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농장 탈환 (6)
리자드맨 치프와의 싸움 후.
입구로 향하던 호진은 통로에 선 예은과 용재를 발견했다.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려던 순간.
─쿵 쿵 쿵 쿵 쿵
신전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호진이 입구를 바라보자 철갑을 두른 괴물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호진은 반가움은 잠시 접어두고, 소량의 기를 운용해 바닥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모든 걸 쏟아부은 싸움을 한 후이지만, 레벨 업을 두 번 하며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상태.
기의 운용도 치프와의 싸움을 통해 꽤나 익숙해졌다.
순식간에 예은과 용재를 스쳐 지나간 호진은 꼬리를 휘두르려던 괴물의 목 위에 올라섰다.
괴물은 호진이 자신의 목 위에 올라선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호진은 놈의 목을 향해 기를 담은 목엽참을 휘둘렀다.
─서걱
깔끔한 절단음이 울려 퍼지고, 머리와 분리된 괴물의 몸통은 비틀거렸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몸에 남은 기를 거의 다 짜냈기 때문일까.
호진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껴 괴물의 몸에 검을 박아 넣은 채 몸을 지탱했다.
비틀거리던 녀석의 몸통은 큰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연이어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아오, 먼지. 그나저나 왜 이렇게 어지럽지. 기를 많이 써서 그런가?’
이제는 단순히 어지럽다는 감각을 떠나서 눈앞이 노랗게 뜨고 입에서 단내가 났다.
아주 익숙한 감각.
빈혈이다.
‘맞네, 나 아까 피 겁나 쏟았구나.’
왜 어지럽나 했더니 아까 신전 바닥에 피 한 바가지를 바닥에 흩뿌리고 왔었다.
‘이젠 진짜 남아있던 기운까지 다 쥐어짠 것 같은데, 얘가 마지막인가?’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주변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호진은 눈앞에 먼지를 걷어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신전 앞을 훑어봤다.
“……?”
신전 앞을 가득 메운 리자드맨의 군세.
수백의 랩터 기수들과 수천의 보병.
그리고 가장 앞에는 와이번을 탄 리자드맨이 보였다.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갑옷과 무구까지.
저 녀석도 아까 전의 녀석과 같은 치프일 터.
순간 호진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끔벅여야 했다.
그리고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조졌네.’
호진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바라보자 예은과 용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절망 속에서 희미한 희망을 발견한 이들이 지을 법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사실 그것을 넘어 예은의 눈가는 거의 촉촉했다.
호진은 차마 그런 그들을 향해 당황한 표정을 보일 수 없었다.
‘헛웃음이라도 나와서 다행이다.’
호진은 입매를 조금 비틀어 쓰게 미소 지었다.
“조금 늦었네. 수고했어.”
이젠 나만 믿어, 라는 말은 차마 목구멍에서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원래 병사들은 지휘관을 잃으며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복수를 위해 끝까지 싸우거나, 후퇴하거나.
원래라면 적들이 물러날 가능성이 높았지만, 상대 쪽에 새로운 치프가 있다는 건 예상치 못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리자드맨들의 시체를 보면 이쪽 거점에 있던 녀석들은 거의 전멸한 상태.
헌데 전보다 많아진 적들을 보아하니 새로 나타난 치프가 지원군을 끌고 온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적들이 그냥 물러갈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는 수밖에.’
자연치유 스킬이 발동되고 잠시 숨을 고른 덕에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호진은 쓰러진 괴물의 몸을 밟으며 놈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섰다.
발아래 괴물을 한순간에 죽인 덕분일까.
모든 적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경계, 두려움, 분노.
다양한 감정들을 담은 시선이 호진을 예리하게 찔러왔다.
그중에서도 와이번을 타고 있는 치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호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프와 한번 눈을 맞춘 호진은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녀석은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인사는 받아주지 않았다.
‘인정한 상대에게만 반응한다 이건가?’
호진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고 챙겨온 수급 하나를 꺼내들었다.
