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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46화 (46/241)

46화. 감시자의 숲 (3)

“심연을 유영하는 자?”

호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어둠을 뿌리는 자, 집어삼키는 자, 노래하는 자 같은 다양한 이름이 있단다.”

“당신…… 그리고 이 세계는 뭡니까?”

호진은 드물게 흥분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감정이 격앙된 탓이다.

“…….”

그런 호진을 바라보는 여인은 어색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난처한 듯, 혹은 미안한 듯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바라보던 호진은 지그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곤 천천히 숨을 내쉬며 끓어오른 감정을 식혔다.

“죄송합니다. 당신 탓은 아니겠죠.”

“……음, 괜찮다.”

여인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여인의 반응에 호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궁금할 뿐입니다. 부조리한 죽음들에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그것들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지를요.”

“……그런가.”

잠시 침묵하던 여인은 흐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말해줘야겠지.”

“그럼……!”

“하지만 말에는 힘이 있다. 이 일의 전말을 받아들이기에는 네 격이 많이 모자라구나.”

─딱!

여인은 허공에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일렁이며 나타난 푸른 나비 떼가 하늘로 하늘하늘 날아올랐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셈이지만, 우선 장치는 해두었다.”

“장치…… 말입니까?”

“이곳을 잠시 신역(神域)으로 꾸몄단다. 눈속임에 불과하지만. 그나마도 네가 격을 지녔으니 가능한 일이지.”

“……?”

여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호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자 여인이 설명을 보충했다.

“천기누설이라는 말을 아느냐? 지금부터 하는 대화는 원래 필멸자에 불과한 네가 들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호진은 잠시 멈칫했다.

아까부터 여인이 말한 격이라는 것은 그럼…….

‘신격(神格)?’

자신에게 그런 것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그럼 눈앞의 여인이 신이라는 것인가?

호진은 한층 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뭐, 혼란스럽겠지만 잠시 이야기에 집중하거라. 내게 듣고 싶은 게 있지 않느냐.”

여인의 말에 호진은 표정을 다잡았다.

그녀의 말이 맞다.

지금 호진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의 일이 일어난 경위, 그리고 이 국면을 헤쳐 나갈 지식이다.

“뭐, 듣다 보면 어느 정도 유추도 가능할 터.”

여인은 노래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맑고 시원한 시냇물같이 청아한 목소리는 숲 안에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머나먼 고대의 시대.

어둠을 숭배하며 세상을 다스리던 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가꾸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낱 필멸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기에,

필멸자들의 마음 한구석에 불만이 싹텄다.

그 부름에 답한 것일까.

어느 날 새로운 신들이 이 세계를 찾았다.

어둠을 숭배하던 최초의 신들과 달리 빛을 숭배하는 새로운 신들.

그들은 필멸자들을 아끼고 보살폈다.

새로운 신들은 필멸자들에게 선한 신이라 불리며 순식간에 세를 불렸다.

그 신들을 모시는 진영 사이에는 거대한 전쟁이 벌어졌다.

오랜 전쟁은 새로운 신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필멸자들은 이전의 신들을 고대신, 악신이라 칭했으며 이들의 잔해를 봉인했다.

세상에는 선한 신들만이 남아 필멸자들을 굽어살폈다.

신성 시대의 시작이었다.

오랜 기간 평화가 이어졌다.

하나, 변화는 갑자기 찾아왔다.

아무리 강한 불이라 할지도 언젠가는 사그라드는 법.

어둠을 섬기던 고대신들이 준동했다.

필멸자들 중 가장 큰 세력을 일군 인간.

가장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 것 또한 인간이었다.

애초에 어둠에서 태어난 존재였던 만큼, 다시 찾아온 어둠에 쉽게 녹아들었다.

인간들의 주신(主神)인 꽃피우는 여신은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간들의 타락과 광증을 지켜보다 못한 여신은 손대서는 안 될 힘에 손을 댔다.

하지만 그 힘은 여신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으니.

여신은 망가졌고 세상의 균형은 비틀렸다.

“……라는 이야기란다.”

“…….”

여인이 말을 마쳤지만 호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네…….’

하지만 여인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이건 세상의 어딘가에서 실재했던 일들.

“그 비틀린 균형의 결과가 이겁니까?”

호진이 입을 열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에 그녀의 이목구비가 언뜻 보였다.

희고 뚜렷하며 매끈한 코가 눈길을 끌었다.

눈에 띄는 미인의 상이었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조화로운 외형은 신비로웠지만 동시에 어색하게 느껴졌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인간이다.

호진은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당신은 정말 신(神)이군요.”

“그렇단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죠?”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질문.

하지만 여인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듯했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고대신이라 불렸던 쪽이지.”

“…….”

호진은 잠시 멈칫했다.

여인의 이야기 속 고대신은 인간을 핍박하는 존재들.

여인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호진은 그녀가 선한 신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음?”

호진의 대답에 여인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머리를 기울였다.

“당신이 고대신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 말에 따르면, 작금의 사태를 초래한 건 오히려 이야기 속의 ‘선한 신’일 테니까.”

그 동기가 어쨌건, ‘꽃피우는 여신’이라는 신 때문에 지구에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

호진의 입장에서는 선한 신이라고 고대신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

그런 면에서 눈앞의 여인은 고대신이든 아니든 믿을 만한 존재였다.

그런 호진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던 걸까.

“……풋, 그런가? 그렇구나.”

여인은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저쪽에서는 악신이라 불렸기에 말하기가 조금 두려웠단다.”

“당신도 인간들에게 무언가 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난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란다.”

