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농장 탈환 (4)
가속화된 사고 속에서, 호진은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패링에 검이 튕겨나가며 균형이 흔들렸고 상반신을 훤히 드러낸 상태다.
놈이 원한다면 어디든 찌를 수 있는 상황.
그래도 녀석은 급소를 찔러올 것이다.
심장이나 목이나 머리.
‘어디냐.’
호진은 놈이 창을 든 어깨, 눈빛, 호흡을 재빠르게 훑었다.
왠지 녀석이 어디를 찔러올지 느낌이 왔다.
호진은 급히 왼팔을 날아드는 창을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가속화된 사고가 풀리고, 상대의 창끝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호진을 향해 쇄도했다.
─틱
그리고 정말 운 좋게도 호진이 휘두른 팔이 창끝을 건드렸다.
약간 비틀린 창의 궤도는 원래의 목표와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다음 순간.
화끈한 통증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장을 노렸던 녀석의 창은 살짝 비껴나며 갈빗대를 부수고 폐를 찔렀다.
차갑고 예리한 날붙이가 자신의 몸속을 헤집는 게 느껴진다.
고통에 전신이 오그라들고 벌벌 떨려왔다.
눈앞에서는 폭죽이 터지듯 시시각각 번쩍거린다.
하지만.
그 끔찍한 고통보다 호진의 투쟁과 승리에 대한 갈망이 더 컸다.
호진은 이를 악물고 오른손만으로 검을 휘둘렀다.
상대도 이것까진 예상하진 못했는지 어깨가 움찔하고 떨려왔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충격이 배를 강타했다.
붕 뜨는 부유감이 온몸을 덮쳤다.
녀석이 검을 피하기 위해 호진의 배를 걷어찬 것이다.
─쿵
뒤에 벽과 부딪친 호진은 검을 바닥에 짚으며 간신히 섰다.
체감상 10m는 날아온 것 같은 기분이다.
“쿨럭.”
몸을 세우려는 순간.
목을 타고 뜨거운 액체들이 울컥 쏟아져 내렸다.
창에 찔리고 발에 차이며 진탕이 된 속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내린 것이다.
피를 한바탕 쏟아내니 머리가 핑 돌았다.
바닥을 붉게 물들인 피의 양을 보면 이러고도 아직 안 죽은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벤토리.’
호진은 인벤토리에서 ‘하이포션’을 꺼내 들었다.
김포에서 ‘이름 없는 책’의 공양을 저지하고 받은 보상이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호진은 하이포션을 절반 이상 들이켜고 나머지 절반은 상처 부위에 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뚫린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며 몸에 활력이 돌았다.
‘고통은 아직 남아있……지 않구나.’
순간 아직 아프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극심했던 고통의 잔류가 일으키는 환상통.
순식간에 치료된 몸의 상태를 뇌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이때, 새로운 알림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띠링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초감각 LV1」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체력회복 LV.3 → 체력회복 LV.4」
초감각이라.
‘아까 그 느낌인가.’
놈이 자신을 찌르려던 그 찰나의 순간.
호진은 놈이 등장하며 던진 도끼를 피했을 때와 비슷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맹인 악사의 눈가리개 헝겊’을 썼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어쩌면 헝겊을 썼을 때 느꼈던 감각들이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호진이 슬쩍 고개를 들어 상대를 주시했다.
예상은 했지만 상대는 호진에게 다가오지 않고 아까 그 자리에 서서 호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중함인지, 자비인지는 모르겠다.
하나 분명한 건 녀석은 호진과의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리자드맨이 미소를 짓는 건 본적이 없지만, 지금 녀석이 짓고 있는 미묘한 표정은 분명 즐거워 보였으니까.
‘그래, 마음껏 즐겨보자고.’
호진도 왠지 모르게 흥이 돋았다.
세계가 변하고 수도 없는 강자들과 부딪치며 자신을 증명해왔다.
그것이 이번으로 마지막이라면, 더더욱 후회 없이 모든 걸 쏟아내야 할 것이다.
그럼 우선은 스탯 분배다.
지금도 비정상적으로 민첩이 높긴 하지만, 방금 상대와의 교전에서 느낀 것은 근력의 차이가 아니었다.
숙련된 기술의 섬세함과 반응 속도.
