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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39화 (39/241)

39화. 실존과 부조리 (1)

“아이고고고.”

용재는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신전 기둥에 몸을 기댔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몸에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긴.”

오늘 하루 몸에 입은 상처들을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투정하고 있는 게 사치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법한 치명상들.

하지만 상처들은 흔적들만이 남아있을 뿐, 이미 아문 지 오래였다.

‘치유 내성이 8레벨, 출혈 내성이 6레벨이라…….’

개척자(Pathfinder).

칭호의 효과로 용재는 온갖 내성 스킬들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만약 칭호가 아니었다면 진작 차가운 땅속에 묻혔을 터다.

‘그런데.’

용재는 슬쩍 고개를 들어 모닥불을 쬐고 있는 호진을 바라봤다.

자신 같은 칭호가 있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데 용재와 비슷한 시기에 각성한 호진의 성장은 눈부셨다.

수시로 사선을 넘나들며 전투를 벌이고 그 과정에서 점점 강해진다.

내성 스킬들이 높은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뭘 믿고 저런 싸움을 할 수 있는 걸까.

‘전에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기라도 했는데. 오늘 보여준 그 모습은…….’

눈 깜빡할 시간이었다.

홀연히 나타난 호진은 집채만 한 괴물의 철로 된 장갑(裝甲)을 무 썰듯이 썰어버렸다.

왠지 알 수 없었으나 용재는 그 동작에서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와이번을 타고 있던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던 황금의 무구를 착용한 리자드맨.

호진이 ‘치프’라 불렀던 그 괴물은 일기당천의 위용을 뽐내던 스미스조차 일격에 제압할 정도의 강자였다.

하지만 호진은 그 괴물을 상대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히 마주하고 또 다른 치프의 머리를 내밀었다.

용재는 호진과 치프의 대치를 지켜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었다.

끝내 상대는 호진에게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그것을 본 용재는 속으로 안심하며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음에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차이는 더 커지기만 했어.’

호진에게 도움이 될 날을 기약한 지가 벌써 몇 번째인가.

하지만 돌아온 건 또 다른 호진의 구원.

도저히 호진을 볼 낯이 없었다.

‘더 강해져야 해.’

용재는 자신의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조용히 그러쥐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과 달리, 그의 가슴 한편에서 열등감과 무력감이 작게 일렁였다.

***

‘이건…….’

새로 얻은 보상을 확인한 호진의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여태 받아왔던 보상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퀘스트를 깨고 얻었던 것과 던전을 클리어하고 받았던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스 몬스터로 추정되는 녀석들을 잡고 받았던 것이다.

그 난이도에 따라 보상은 각각 달랐다.

그렇기에 이번 보상을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정말 죽을 뻔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보상은 호진의 기대를 충족하고 남았다.

「지룡(地龍) 하야의 뼛조각」

「종류: 액세서리」

「정보: 흐르는 늪지대 부족에 전해져 내려오는 지룡의 뼛조각. 용이라 불리지만 전혀 다른 개체다. 이미 죽은 지 오래지만, 주술로 인해 사역마로 부려지고 있다.」

지룡(地龍).

그것은 날개가 없는 용을 뜻한다.

‘용은 아니라지만…….’

괜히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닐 터다.

‘그리고 사역마(使役魔)라니.’

끔찍했던 김포와 달리 강화도에 온 이후로는 판타지적인 것들이 잔뜩 등장하는 것 같다.

물론 좋은 것들만 있지는 않았지만, 호진의 가슴을 들뜨게 할 요소가 너무 많았다.

호진은 인벤토리에서 뼛조각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피리?’

꺼내든 하얀 뼛조각에는 둥근 구멍들이 뚫려있었는데, 마치 그 모양이 오카리나를 연상시켰다.

