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감시자의 숲 (4)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을 태우는 듯 저릿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벼락에 맞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까마득해지는 고통 속에서 어둠을 보았다.
분명 저 멀리 희미하게 보였던 어둠은 눈 깜짝할 사이에 호진을 집어삼켰다.
칠흑보다 어두운 어둠.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둠이 주는 공포.
차가울 것만 같았던 인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포근한 감각이 호진을 감싼다.
마치 바다 깊은 곳까지 들어온 듯한 고요함.
주변에 아무것도 없기에 오히려 자신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낀 적은 없었다.
강렬한 희열과 충만감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 순간.
‘일어나라, 아이야.’
포근하게 자신을 이끄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물이 머리에 부어지는 것과 같은 청량감에 호진은 정신을 차렸다.
“여긴?”
호진은 잠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계약은 끝났다. 나의 아이야. 수고했다.”
여인은 언제 앉은 건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
호진은 아직도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는 아직도 저릿저릿한 감각이 남아있다.
‘끝난 거구나.’
순식간에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는다면 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사용해온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라면 이렇게 검을 뽑으면 거합이 나갈 텐데.’
호진은 조금은 착잡한 마음으로 검의 그립을 움켜쥐고 검을 뽑아 들었다.
─서걱
“……?”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은 공기를 찢고 하늘에 뜬 달빛은 일렁이는 검기에 부서져 산산이 흩어졌다.
“……무슨!”
여인은 호진을 보고 경악하며 몸을 뻘떡 일으켰다.
정작 호진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떨떨했다.
하지만 금방 진정하고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나지막하게 상태창을 불러냈다.
─띠링
「상태창」
「이호진」
「나이: 24」
「레벨:22」
「근력:26 민첩:35 지구력:20」
「스킬: 사냥꾼의 눈 LV.2 거합 LV.5 투구 가르기 LV.4 체력 회복 LV.4 확신 LV.1 검술의 묘리 LV.1 검의 정수 LV.1 정신 내성 LV.1 파마의 검식 초감각 LV.1 출혈내성 LV.1 초급 기(氣) 검술 LV.1」
「직업: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
「가호: 감시하는 자 울타의 가호, 여신 릴리의 가호」
「칭호: 없음」
「잔여 포인트: 6」
‘그대로……라고?’
호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여인은 입술을 굳게 닫은 채 호진이 열어놓은 상태창을 응시할 뿐이었다.
잠시 후.
“계약은…… 분명 이루어졌다. 아이야. 너에게서 나의 기운이 느껴지니. 하나, 이건…….”
말꼬리를 흐린 여인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권능과 힘은 남겨두고, 의무만을 제한 건가?”
“무슨 상황이죠?”
호진이 설명을 요구하자 여인은 침음을 흘리다 대답했다.
“여신의 권능은 그대로 남았단다. 반면 봉사자로서의 의무는 사라졌지. 무언가의 오류인지, 그것도 아니면…… 여신이 뭔가를 꾸미는 건지 모르겠구나.”
호진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여인은 설명을 보충했다.
“즉, 너는 나의 봉사자이지만 여신의 권능까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게다. 상태창이라면 나의 권능으로도 줄 수 있지만, 전직은 인간의 주신인 여신에게만 허락된 권능이니.”
“듣기로는 나쁠 게 없군요.”
“나조차 이게 어떻다고 말하기 어렵구나. 고대신과 선(善)신을 동시에 섬기는 건 유례없는 일이란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훗날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때의 일.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호진의 그런 태도를 본 여신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어찌 됐든 나의 봉사자가 된 걸 축하한다. 아이야. 이건 선물이란다.”
─띠링
「권능을 얻었습니다. 감시자의 눈」
「사냥꾼의 눈 LV.2가 감시자의 눈에 통합됩니다.」
「감시자의 눈의 성능이 증가합니다.」
“이건?”
호진이 설명을 요구하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능력을 가지고 있더구나, 아이야. 나의 권능을 너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부여했단다.”
“어떤 능력이죠?”
“그, 크흠, 나중에 읽어보도록 하려무나. 상태창이 잘 설명해줄 테니.”
막상 설명하자니 부끄러웠던 걸까.
여인은 로브를 조금 더 눌러쓰며 대답했다.
‘신의 권능이다.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지진 않았을 터.’
호진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쩍 소리와 함께 하늘에 균열이 일었다.
나비들이 만들어낸 반투명한 결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고, 그 사이로 불길한 빛이 스며들었다.
“시간이 되었구나. 눈속임도 여기까지인 듯하다, 아이야.”
“그런 거 같군요.”
그때 여인은 작게 기침을 하더니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인과를 너무 많이 거스른 모양이야. 한동안은 너를 돕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괜찮습니다. 우선 제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며 강해지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된다. 그리고…….”
