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진군가 (1)
짧은 듯 길었던 하룻밤이 흘렀다.
게이트에서 나온 후로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호진은 우선 생존자들을 진정시켰다.
S급 게이트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잠시 어수선했지만, 전쟁터에서도 잠들 수 있는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호진의 무사한 모습을 보자, 피곤함에 지친 사람들은 금방 진정하고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잠든 주연의 곁을 지키던 주호는 호진을 보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오주호는 연신 혼자 도망쳐 죄송하다면 울었지만, S급 게이트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잘 전달해 주었다.
호진이 주호의 어깨를 토닥여주자 격(格)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또 떴다.
아무래도 신도가 한 명 더 는 듯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소란이 있었지만, 지친 호진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호진은 짧게 숙면을 취했다.
울타에게 정신오염 치료를 받은 덕인지, 짧은 휴식에도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직 아침 해가 떠오르지 않은 짙푸른 새벽하늘 아래.
호진과 생존자들은 다시금 마니산 캠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묵묵히 걷기 시작한 지 2시간이 흘렀다.
중간에 늑대와 같은 몬스터와 만나기도 했고, 거대한 지네 같은 몬스터와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호진이 녀석들을 어렵지 않게 해치웠기에 이동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어느 순간 이질적인 목책이 보였다.
“호진 씨, 혹시 저게?”
박 순경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호진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착했습니다.”
목재로 만들어진 커다란 목책.
바로 호연의 농장이었다.
“생각보다 엄청 커다랗고, 뭐랄까…….”
“조잡하죠.”
호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리자드맨들이 구축해놓은 목책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수천의 군대가 머무른 곳이니 당연했다.
다만, 급히 지은 탓인지 아니면 축조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 투박하고 조잡한 느낌이 있었다.
‘신전을 쌓아 올린 걸 보면 축조 기술이 부족한 것 같진 않은데.’
그런 점에서 목책의 완성도가 조금 아쉬웠다.
신전의 절반만큼만 공을 들였어도 웬만한 성들 못지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바빠질 겁니다. 목책 수리에 농장 관리에 할 일이 벌써부터 태산이네요.”
“그건 다행입니다.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겠군요.”
“아뇨, 박 순경님에게 농장 일처럼 쉬운 일을 시킬 수는 없죠.”
“그건…… 조금 무섭네요.”
호진과 박 순경은 마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박 순경은 용재를 제외하면 가장 호진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다.
무력이나 성장세는 조금 아쉽지만, 헌터들 사이에서 신뢰도 두텁고 지도력도 남다르다.
호진이 계획 중에 있는 무력단체 구성에 핵심이 되어줄 인물이다.
조금 더 목책과 가까워진 순간, 목책의 문이 활짝 열렸다.
“호진이 형! 박 순경님!”
“아, 용재 씨!”
용재가 기쁜 얼굴로 일행들을 맞이했다.
이미 무전을 통해 예은에게 캠프에서 있었던 일의 경위를 전달했었음에도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목책 안으로 들어온 피난민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 명도 빠짐없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자 용재는 목책의 문을 걸어 잠갔다.
주대위의 감사 인사를 받은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게이트가 발생하고 단 하루도 힘들지 않았던 날이 없었지만, 지난 24시간은 정말 끔찍했다.
이제는 쉬어야 할 시간이다.
***
“감시자의 눈이라.”
호진은 창틀에 앉은 부엉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부엉이가 고개를 돌려 호진과 눈을 마주쳤다.
잠시 그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익숙한 창이 눈에 어른거렸다.
─띠링
「울타의 봉사자 이카루스」
「종족: 아스니안」
「특징: 지능이 매우 높으며 가족애가 강하다.」
이게 전부는 아닐 듯하지만, 감시자의 눈의 기능 중 하나는 상태창과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상대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꽤나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상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여태까지는 상태창에서 알려주는 정보로 끼워 맞추며 정보를 모았는데, 훨씬 편해질 듯했다.
“이카루스.”
갸웃─
이름이 불린 녀석은 고개를 꺾으며 눈을 깜박였다.
“정찰 수고했어.”
호진이 접시에 담긴 돼지고기 한 점을 창틀에 놓아주자.