호진은 살며시 뼛조각을 입에 가져다 댄 후 구멍으로 숨결을 불어넣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

휘파람보다 높지만 청아한 피리 음이 진영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푸른 달빛 아래 새파란 불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호진의 옆에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의 생물은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마치 조각 같아.’

칠흑의 비늘은 달빛을 조용히 머금어 우아한 빛을 낸다.

길고 날렵하게 빠진 생김새는 흡사 랩터라 불리는 공룡을 닮아있다.

호박색 홍채 안에 담긴 검은 동공은 고요하게 호진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예기가 담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소름이 살짝 돋았다.

“하야.”

호진이 조용히 손을 뻗자 지룡은 살짝 머리를 기울였다.

단단하면서 매끄럽고 서늘한 감촉이 손에 와 닿는다.

녀석이 낮게 그르렁거리자 손이 잘게 떨려왔다.

호진은 고개를 돌려 지룡의 등허리를 바라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죽으로 된 안장.

안장을 보니 기승용(騎乘用)으로 훈련되었음이 틀림없다.

손을 뻗어 녀석의 허리를 살며시 누르자 녀석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낮추었다.

호진은 가볍게 뛰어올라 지룡의 위에 올라탔다.

“앞으로.”

호진이 나지막하게 명령하며 고삐를 가볍게 당기자 녀석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큰 덩치가 움직이는데 나뭇잎 하나 바스라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망루 위에 예은과 신전 기둥에 기대어 쉬던 용재가 숨죽여 지켜봤다.

“빠르게.”

호진이 고삐를 조금 더 힘주어 당기자 지룡의 살랑거리던 꼬리가 빳빳해지며 몸에 힘이 들어갔다.

─타닷

가볍게 발을 구르자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밤바람이 호진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고 눈썹이 가늘게 떨려왔다.

알 수 없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호진은 머리를 젖히고 그 감각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리고 잠시 후 호진의 고양감이 가라앉을 무렵 녀석은 자연스럽게 속도를 낮추고 캠프로 돌아왔다.

똑똑한 녀석이다.

“고맙다. 하야.”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녀석은 낮게 그르렁거리며 답할 뿐이었다.

캠프에 도착한 호진은 하야에게서 내려 녀석과 눈을 맞췄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르르르르르륵.”

녀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르렁거린 후,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렁이는 푸른 불꽃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호진이 하야가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점점 따라잡기가 버거워지네. 이제는 용도 소환하는 거야?”

용재가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용은 아니라고 하더라.”

“아무튼, 대단하네. 형이랑 점점 차이가 벌어지는 것 같아.”

호진은 의아함을 느꼈다.

용재는 웃고 있었지만 표정 어딘가에 허탈함이 묻어났다.

“내가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글쎄,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호진이 용재를 지긋이 바라보며 답하자 용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넌 잘하고 있어.”

“…….”

용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뻐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잠시 침묵하던 용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형 옆에 있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따라다녔어.”

“알아.”

“나중에는 형이랑 마음이 맞아서 따라다녔어.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는 거.”

“…….”

사람들을 구하는 걸 목표로 한 적은 없었다.

목표를 위해 움직이다 손이 닿는 대로 사람들을 구했을 뿐이다.

하지만 호진은 그 사실을 구태여 정정하지 않았다.

그들을 구한 건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나도 형과 나란히 서서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리고…… 형이 나를 구해준 것처럼, 나도 형을 돕고 싶었어.”

잠시 호흡을 고른 용재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들어. 나는 강해지고 있긴 한 걸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도움은 충분히 되고 있어.”

“내가?”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신전 입구를 맡겼고, 넌 충분히 잘해줬어.”

“……나 혼자 한 게 아니야.”

“그래. 일행들이 한 거지. 그리고 너도 그 일행이잖아.”

“…….”

“그 둘을 나누려 하지 마.”

용재는 명백하게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의 그라면 쇼핑몰에서 만났던 고블린 챔피언 정도는 혼자도 압살할 터.

그런 말까지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용재는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듯했다.