─휘익
여인이 휘파람을 불자 어디선가 수리부엉이 하나가 날아와 호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회색빛이 감도는 털들과 검은색의 깃.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이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내가 정양하는 동안 이 아이가 내 눈과 입이 되어 너와 나의 사이를 연결해 줄 게다.”
“알겠습니다.”
호진은 어깨에 내려앉은 녀석의 머리를 쓱쓱 밀어 넘겼다.
그러자 녀석은 스륵 눈을 감으며 기분이 좋은 소리를 냈다.
“녀석도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소중히 여겨주어라, 아이야.”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동물은 좋아하는 편인지라.”
“동물……은 아니지만. 뭐 됐나. 그 아이도 기분 좋아 보이니.”
여인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호진은 급히 여인을 불렀다.
“잠시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어째서. 저를 도우시는 겁니까?”
호진의 물음에 여인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이윽고 슬며시 고개를 든 그녀는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여인은 나지막하게 인사를 하며 마저 몸을 돌렸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거라. 그리고 만약 밖이 위험해진다면 언제든 이리로 와도 된단다. 너의 일행들 모두 초대해 줄 터이니.”
“감사합니다.”
호진은 마지막까지 여인이 베푼 배려에 허리 숙여 감사를 전했다.
“그래, 또 보자구나.”
여인은 그 말과 함께 나무 위에서 모습을 감췄다.
언뜻 날아오르는 부엉이의 형체를 본 듯도 했지만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순간 고목은 부르르 몸을 떨며 피어났던 나뭇잎을 떨어트리고 원래의 죽은 나무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여인과의 만남은 신기루였던 것처럼 한순간에 모든 게 사라져갔다.
여인 나름대로의 축객령일 터.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다.
***
게이트를 나오자 박 순경과 헌터 몇몇이 눈에 들어왔다.
“아, 박 순경님.”
호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헌터들과 얘기를 나누던 박 순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제히 고개를 돌린 박 순경과 헌터들.
호진을 발견한 그들의 눈과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 호, 호진 씨? 무사하신 겁니까?”
“호진 님? 어, 진짜 호진 님이다!”
“사람들에게 알려!”
그 호들갑에 호진은 잠시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잊고 있던 사실이 기억났다.
‘나 방금 S급 게이트에서 나온 거구나.’
먼저 나온 오주호가 사람들에게 게이트의 존재에 대해 알렸을 터다.
“예, 무사합니다. 더불어 이 게이트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괜한 출입만 삼가주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기서 씨가 뛰어가서 주 대위님에게 전파 좀 해줘.”
“넵, 바로 가겠습니다.”
헌터 중 낯이 익은 남성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눈에 익은 분이네요.”
“아파트 생존자니까요. 그 어린애가 있던 애기 아빠입니다.”
기억났다.
애와 아내가 있던, 처음에는 싸울 줄 모른다고 벌벌 떨었지만 나중엔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던 남자였다.
“기억났습니다. 무사하셨군요.”
“나중에 보면 아는 척이라도 해주세요. 호진 씨 팬입니다.”
“……왜 그런 게.”
호진이 찝찝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그런 반응을 기대했었다는 듯, 박 순경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 호진 씨에게 구해진 사람들이니 동경할 수밖에요.”
“…….”
호진은 납득은 갔기에 고개를 주억였지만, 반응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주변 헌터들의 시선도 어딘지 미묘했다.
그때 한 명이 호진을 향해 펜과 종이를 들이밀었다.
“저,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혹시 사인…….”
“…….”
“어허, 이 사람이. 방금 게이트에서 나와서 피곤하신 거 안 보이나? 어서 가서 쉬시죠. 호진님.”
“앗,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괜……찮습니다.”
호진은 고개 숙여 사과한 헌터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헌터 그룹에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줄은 몰랐다.
‘설마, 다른 생존자 그룹도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이돌이나 교주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추앙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호진은 재차 사과하는 헌터의 손에 민망하게 들려있는 종이와 펜을 받아들었다.
“아……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호진 님.”
“이 정도야,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늘 다른 생존자들을 위해 고생이 많으십니다.”
“가, 감사합니다!”
실제로 헌터들은 각성을 했다는 것과 전투 경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피난민들보다 고생하고 있었다.
불침번이나 정찰을 비롯해, 피난 중에도 위험한 일들을 도맡아야 했다.
민망하긴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사인 하나둘 해주는 거야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렇게 호진이 종이에 사인을 해주는 순간.
─띠링
「플레이어의 격이 미약하게 오릅니다.」
알림창이 눈을 가렸다.
잠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끔벅이던 호진.
그러나 이내 게이트에서 들었던 울타의 말을 떠올렸다.
‘격을 쌓아올려라. 신격(神格)을 사냥하고 필멸자들에게 숭배받아라.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일 게다.’
‘지금…… 설마, 내가 이 사람한테 숭배를 받은 거라고?’
헌터의 감동 어린 눈빛을 본 호진은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이비 교주가 된 호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