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43화 (43/241)

43화. 실존과 부조리 (5)

─툭 투 둑 쏴아아아

갑작스레 쏟아진 비가 호진의 머리를 적셨다.

하야 위로 떨어진 빗방울은 줄기줄기 갈라져 광택이 나는 피부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잠시 하야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주 대위의 모습이 보였다.

호진과 눈이 마주친 그는 흠칫 몸을 떨더니, 이내 고개를 축 숙였다.

“저는…….”

“…….”

호진은 가만히 주 대위를 바라봤다.

주 대위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가 얼어붙은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자신조차 정신 내성이 아니었다면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상태에서 움직일 수 있었던 백기환이 이상하지.’

호진은 대답 대신 그에게 손을 뻗었다.

“타시죠. 앞으로 할 게 많습니다.”

호진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잠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회나 죄책감 같기도 했고, 결의 같기도 했다.

잠시 멈칫했던 그는 손을 뻗어 호진의 손을 맞잡았다.

호진은 주 대위를 당겨 하야에 태운 후 곧바로 고삐를 당겼다.

빠르게 내달리는 하야.

얼마 되지 않아 캠프의 외벽이 나타나고 그것을 따라 달리다 보니 문 하나가 보였다.

문에는 숫자 9가 적혀있다.

이곳이 9번 게이트, 동료들이 있다는 곳.

호진이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자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발자국들이 보였다.

“뒤쫓아, 하야. 빠르게,”

“그르르릉.”

하야가 발을 박차자 호진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어둠 속을 바람같이 가르며 달리기 시작한 하야는 순식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을 찾아냈다.

호진은 그곳에서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 순경! 오주호!”

그들의 이름을 크게 외치자 빗속을 헤치며 나아가던 무리가 멈춰 섰다.

달려오는 하야를 보고 군인들이 놀라 총을 겨누자, 박 순경을 필두로 한 헌터들이 급히 그들을 막아섰다.

가까이 다가서자 군인들과 헌터들 간에 오가는 고성이 들려왔다.

“당신들 안 비켜? 전부 죽고 싶어서 이래?”

“안전하다고요. 아는 사람이라니까요.”

“비키라고, 시발. 헌터고 나발이고 다 쏴버리기 전에.”

아무래도 군인들과 헌터 간에 갈등이 있는 모양이다.

군인들이 저러는 건 아마 정말로 호진과 하야가 위험하다 생각해서가 아닐 거다.

정말 그랬다면 호진이 눈앞까지 왔을 때까지 말싸움이나 하고 있진 않았겠지.

‘기 싸움인가.’

이유가 어쨌든 지금의 갈등은 자신으로 인한 것.

호진이 그들을 말리기 위해 하야에서 내리려는 순간.

언제 내린 건지 군인 앞에 선 주 대위가 대뜸 군인의 조인트를 걷어찼다.

“악! 어떤 개새…… 주 대위님?”

정강이를 차인 군인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픔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주 대위가 군인의 총열을 낚아채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겨눴다.

“쏴 봐.”

“네?”

“쏜다며. 저기 타고 있던 날 쏜다는 거 아니었나?”

“아니, 그게 아니라…….”

─짜악

말꼬리를 흐리던 군인의 얼굴이 한쪽으로 획하고 돌아갔다.

주 대위의 손에 맞은 군인의 뺨이 붉게 부어올랐다.

“다들 똑똑히 들어라. 방금 2대대, 즉 본대가 전멸했다.”

그의 등장이 강렬했던 탓일까.

아니면 그의 말이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군인, 헌터, 피난민까지 100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금 남은 건, 피난민들과 함께 캠프를 떠난 6개 팀뿐이다.”

주 대위의 굵직한 목소리는 빗속에서도 잘 울려 퍼졌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 특히 군인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갔다.

“여기 있는 이 호진 씨는 여기서 유일한 강화도 유경험자다. 지금부터 그의 말이 곧 나의 명령이다.”

잠시 숨을 고른 주 대위가 뺨을 때린 군인을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자존심 같은 것 때문에 힘 빼지 마라. 그럴 때가 아니다.”

군인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진은 멈칫했다.

주 대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에게 쏟아지는 시선들.

감탄, 믿음, 의심, 기대, 시기.

하지만 이내 호진은 그 시선들을 외면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든, 혹은 그렇지 않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호진은 구세주가 아니다.

그들의 앞길을 선택하는 건 그들 자신이다.

애초에 정답 따윈 호진도 모른다.

호진은 그저 선택지를 제공할 뿐.

그것을 선택할지 말지는 오롯이 그들의 몫이다.

“이호진입니다. 짧게 말하겠습니다. 지금 상황은…….”

호진은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강화대교가 있는 캠프까지 거리는 상당했다.

일전에 확인했지만 강화 내부의 몬스터 밀집도는 꽤 높았다.

이 야밤에 걸어서 그곳까지 간다는 것은 승산이 낮은 도박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내걸 만한 도박은 아니었다.