“……나도 도움이 된 건가.”

낮게 중얼거린 용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났다.

“형을 따라잡으려면 죽을 만큼 노력해야겠네.”

“죽을 만큼 노력하는 정도로는 힘들걸.”

“그럼?”

“글쎄. 나도 그건 모르지.”

호진은 웃으며 용재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용재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됐어. 계속해서 따라갈게.”

“그래.”

호진은 진지한 용재의 얼굴과 마주하며 손을 뻗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응.”

호진의 손을 마주 잡은 용재는 쩌릿한 감각이 온몸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속 시원하게 웃음 지으며 도끼를 집어 들었다.

호진을 따라다니려면 실력을 늘려야 한다.

지금의 실력으로는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질 않는다.

‘무엇보다 형이 데리고 다녀주지도 않겠지.’

용재는 곧장 신전 앞 공터로 향했다.

‘오늘은 가볍게 휘두르기 만 번만.’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온몸이 쑤셨지만 기분만큼은 날아갈 듯했다.

시간이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조금 늦게 자야 할 듯했다.

***

“좋네.”

호진은 도끼를 휘두르는 용재를 보며 슬그머니 웃음 지었다.

용재에게는 기대하는 바가 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행 중에는 자신 다음가는 실력자다.

‘1대 1 대결에 국한된 것이지만.’

칭호와 직업의 조화도 그렇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투에 임하는 자세까지.

단명하기 딱 좋은 싸움법이지만, 죽지만 않는다면 폭발적으로 강해질 거다.

아니, 이미 베이스는 갖춰져 있다.

무대만 만들어 준다면 빠르게 성장할 터.

‘뭐, 그래도 나한테 비비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호진은 실소하며 모닥불에 데운 따끈한 스프 두 잔을 들고 망루로 이동했다.

“저 왔습니다. 이건 선물이요.”

망토를 뒤집어쓴 예은에게 호진이 스프가 담긴 잔을 건네자, 예은은 능청스럽게 잔을 받아들었다.

“뭘 이런 걸 다. 고마워요.”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요. 목숨 걸고 싸우고 근무까지 선 보람이 있네요. 그래서 저번에 한 말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건가요?”

“……안 그래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올라왔습니다.”

“앗, 그랬나요? 제가 너무 빨리 눈치를 줬네요.”

“그러니까요.”

“그러니까요?”

“아니, 제 말은 음……. 오늘도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호진은 살짝 진땀을 뺐다.

예은은 신뢰하는 동료지만 이럴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곤란했다.

호진의 반응을 즐기는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지적할 수도 없는 노릇.

“흠,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주 대위에게 연락을 안 드렸네요.”

마침 좋은 핑곗거리가 생겨난 호진은 허겁지겁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예은은 의도가 뻔히 보이는 화제전환이 웃겼는지 피식거렸지만, 호진은 애써 그 웃음을 모른 척했다.

사실 핑계긴 했지만 어쨌거나 연락을 하긴 해야 했다.

전쟁 중에 연락을 할 수는 없기에 전쟁이 끝난 후 연락을 하기로 말을 해 놨다.

더 늦어지면 주 대위도 걱정할 터.

아니, 이미 상당히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치익

“여기는 이호진입니다.”

[…….]

호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주 대위는 항상 무전을 켜놓겠다고 했다.

지금은 저녁 8시.

리자드맨들이 모두 물러가고 2시간이 조금 넘게 지난 시간이다.

자는 것은 아닐 거다.

호진이 재차 말을 하려던 그 순간.

─치지직 쾅! 타당 탕 탕.

[……호, 님? 호진 님?]

거친 송신음과 함께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곧이어 주 대위의 목소리가 끊겨 들려왔다.

“예, 여기는 이호진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치지직

[……입니다! 지금─치지직…… 은……!]

주 대위의 끊겨 들리는 말을 들은 호진과 예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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