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감시자의 숲 (1)
마니산으로 향한 지 4시간.
호진은 축축해진 흙바닥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점점 잦아들던 비는 완전히 그쳤다.
하지만 한동안 거세게 내린 비는 사람들의 체력을 빠르게 앗아갔다.
“헉, 허억.”
나이가 있는 60대 남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비단 그 남성뿐만이 아니라 그 주위의 사람들 모두 피곤함에 묻어났다.
긴장한 채 행군을 한다는 것.
그리고 비를 맞으며 진창이 된 길을 걷는다는 것은 매우 지치는 일이었다.
노약자들은 하야를 타고 이동했지만, 그럼에도 몇몇은 한계에 달한 듯 보였다.
“정지.”
일행들을 살피던 호진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이동하겠습니다.”
더 이상은 무리다.
만약에 도망쳐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다들 조금도 달리지 못할 터.
다소 위험을 감소하더라고 쉬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마침 폐교된 지 오래되어 보이는 학교 건물을 발견한 호진은 휴식하기로 했다.
다들 한계였는지 모두 불평 없이 건물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호진은 가장 먼저 불침번을 비롯한 주변 경계를 위해 헌터들과 군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가 간단하게 역할을 분배하자 다들 불만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그럴 게 호진이 가장 오래 불침번을 서기를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바로 맡은 역할대로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궁금한 점 있습니까?”
호진의 질문에 군인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목표지점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앞으로 2시간가량 더 이동하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2시간이라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야간에 4시간 이동했기 때문일까.
그들은 해가 뜨고 2시간만 걸으면 된다는 말에 기쁜 듯 보였다.
해가 뜨기까지는 대략 5시간가량.
호진은 그들이 최대한 쉬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불침번의 절반 이상을 본인이 서길 자처한 것이다.
‘기척 감지나 사냥꾼의 눈도 있으니 혼자서도 충분하기도 하고.’
애초에 자신이 아니라면 4명 이상은 깨어있어야 불침번 근무가 가능하다.
정찰조를 제외한 이들은 피난민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몸을 눕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호진은 천천히 옥상을 향했다.
─덜컹
녹슨 철문을 힘주어 밀자 거친 쇳소리와 함께 옥상 문이 열렸다.
“음, 쌀쌀하네.”
가을의 밤은 생각보다 쌀쌀했다.
혹시 몰라 불을 피우기는 꺼려졌기에 호진은 인벤토리에서 담요를 하나 꺼내 몸에 둘렀다.
그리고 에너지 바 하나를 꺼내 우물우물 씹어 먹으며 다소 멍하니 주변을 경계했다.
아무래도 지친 것이다.
리자드맨들과의 전투는 몸을 지치게 했고, 캠프에서의 경험은 정신을 깎아먹었다.
호진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정말 피로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괜히 먼저 선다고 했나? 한숨 자고 나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하품을 하며 주변을 경계하기도 잠시,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뭐야. 주호냐. 안 자고 뭐 해?”
“형, 뭐 보여요?”
“아니, 아무것도. 그니까 너도 빨리 가서 쉬어. 피곤할 텐데.”
“아뇨, 전 괜찮아요. 형이 쉬셔야죠.”
주호가 따듯한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웬 커피야?”
“캠프에서 출발할 때 보온병에 담아왔어요. 비가 많이 와서.”
호진은 픽 웃음을 터트리곤 커피를 받아들고 반쯤 남은 에너지 바를 주호에게 내밀었다.
“잘 먹을게. 이건 보답.”
“앗, 저는 괜찮은데요.”
“먹어.”
“……감사합니다.”
주호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더니 에너지 바를 받아들고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제 하루 종일 싸우셨다면서요. 삼촌이 말해줬어요.”
왠지 예전보다 더 반짝거리며 부담스러워진 오주호의 눈빛.
그 눈빛은 거의 역사책 속 위인을 바라보는 듯했다.
‘박 순경님은 얘한테 뭐라고 했길래…….’
호진은 머쓱해져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그렇긴 했지.”
“……저는 처음에 형이 왜 리더인 줄 몰랐어요.”
“응?”
뜬금없는 고백에 호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주호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 아파트로 구해주러 오셨을 때까지만 해도. 예은이 누나나 용재 형이 더 멋있어 보였으니까요.”
‘아, 기억났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트에서 오주호 남매를 구할 때.
가장 먼저 그들을 위기에서 구한 건 용재였다.
그리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옥상에 다른 피난민들을 구하기 전까지 호진은 한 게 없었다.
그때 오주호가 싸늘한 눈빛을 보내왔던 것이 호진의 머리를 스쳤다.
물론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안 쓰다 보니 잊고 살았었지만 말이다.
“근데. 형이 옥상에서 감염자들을 몇 시간이고 베어내실 때부터 쭉 존경하게 되었어요.”
“어…… 어, 그래. 고마워.”
호진은 주호의 뜬금없는 고백에 당황했다.
마침 장소도 그때와 같은 옥상.
그래서일까 주호는 그때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표정으로 호진을 향해 물었다.