“……해서, 저는 마니산에 새로 구축한 캠프로 이동할 겁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따라오실 분들만 따라오세요.”

“따라갑니다.”

“저도요!”

호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 순경과 오주호 남매가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에 질세라 헌터 그룹 전부가 손을 들고 호진의 뒤로 이동했다.

망설임 없는 그들의 행동 덕이었을까.

군인들과 헌터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피난민 절반이 호진에게 붙었다.

“저도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주 대위가 호진에게 붙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군인 다섯 명이 호진 일행에게 붙었다.

그러자 생존자들이 추가적으로 호진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군인 여섯을 포함한 20명의 피난민들은 끝내 북쪽의 캠프로 향했다.

약간 의외였던 것은 뺨을 맞았던 군인이 주 대위를 따라 호진에게 붙었다는 것 정도.

그렇게 생존자 52명, 박 순경을 포함한 헌터 11명과, 주대위를 따르는 군인 다섯 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그룹이 형성되었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간단하게 정비를 마친 그룹.

“빠르게 이동합니다.”

선두에 선 호진은 지체 없이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갔다.

***

─철퍽

호진은 축축해진 흙바닥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질척이는 진창.

물에 젖은 잎사귀.

흙에 씻겨 내려 모습을 드러낸 뿌리까지.

비가 내리는 숲길은 걷기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이곳을 지나쳐야만 10번 게이트와 길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부스럭

전방의 인기척에 호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끼익.”

“케륵?”

고블린 서너 마리가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들도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날지는 몰랐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고블린들이 아니었다.

녀석들은 이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손에 든 날붙이를 들고 달려들었다.

“꺄아악!”

“으아아아악!”

생존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뒷걸음치려던 그때.

한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발도.

고블린들의 머리가 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뒤를 따르던 모두가 놀라 숨을 삼켰지만, 정작 호진은 귀찮다는 듯 피를 털어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흠.’

호진은 침음을 흘렸다.

역시 피난민들은 밖의 세계에 대한 내성이 부족했다.

고작 이런 거로 놀라서는 곤란하다.

이제 곧 숲길을 벗어날 것이다.

지금까지 몬스터를 만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

가도와 마을 인근은 오히려 몬스터가 득실거릴 터.

‘앞으로는 이것보다 훨씬 심하겠지…….’

숲길을 벗어나 10번 게이트의 가도로 나온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진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호진이 지금껏 봐왔던 것들보다 더한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속이 파헤쳐져 온갖 장기를 쏟아낸 군인.

말뚝에 박힌 노인의 머리.

목이 졸려 죽은 여인의 시체까지.

반면 망자들의 위에서는 몬스터들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잘린 사람의 사지로 칼싸움을 하는 고블린들이 보인다.

시체의 눈알을 파먹는 새 같은 녀석도 있다.

그 어디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와, 드디어 도로…… 어라? 저건…… 읍, 우웨에에엑.”

“커어어억, 우웩!”

어느새 호진을 따라 도로로 나온 피난민 중 일부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속을 게워냈다.

‘……이것보다 심한 건 자주 보기는 힘들겠네.’

호진이 정정하며 검을 고쳐 들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들의 무리에 몬스터들은 잠시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놈들은 이내 살의와 욕망으로 눈을 번뜩이며 가지고 놀던 시체들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날붙이 따위를 꼬나 쥐고 호진과 사람들을 향해 다가왔다.

─부스럭

“그르륵?”

그때 수풀을 헤치고 하야가 모습을 드러내자 몬스터들의 몸이 굳었다.

“하야는 무섭고 나는 만만하다는 건가.”

그 반응을 본 호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눈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충 보이는 시체들만 해도 100여 명.

훼손은 심하지만 죽은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

아마 10번 게이트로 피난을 떠난 사람들일 것이다.

호진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자꾸 치밀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지켜야 할 일행이 있다.

괴물들을 전부 죽이는 것보단 배제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것은 간단하다.

압도적인 폭력으로 공포심을 심어주는 것.

“간다.”

호진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창 비슷한 날붙이를 꼬나쥔 코볼트들의 뒤에 나타났다.

“컹?”

─서걱

스산한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코볼트들의 신형이 스르륵 무너졌다.

녀석들은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했다.

그저 의아한 얼굴을 한 채 바닥을 나뒹굴 뿐.

호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전진.

전진.

다시 전진.

“키이이이이이익!!!”

그가 같은 것을 세 번쯤 반복했을 때,

몬스터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자,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몬스터 무리가 뿔뿔이 흩어졌다.

이미 호진의 손에 썰려 나간 몬스터들만이 도망치지 못하고 싸늘하게 식어갈 뿐이었다.

호진은 놈들의 뒤를 쫓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직도 얼어붙은 피난민들이 보였다.

꾸욱.

주먹을 쥐었다 핀 호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호진은 그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울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