분명 민첩성에서 호진은 차이를 느꼈다.
“민첩에 3을 투자한다.”
호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몸이 한층 더 가벼워짐이 느껴졌다.
이걸로 민첩은 35.
상대의 강함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변화는 턱도 없겠지만…… 어쩔 수 없다.
가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런데 그 순간 새로운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띠링
[초감각을 익히고 있습니다]
[민첩이 일정수치에 도달했습니다.]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검술 LV.10에 검술의 묘리가 적용됩니다.]
[검술 LV.10이 초급 기(氣) 검술 LV.1로 변환됩니다.]
「스킬: 초급 기(氣) 검술 LV.1(레어): 검을 통해 기(氣)를 느끼고 다룰 수 있습니다.」
「검에 대한 이해도와 응용력이 증가합니다.」
“…….”
호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믿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검술의 묘리가 개쓰잘데기 없는 쓰레기 스킬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광신도 직업이 정말 거지에게도 못 팔아먹을 직업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다.
은신을 자유자재로 쓰는 이예은이 부럽다고 생각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주 ‘검술의 묘리’ 만만세, 최고다.
호진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꽉 움켜쥐었다.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감각이 검 자루를 타고 온몸을 내달렸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검에 힘을 내보내자 검에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이것이. 기(氣).’
호진이 검을 두른 얇은 막을 구경하고 있는 그 순간.
“크르르르륵.”
그 모습을 본 상대 역시 기쁘다는 듯 울부짖었다.
─챙
“다다무 라후투! 글로리카!”
녀석은 방패와 창을 두드리며 외치더니 호진을 향해 창을 세워 들었다.
“그래, 오래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을 거다.”
녀석을 본 호진은 검을 들어 폼탁 자세를 취했다.
큰 동작이나 스킬은 사용하지 않는다.
놈의 사정거리보다 안쪽으로 파고들어, 최대한 빠르고 가볍게 연타를 꽂아 넣어 패링할 타이밍을 빼앗아야 한다.
호진은 침착하게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먼저 선공을 가한 건 녀석이었다.
골반과 허리를 비틀며 찔러오는 창은 다시 봐도 아찔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한 공격이라 물러나며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 물러난다면 자신의 검이 녀석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활로는 뒤가 아니라 앞쪽에 있었다.
호진은 역으로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챙
불꽃이 튀며 창자루를 검으로 빗겨낸 호진은 그 즉시 검 끝을 돌려 녀석이 창을 든 손목을 노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상대의 상체는 커다란 방패 뒤로 숨어버렸고, 호진의 검은 방패의 겉을 벨 뿐이었다.
그러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둘 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금이 갔어?’
아까 전엔 흠집조차 나지 않은 황금 방패에 가느다란 균열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가볍게 휘두른 검이 스킬을 쓰고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것보다 예리하고 강한 힘을 지녔다.
그건 아까까지의 호진과 지금의 호진의 전력에 가늠하기 힘든 차이가 있다는 의미였다.
녀석은 재밌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방패를 집어던졌다.
그러곤 양손으로 창을 꼬나 쥐고 호진과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녀석은 뜬금없이 창끝을 하늘을 향하게 들어 올렸다.
‘무슨?’
견제는커녕 몸을 훤히 비우다니.
함정인 것 같지만 안 속아줄 수가 없다.
호진이 놈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녀석의 창이 벼락같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공격은 호진을 비껴 떨어졌고, 중요한 창끝은 호진의 뒤쪽에 있었다.
즉, 녀석이 유리한 사거리는 이미 지나쳤고, 이젠 곧 검이 유리한 거리다.
‘실수한 건가?’
호진은 찝찝함을 숨기고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상하지만 더 다가가기만 하면 거의 승리가 확실했다.
그 순간 녀석이 슬쩍 점프하듯이 몸을 뒤로 퉁기며 창을 빨아들이듯 당긴 후, 호진을 향해 짧게 내질렀다.
호진도 더 다가가지 못하고 창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내며 뒤로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검으로는 불가능한 창술의 비기(祕技)였다.
‘허, 창을 당기며 순간적으로 파지한 위치를 변경한 건가? 괴물이네…….’