이카루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날개를 푸드덕거린 후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던 호진이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창밖으로 밝은 빛이 스며들어왔다.
농장에 도착한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어제 하루는 정말 미친 듯이 먹고 잠만 잤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정신오염, 즉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이들일수록 잠을 더 오래 자는 듯했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호진은 약간 걱정되는 마음으로 집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경계 중이던 헌터 하나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호진 님!”
“아, 네.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어제 푹 쉬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어서 근무 마치시고 조금 더 쉬세요.”
“감사합니다!”
군단장을 만난 소대장이 이럴까.
호진은 각 잡힌 헌터의 모습에 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렇다고 그만두라고 하기에는 이들의 맹목적인 충성이 호진의 격을 올려주고 있었다.
울타에 말에 따르면 격이 높은 존재를 상대하는 방법은, 같은 격을 지니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호진은 이를 악물고 이 낯간지러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덕분에 마음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든든하네요. 기서 씨.”
“어떻게 제 이름을……?”
“아파트에서부터 함께해온 동료이신걸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하죠. 그럼.”
호진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헌터를 지나치자 또 다시 알림창이 떠올랐다.
─띠링
「플레이어의 격이 미약하게 오릅니다.」
역시 잘 오른다.
‘젠장.’
호진은 수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연기 몇 번으로 격을 올릴 수 있다면 분명 남는 장사이니까.
살짝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식히던 호진이 텐트들이 모여 있는 야영지로 다가갔다.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과 근무 교대를 하는 헌터와 군인까지.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사람들이 꽤 일어나있었다.
“훅! 훅!”
그때 거친 숨소리에 호진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텐트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서 땀을 흘리며 도끼를 휘두르는 용재가 보였다.
호진은 일부러 기척을 내며 다가갔지만, 훈련에 집중하던 용재는 호진을 눈치채지 못했다.
“좋은 아침.”
“훅! 어? 호진이 형!”
“엄청 열심히 하네. 잘 되어가?”
“잘 모르겠어. 근데 상태창에서 숙련도는 계속 오르긴 하네.”
“그럼 된 거지 뭐. 다른 사람들은 다 모였나?”
“아, 벌써 약속시간이야?”
“10분 전이야. 막사 들어오기 전에 땀 좀 씻고 들어와.”
“뭘, 다 남자밖에 없는데.”
“남자도 사람이야 자식아. 땀 냄새 난다고.”
“형은 가끔 보면 너무 예민하다니까.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없지.”
“…….”
호진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잠시 주머니에서 손목시계를 꺼내 보니 시계는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캠프의 몇몇 사람들에게 모이자고 약속한 시간은 7시 30분.
‘이럴 시간은 없지만.’
이대로 그냥 넘어갔다가는 화병으로 정신오염이 증가할지도 모른다.
호진은 인벤토리를 열어 대검을 뽑아 들었다.
“……형 뭐해?”
“뭐하긴. 대련 준비하지.”
“……누구랑?”
“누구겠어?”
“……나?”
“응. 도끼 들어.”
“아, 형 잠깐만! 약속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혹시 화났어?”
“어.”
“왜, 왜?”
“글쎄. 예민해서 그런가 보지?”
“아, 그건…… 흡!”
변명을 주워섬기려던 용재는 급히 도끼를 들어 도낏자루로 정수리를 보호했다.
─캉!
철로 만들어진 자루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릿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발끝까지 흐르고 딛고 선 두 발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용재는 자루를 후려친 검을 노려봤다.
호진이 검을 한 손으로 든 채 속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한손검은 처음 써보는데. 핸디캡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기왕 핸디캡 줄 거면 나뭇가지 들고 싸우는 건 어때?”
“……넌 진짜 자존심도 없냐.”
“승부라면 6살 조카와 빨리 먹기 대결에서도 진심을 다하는 게 나, 바로 김용재다!”
“그냥 양심이 뒈진 거구나. 알았다.”
호진은 진짜 인벤토리에 대검을 수납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바닥에 떨어진 텐트 지지대를 집어 들었다.
“……진짜 그거로 싸우게?”
“네가 그러라며.”
질문에 호진이 피식 웃으며 답하자, 용재는 자신도 모르게 도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 오늘 형 한번 이겨보자!”