번쩍이는 황금투구를 들어 올리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녀석들 사이로 파문이 일듯 소란이 퍼져나갔다,
“카르르르르르르”
“케르르르르르르르르르!”
대부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렸고, 몇몇은 무기를 바닥에 내리치며 분노를 드러냈다.
그러던 와중, 와이번 위에 있던 치프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소란은 순식간에 식어 아까와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치프는 천천히 손을 내린 후 자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다라, 아훅 쉬툭─니조 치프. 아히?”
저번에 만난 치프와의 대화를 통해 뭘 말하는지를 대충 짐작해 보았다.
‘아훅 쉬툭’은 시스템의 설명상 지명이었고, ‘치프’는 직위, 그렇다면 ‘니조’는 뭐 자신의 이름이나 명칭 같은 것이 아닐까.
호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호진.”
녀석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호진이 든 수급을 가리켰다.
그러자 호진은 수급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아훅 쉬툭─칠라 치프.”
그 이름을 들은 상대 치프의 얼굴이 약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이내 와이번에서 내리더니 호진을 향해 걸어왔다.
호진이 검 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자 상대는 멈칫하더니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내리꽂고 빈손으로 다가왔다.
‘싸울 생각은 없다는 건가.’
천천히 다가온 녀석은 천천히 양손을 내밀었다.
아마도 수급을 돌려달라는 의미.
호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수급을 최대한 부드럽게 녀석의 손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녀석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히, 글로리카 이호진.”
“…….”
뭐라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하다는 것 같다.
녀석은 몸을 돌려 돌아가더니 이내 와이번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창을 한 바퀴 휘두르며 리자드맨 군세를 향해 뭐라고 외쳤다.
그 말을 들은 리자드맨들은 놀란 듯 치프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몸을 돌린 군세는 대열을 유지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펄럭
군세가 돌아섬과 동시에 와이번이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아오르던 녀석은 호진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정면을 바라보며 와이번을 몰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놈의 신형.
‘이렇게까지 잘 풀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아무래도 호진도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호진이 죽인 녀석이 저런 대우를 받을 만한 녀석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저들의 문화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물러나는 적들을 보며 호진은 몸을 돌려 용재와 예은을 바라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드디어 끝났네. 이제 좀 쉬죠.”
그런 호진을 바라보던 일행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적들이 모두 물러간 신전의 앞.
골렘 두 기가 바닥에 널브러진 리자드맨들의 시체를 한쪽으로 열심히 치우고 있었다.
반면 신전 계단에 피를 대충 닦아내고 주저앉은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그니까 스미스는 괜찮다는 거지?”
[머, 멀쩡해. 드론으로 주변 상황도 전부 체크 중이니까, 일단 쉬고 있어. 적이 다가오면 스미스가 드론을 움직여서 경고해줄 거야.]
호연이 준 핸드폰으로 연락을 한 결과, 스미스는 다행히 무사한 듯했다.
어딘가 고장난 듯 움직이지 않지만, 핵심인 코어는 무사하다는 모양.
지금도 호연과 컴퓨터를 통해 소통하고 있다고 한다.
‘식물인간은 아니고, 식물 AI? 라고 해야 하나.’
호진은 한쪽에 세워둔 스미스의 상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 내일까지 골렘 두 기를 추가로 보낼게. 스미스 잔해는 한쪽에 모아둬.]
“알았어. 근데 농장은 언제부터 다시 가동할 거야? 혹시 일손이 필요하면 나랑 같이 왔던 친구들에게 부탁해볼게.”
안 그래도 이방인들에게 어떤 일을 시킬까 고민이 되던 참이었다.
‘농장일이라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쪽 세계는 뭔가 배경이 중세와 비슷했다.
그렇기에 농사일은 잘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그쪽 방비가 조금 더 튼튼해지면 시작해야지. 그, 그런데 그 친구들 농사일 시키기에는 아까운데.]
“어?”
호진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묻자 호연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그쪽 세계에서는 어떤 기술이 있나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일거리를 줘봤는데. 재, 재밌는 기술이 많아. 예를 들면 스팀펑크 공학이라든가.]