세삼 상대의 역량에 놀란 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뒤로도 호진은 녀석에게 붙기 위해 여러 번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놈이 양손으로 창을 쓰기 시작하니 정말 현란하기 그지없는 기술들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창 자루를 짧게 잡았다, 길게 잡았다, 창끝을 들었다가, 내렸다가 도저히 거리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또한 간신히 거리를 좁힌다 해도 창의 자루와 창날이 상하좌우 가리지 않고 번갈아가며 폭풍같이 휘몰아치니 계속 붙어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창은 긴 만큼 연타가 어렵고, 사거리를 좁히면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오산이었다.
“저런 미친 사기 무기를 봤나.”
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미로 배울 때까지다.
창을 상대해보니 실전에서도 좋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못하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창이나 배울 걸 그랬다.
하다못해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또 모를까.
직업 특성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개쓰레기 같은 직업.’
호진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검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이제 끝났다.
창 자루에 맞아 여기저기 멍이 들고, 베인 종아리에서는 피가 멈출 새 없이 흘러내렸지만.
출혈내성이라는 스킬이 생길 정도로 몸 이것 저곳에서 피를 쏟아냈지만.
그것을 모두 인내하며 호진은 녀석의 움직임을 읽는 데 몰두했다.
이제 슬슬 녀석의 패턴과 거리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더 시간을 끌면 체력적으로도 무리지만, 검에 두른 기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에 호진은 승부수를 띄워야 하는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호진이 놈의 상체를 노리고 달려들자, 녀석은 주저앉듯이 무릎을 굽히고 창을 휘릭 돌려 창날을 뒤로한 채 창대의 끝으로 호진을 찔러왔다.
결국 호진의 공격은 허공을 가르고 놈의 창대 끝이 호진의 갈빗대를 찔렀다.
“크헉.”
금이라도 간 건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설마 눈치챈 건가?’
그렇다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
순간 녀석이 다시 창을 돌려 날카로운 창날을 뻗어왔다.
다행이다.
녀석은 눈치채지 못했다.
호진은 고통을 잘근잘근 씹어 삼킨 뒤, 녀석이 내지른 창의 밑동을 간신히 쳐서 흘렸다.
그러곤 가볍게 도약해 놈의 머리를 향해 ‘투구 가르기’를 사용했다.
창을 회수해 프라임(Prime), 즉 상단을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던 녀석은 여유롭게 호진의 내려치기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호진의 검은 창에 가로막히지 않았다.
장작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방에 비산하는 황금색 창의 파편.
호진이 휘두른 검은 녀석이 들고 있는 창의 밑동을 부수며 오른쪽 어깨를 길게 베어냈다.
잠시 덜렁이던 팔은 몸에서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호진의 얼굴에 녀석의 푸른 피가 튀었다.
“크르륵.”
녀석이 비틀거리며 부러진 창대를 쥐고 뒤로 물러났다.
호진은 그런 녀석을 보며 미소 지었다.
검이 녀석의 방패에 통할 때부터 생각했던 전법.
그것은 바로 무기 파괴였다.
녀석에서 수도 없이 맞아가며 창의 밑동을 티 안 나게 반복 타격한 결과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그곳을 계속해서 노린 호진만이 눈치챌 만한 작은 균열.
하지만 그것이 호진에게는 신호였다.
호진은 균열을 본 순간 곧장 녀석에게 ‘투구가르기’를 사용했다.
공격을 실패하면 위험하기에 자제했던 스킬이지만, 상대의 무기를 파괴할 수 있다면 반격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
비틀거리던 녀석은 잘린 창대를 집어던지더니 손톱을 세우고는 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진은 몸에 남은 기운을 짜내어 검에 기를 담아 목엽참(木葉斬)을 휘둘렀다.
검이 녀석이 입은 갑옷째 몸을 가르고 허공에 푸른 피를 뿌렸다.
─철커덕
녀석의 잘린 머리가 황금색 투구를 뒤집어쓴 채 바닥을 굴렀다.
─띠링
[아훅 쉬툭 남부의 리자드맨 치프를 쓰러트렸습니다.]
[리자드맨들의 사원의 적대세력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호수를 기는 여신’이 당신을 적대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됩니다.]
호진은 녀석의 머리를 주워들고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이제 전쟁을 끝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