─쾅
대포처럼 쏘아진 용재가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선제필승.
‘아까 받은 만큼 돌려준다!’
힘이라면 형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심지어 형은 텐트 지지대를 들고 있지 않은가.
충분히 해볼 만했다.
용재의 도끼가 호진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 순간.
호진의 신형이 살짝 흔들리더니 미세하게 몸을 틀었다.
‘어?’
마술같이 도끼를 피해낸 호진은 지지대를 뻗어 용재의 명치를 찔렀다.
“커 헉!”
용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이 터져 나오고 침이 흘렀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 기침을 하다 고개를 드니 호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문제점이 크게 3개가 있어. 그중 첫 번째는 공격이 너무 단조롭다는 거야. 그런 공격은 눈 감고도 피해.”
말을 마친 호진은 눈을 감았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눈을 감고 용재를 상대하겠다는 것.
“후회할 텐데?”
“닥치고 들어오기나 해.”
아무리 용재라 하더라도 이쯤 되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다시 간다.”
─탓
이번에는 도끼에 변화를 줬다.
도끼자루를 넓게 쥔 용재는 위력보다 휘두르는 속도에 집중했다.
아까 입은 대미지로 야만전사(Barbarian) 특유의 ‘광분’ 스킬도 켜진 상태.
이거라면 한 방 먹일 수 있을 터.
그렇게 생각하며 도끼를 휘두르는 순간, 뭔가 묵직한 것이 용재의 명치에 닿았다.
─퍽
“크헉.”
재차 신음 소리를 토해낸 용재가 뒤로 나자빠졌다.
두 번이나 명치를 두들겨 맞자,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분명 도끼를 휘두를 때까지만 해도 호진은 지지대를 바닥에 늘어트리고 있었다.
한데 어떻게 도끼를 먼저 휘두른 자신보다 빠르게 타격할 수 있단 말인가?
호진은 망연히 서 있던 용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너무 느리다는 거야. 힘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 상대를 맞출 수가 없는걸. 속도가 부족하면 기술이라도 길러.”
잠시 숨을 고른 호진은 말을 이었다.
“방금 내 속도는 너와 같았어. 다만 동작을 간소화했을 뿐이지. 후발선제와 같아. 허점을 보여줘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면, 늦게 칼을 뽑아도 더 빠를 수 있지.”
말을 마친 호진은 허공에서 밧줄을 꺼내 발을 묶었다.
“자 이제 난 눈도 안 보이고 다리도 묶여있어. 어디 마음대로 해봐.”
용재는 고통도 잊은 채 몸을 벌떡 일으켜 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킬 야만 전사의 분노.’
패시브 스킬에 버프까지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했다.
용재는 멀뚱히 선 호진을 향해 도끼를 힘껏 휘둘렀다.
“참마격!”
자신이 지닌 필살기까지 모조리 사용한 용재.
그 순간.
눈을 감았던 호진이 눈을 뜨더니 손에 든 지지대를 휘둘렀다.
아니, 지지대가 아니다.
‘저건?’
어느새 호진의 손에 대검이 들려있었다.
─쾅!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용재는 부유감을 느꼈다.
붕 떠오른 몸은 어느 순간 바닥을 미친 듯이 굴렀다.
입과 눈 그리고 코까지 흙이 들어갔다.
“쿨럭! 캑, 캐핵.”
온몸을 덮치는 통증에 숨을 토하며 한참을 흙을 뱉고 털어낸 용재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자 자신을 보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호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 안 뜬다면서. 무기 안 든다면서…….”
억울해하는 용재를 향해 호진이 정색하며 답했다.
“세 번째. 넌 너무 정직해. 네가 해야 할 건 대련이 아니라 목숨을 건 생사결이야. 머리를 쓰고 상대를 의심해. 그게 싸움의 기본이니까.”
“…….”
분하지만 사실이다.
용재는 대련 처음부터 끝까지 호진에게 끌려다녔을 뿐이다.
─으득
어금니를 꽉 깨문 용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자신은 경험이 부족하다.
어쩌면 호진과 가장 차이가 나는 건 근력도 민첩도 아닌 경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형.”
용재는 고개를 숙여 호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인사에 호진은 용재의 머리를 툭 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