“그런데 어째서?”

“글쎄. 내가 고대신이기 때문이겠지. 인간들은 분류하는 것을 썩 좋아하는 듯하니.”

“…….”

여인의 대답에 호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편을 가르고 자신과 다른 자들을 배척하는 것.

그것은 다른 세계 속 인간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그 비틀린 균형이라는 것을 바로잡을 수는 없습니까?”

“가능하지. 하지만 불가능하단다.”

“그게, 무슨……?”

“지금의 네 힘으로는 터무니없다는 말이다.”

잠시 무언가 고민하듯 말을 멈춘 여인은 말을 이었다.

“격을 쌓아 올려라. 신격(神格)을 사냥하고 필멸자들에게 숭배를 받아라.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일 게다.”

“신격(神格)이라는 것이 유영하는 자와 같은 녀석들을 말하시는 겁니까? 제겐 불가능합니다.”

신조차 되지 못한, 신의 사도. 유영하는 자 샴.

그것이 보여준 압도적인 힘을 떠올린 호진의 무릎이 떨려왔다.

그를 본 여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쉽지는 않을 게다. 하나, 아이야. 넌 이미 그런 자를 사냥했단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떤 존재를 쓰러트리고 알 수 없는 힘이 몸에 깃든 적이 없느냐?”

여인의 말에 호진은 잠시 멈칫했다.

‘미완성된 이어붙인 왕(Verkettet König).’

하수구 속 게이트, 하픈덤에서 만난 괴이한 생명체.

녀석을 쓰러트리고 보상과 함께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었다는 상태창을 보았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었습니다.”

그건 이름처럼 완성되지 못한 것이었다.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다 하여도 상관없다. 아이야. 너는 이미 자신만의 격을 쌓아가고 있단다. 나중에는 스스로의 정체성과 진명 또한 깨닫게 될 터.”

여인은 잠시 말을 끊고 강조해 말을 이었다.

“너는 더 강해질 것이다. 아이야.”

그 말을 들은 호진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오래전 그에게 깃든 호승심과 승리에 대한 열망.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릎에 떨림이 멈추고 앞이 또렷이 보였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건가?’

호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런 호진을 바라보던 여인은 흥미롭다는 듯 콧소리를 내고는 입을 열었다.

“네게 제안을 하마. 아이야, 나의 봉사자가 되지 않겠느냐?”

“봉사자? 그건 사도 같은 것입니까?”

“눈치가 좋구나. 비슷하단다. 사도에는 못 미치지만. 아, 참고로 너는 이미 봉사자란다.”

“제가 말입니까?”

호진이 의아한 듯 묻자 여인은 처음으로 짜증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단다. 앞서 말한 여신이 이곳에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의 주박을 걸었어. 다른 세계의 존재의 피를 손에 묻히는 것을 조건으로 간략화된 계약을 맺었더구나.”

호진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플레이어로서의 각성.

상태창.

그리고…… 퀘스트.

‘그래서였나.’

‘미완성된 이어붙인 왕(Verkettet König)’과 이곳의 부엉이들에게 걸렸던 퀘스트는 명백히 적의를 품고 있었다.

‘미완성된 이어붙인 왕(Verkettet König)’도, 이곳의 주인인 그녀도 고대신인 반면, 플레이어의 힘이나 퀘스트는 모두 여신이 준 힘이다.

“봉사자는 자신의 주신(主神)을 해할 수 없단다. 하나, 네가 목표로 하는 비틀린 균형을 바로 잡는 방법은 결국 이 사태를 만들어낸 여신을 베는 것뿐이다.”

“당신의 봉사자가 되면 여신을 벨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제 능력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초기화된단다. 또한 나는 여신만큼 강한 권능은 주지 못하겠지. 격에 차이가 있으니.”

“…….”

호진은 여인의 솔직한 답변에 입을 뗄 수 없었다.

상태창부터 직업 그리고 다양한 스킬들까지.

죽을 고생을 하며 쌓아 올린 힘들이다.

그것들을 초기화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하겠습니다.”

“……그래, 역시 무리…… 음? 지금, 뭐라 했느냐?”

호진의 답변에 여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한번 걸어온 길입니다. 다시 한번 걸으면 그만입니다. 균형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있다면 몇 번이라도 다시 걸어 보이겠습니다.”

사도에게조차 미치지 못하는 호진으로서는 여신이라는 목표가 뜬구름처럼 여겨졌다.

얼마나 강한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대.

그런 적을 목표로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피가 들끓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팔다리를 휘적거리던 때와는 다르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눈앞에 있었다.

강해져야 할 목적이 뚜렷해졌다.

이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조금만 더 격이 높았다면, 사도로 삼을 수 있었을 텐데.”

호진의 답변을 들은 여인은 아쉽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가지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호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호진의 뺨을 스쳤다.

“나는 감시하는 자 울타. 비틀린 인과의 경계를 업으로 삼고 있다. 내게 봉사하길 원하는 자여.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라.”

달빛에 그녀의 은발이 바람을 타고 휘날린다.

그 목소리와 외형에 신비로움이 깃든다.

호진은 홀린 듯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다.

“원하는 자 누구든 나의 권능에 힘입어 나와 의무를 함께할 것이다. 머나먼 고대부터 이어진 경계가 시작되니. 이는 그대의 삶이 다하도록 계속될 것이다. 그대는 나와 함께 감시자의 길을 걸을 것인가?”

“예.”

“여기 계약이 이루어졌으니. 어둠이시여, 굽어살피소서.”

여인의 말이 끝맺어지는 순간.

강렬한 통증이 호진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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