“저도 이제 8레벨이거든요. 저도, 저도 형처럼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지.”
호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자신은 지금껏 보아온 어떤 플레이어보다 강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자신보다 약할지라도 자신을 따라잡는 사람들도 나올 것이다.
“단, 쉽지는 않을 거야. 나도 계속 강해질 거니까.”
그냥 애가 한 말이니 고개를 끄덕여주고 끝낼 수도 있었지만, 호진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호의 진심과 열의가 느껴졌기 때문에 호진 또한 진심을 다해 답했다.
“넵, 죽을 만큼 열심히 할게요, 형! 저도 형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요.”
“……그래.”
호진은 주호의 말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만을 지키겠다던 그의 신념에 금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기환.
그리고 그를 따르던 군인들의 희생.
그것은 호진의 가치관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런 호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주호는 싱글벙글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있다가 봐요. 형!”
“있다 봐.”
주호가 떠난 옥상에 다시금 정적이 흘렀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쉬자 차가운 밤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간다.
혼자 남은 옥상은 적막하기 그지없었지만,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은은한 달빛은 뭔가 운치가 있었다.
“그래.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지.”
호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변해간다는 사실은 조금 심란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신념이란 계속해서 바뀌는 것이다.
이럴 때는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호진이 늘 목숨을 도외시하면서 싸워 온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겠다는 목적.
그 과정에서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일행들은 호진이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여겼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건 바보 같다고 여겼지만, 이미 자신도 비슷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바보처럼 살긴 싫지만…….’
백기환의 마지막이 어쩐지 자꾸 아른거렸다.
어쩌면 그런 삶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누군가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호…… 호진이 형.”
오주호가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호진을 불렀다.
“여기에, 여기에 저희 주연이 왔나요?”
“안 왔어. 무슨 일이야.”
심상치 않은 주호의 표정에 호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게, 게이트가 발견됐어요. 여자 화장실 변기 칸이라 이제 발견된 모양이에요.”
“…….”
호진이 눈을 질끈 감자 주호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주연이가, 우리 주연이가 안 보여요.”
“다른 사람들은?”
“……무사해요.”
다른 사람들의 안부만 묻자 오주호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대답했다.
실망이라도 한 걸까.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호진은 주호의 어깨를 툭 쳤다.
“오주호. 정신 똑바로 차려. 주연이는 내가 데려올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주호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깃들었다.
그리고 미안함에 이어 결연한 표정을 지은 주호가 대답했다.
“……저도 갈래요.”
“안 말려. 선택은 네 몫이야. 대신 방해가 되면 곧장 돌아가. 판단 기준은 내 마음이야.”
“약속할게요.”
주먹을 굳게 쥔 오주호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곧장 계단을 내려간 호진은 박 순경에게 경계를 일임하고 곧장 게이트로 향했다.
박 순경은 주호의 동반을 말리려 했지만 호진이 고개를 저었다.
주호는 애가 아니었다.
물론 객기를 부린다면 돌려보내야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말릴 순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게이트를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 들어갔다.
***
─띠링
「F급 던전 ‘감시자의 숲’에 입장합니다.」
「난이도 : 쉬움」
어둡다.
하지만 사냥꾼의 눈은 어둠을 쉽게 꿰뚫어 봤다.
나뭇가지들을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월광.
여기는 깊은 숲처럼 보였다.
─사박사박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밟힌 낙엽이 잘게 바스러지고, 저 멀리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호진의 눈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보였다.
부러진 위치가 호진의 허리쯤으로, 주연이의 눈높이와 비슷했다.
다가가 살펴보니 단면이 푸르른 색을 띠고 있다.
‘얼마 안 지났네.’
주변 땅을 살피자 희미하게 족적이 남아있었다.
호진은 손짓으로 주호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줬다.
둘은 숨을 죽인 채 족적을 뒤쫓아 움직였다.
바로 그 순간.
─푸드덕
─부엉
어디선가 나타난 부엉이 한 마리가 주호의 어깨에 내려와 앉았다.
‘어느새?’
호진은 반쯤 뽑은 검을 꾹 쥔 채 부엉이를 노려봤다.
초감각에는 잡히지 않았다.
사각에서 날아온 탓에 주호의 어깨에 내려앉기까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F급 던전이라고 방심했나.’
아니, 주연이를 구하러 들어와 충분히 긴장은 한 상태였다.
어쩌면 피곤이 너무 오래 쌓였는지도 모르겠다.
─호오호오
그런 호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엉이는 그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진을 바라봤다.
“위험……하지는 않은 것 같네.”
“호진이 형, 이거 어떻게 해요?”
놀라서 돌처럼 굳었던 주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몬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 굳이 해칠 필요는 없겠지.”
호진이 손을 휘젓자 부엉이가 놀랐는지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호진의 머리를 지나 점점 위로 날아오르는 부엉이를 따라 고개를 든 그 순간.
─호오호오
─푸드덕 푸드덕
수십, 아니 수백의 날갯짓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수백의 눈동자들이 노란 안광을 터트리며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