“……그게 뭔데?”
[증기기관을 활용한 기술들인데, 현대적인 관점이 아닌 재밌는 방식으로 접근하더라고. 나도 시간이 나면 배워보고 싶은 기술들이야.]
의외였다.
생활양식도 복색도 모두 중세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어서 꼼짝없이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굳이 따지면 내가 문외한이지.’
검이라면 모를까 저런 기름 냄새 나는 것들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노, 농장 일은 골렘들이나 로봇으로 대체해도 돼.]
“알았어. 그럼 그쪽 애들한테 물어보고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줘.”
[그, 그래 알았어.]
“어, 이만 끊는다. 잘 자.”
[으,응! 고, 고마워.]
─달칵
호연과의 통화를 마친 호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리자드맨 들이 세워 놓은 방책 위로는 여러 대의 드론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방책 중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인 망루 위에는 화살을 수거한 예은이 보초를 서는 중이었다.
‘있다가 올라가서 드론이 경계 중이니 쉬어도 된다고 알려줘야겠다.’
어느새 어둠이 드리워진 하늘 아래,
계단에서 일어난 호진은 마른 나무 조각을 몇 개를 주워서 신전 앞에 모닥불을 피웠다.
호연의 4번째 집에서 편하게 쉬어도 되지만, 왠지 밖에 머무르고 싶었다.
방금까지 호진은 이곳에서 지독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것을 까맣게 잊고 방에서 편하게 쉬는 것은 의외로 어려웠다.
괴리감이라고 해야 할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너무 편한 공간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젠 어쩌면 불편함에 몸이 익숙해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흠, 내 사주에 역마살이 있던가?’
호진은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 얻은 것들을 살폈다.
“상태창.”
─띠링
「이호진」
「나이: 24」
「레벨:22」
「근력:26 민첩:35 지구력:20」
「스킬: 사냥꾼의 눈 LV.2 거합 LV.5 투구 가르기 LV.4 체력 회복 LV.4 확신 LV.1 검술의 묘리 LV.1 검의 정수 LV.1 정신 내성 LV.1 파마의 검식 초감각 LV.1 출혈 내성 LV.1 초급 기(氣) 검술 LV.1」
「직업: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
「칭호: 없음」
「잔여 포인트: 6」
이번 전투에서만 레벨이 3개나 오르며 레벨이 22가 됐다.
기존 스킬 중 거합, 체력 회복 레벨이 올랐고, 새로운 스킬로 출혈 내성, 초급 기(氣) 검술을 얻었다.
초급 기(氣) 검술은 단순히 일반 스킬로 보기는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기(氣)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호진은 기(氣)를 접한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방식이 이단이라는 것을.
사칙연산을 안 배운 애가 미적분을 하는 꼴이다.
원래라면 기(氣)를 먼저 느끼고 검술에 적용하는 게 일반적인 수순일 듯하다.
스킬 때문일 수도 있고, 너무 검에만 치중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을 이상하게 넘어간 까닭일까.
호진은 검을 쥐지 않으면 기의 존재를 느낄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상태가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좋든 싫든 기(氣) 검술을 사용하면 몸에 그 감각이 익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거다.
기(氣)는 분명 호진이 한층 더 강해질 수 있는 새로운 길이었다.
벌써부터 기를 어떻게 활용할지 새로운 검술들이 이것저것 떠올라 가만히 쉬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로는 ‘검의 묘리’ 스킬의 활용 방법이 있다.
아무래도 검술과 관련된 기술이 특정한 조건들을 만족하면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데 도움을 주는 모양이다.
‘LV.10을 찍는 게 우선인 듯한데…….’
가장 높은 스킬이 거합 LV.5다.
다음 검술의 묘리가 사용될 때까지는 한참 남은 듯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할 건…….’
이번에 얻은 보상.
상대가 강했던 만큼 그 보상도 기대가 됐다.
‘인벤토리.’
인벤토리에서 보상을 확인한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