁니다.”

“네, 넵!”

그 반응을 지켜보던 박 순경이나 주 대위는 내심 고소하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사실 지금까지 헌터나 군인들은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경계 근무를 서느라 푹 쉬지도 못하고, 의무적으로 정찰을 가거나 전투 훈련을 받아야 했으며 위험한 상황에도 자주 노출됐다.

그렇기에 호진은 그들에게 최대한 편한 휴식 공간과 음식을 제공했으나, 춘필을 포함한 몇몇 피난민들은 그런 사실에조차 불만을 품고 험담을 하고 다녔다.

그러니 당연히 헌터나 군인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건축 쪽은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있지?”

호진의 질문에 스미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뭔가를 종이에 적었다.

「네가 데려온 이방인 다섯 명을 보낼게. 건축에도 조예가 있는 듯하니 도움이 될 거야.」

“고마워. 형.”

호진은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그럼 우선 피난민분들은 농장 조, 목책 보수 조. 두 개 조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군인분들과 헌터들인데,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박 순경과 주 대위와 눈을 맞춘 호진이 입을 열었다.

“우선 군인분들은 제가 명령할 권한은 없지만 이곳에 계신 이상 몇 가지 규칙 지켜주시고, 기본적인 일만 해주시면 됩니다. 지금처럼 경계 근무에 도움을 줄 것, 전투 시 도움을 줄 것. 이상입니다.”

“물론입니다.”

주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진도 마주 끄덕인 후, 박 순경을 바라봤다.

지금 이 캠프의 헌터들은 대부분 방어에 특화됐다.

아마 방패를 활용하는 전법을 많이 사용한 탓인 듯했다.

나중에 헌터들이 더 다양해진다면 능력이 특화된 여러 조직으로 나눌 필요가 있지만, 지금은 시기상조다.

“헌터들은 경계 근무를 줄이겠습니다. 정찰 비율을 높여 몬스터와 전투 경험을 늘려주세요. 박 순경님이 헌터들을 두 개의 파티로 꾸려서 운영해 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예은과 용재를 본 호진은 웃으며 말했다.

“둘은 지금까지처럼 잘 부탁해.”

“물론이지.”

“알겠어요.”

나중에는 이 둘에게도 직책을 주겠지만, 아직은 사람이 부족하다.

그건 이 캠프가 더 커진 한참 후에 일이다.

“제가 우선 논하고자 하는 안건은 이게 전부입니다. 해당 안건에 대해 이의나 첨언할 것이 있다면 해주시고, 없다면 다른 안건들 말씀해주시죠.”

호진은 자신의 안건을 마무리하고 회의를 이어갔다.

그 후로도 식량 조달, 생존자 구조작업, 배수로와 병원 같은 인프라 구축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문제점들과 방안들이 오고 갔다.

때로는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던 회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됐다.

하지만 내일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얼굴은 희미한 빛이 어려 있었다.

이전과 달리 희망이라는 녀석이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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