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농장 탈환 (3)
‘호수를 기는 여신?’
예상치 못한 알림에 호진은 당황했다.
설마, ‘이어붙인 왕’과 같은 존재가 또 있는 걸까.
신도들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그보다 강력한 존재일 수도 있다.
“흐음.”
호진은 잠시 침음을 흘렸으나 결국 신전의 내부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뒤쪽에서는 전투가 한창일 터.
후퇴에는 막심한 손해가 요구될 것이다.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이었다.
호진은 어두운 신전의 내부를 조심스레 걸어 나갔다.
빛 한 점 들지 않았지만 사냥꾼의 눈은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줬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얼마나 걸었을까.
안쪽에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수백 명은 족히 들어갈 만큼 거대한 석실.
그리고 정면에는 제단으로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다.
“역시 신전인가.”
호진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데, 사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밖으로 이어지는 길을 제외한 석실에는 4개의 입구가 나 있었는데, 그 모든 입구에서 붉은 빛이 일렁였다.
─둥 둥 둥 둥
그와 동시에 신전 안에는 가죽 북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소리와 빛은 점점 가까워지고 이내 템플 가드(Temple Guard)들이 그 모습들을 드러냈다.
의외로 생김새는 문 앞을 지키던 보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흉터들이 몸을 뒤덮고 있었고 붉은색의 투구들을 쓰고 있었다.
한 손에는 붉은색 안료가 칠해진 뼈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방패의 테두리에는 황금색이 칠해져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사람만 한 클럽(Club)을 들고 있었는데, 방패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짐승의 뼈로 만들어진 듯했다.
클럽에는 날카로운 가시 같은 뼈들이 세워져 있어, 사실 클럽보다는 철퇴와 톱을 섞어놓은 모양새였다.
입구들에서 쏟아져 나온 녀석들은 대략 100여 명.
호진은 우선 가만히 서서 녀석들과 대치했다.
격노했다는 알림창과는 달리, 그들은 밖의 괴물들처럼 소리를 내지르거나 침을 질질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제식에 따른 군인과도 같은 절제된 움직임을 보여줬다.
호진을 앞에 두고 방진을 짠 템플 가드들.
개중 눈가에 커다란 상처가 있는 템플 가드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텟─ 킬라카!”
─쿵 쿵 쿵 쿵
녀석이 울부짖자 뒤에 도열한 가드들이 일제히 발을 굴렀다.
북소리에 맞춰 울리는 그들의 발소리에서 커다란 위압감이 느껴졌다.
“몰─즙 에라─코!”
─쿵 쿵 쿵 쿵
녀석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자 한층 더 발을 구르는 소리가 커졌다.
이제는 신전 전체가 작게 진동했다.
─띠링
[정신 내성이 ‘위압’에 저항합니다.]
‘위압?’
고작 발 좀 굴렀다고 정신 내성 스킬이 발동했다.
다행히 스킬 덕분인지, 긴장으로 굳어가던 근육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자칫하면 상태 이상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호진을 템플 가드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수가 막혔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설마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말아주라.’
녀석들은 그냥 발을 굴렀을 뿐인데, 저 혼자 쫄아서 스킬이 발동된 거라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
“다다무 라후투! 글로리카!”
─척 철컥
전면에 선 녀석이 무언가 외치며 무기를 크게 휘두르자 녀석들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붉은 커다란 원형 방패를 가슴께까지 들어 올린 녀석들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히네.’
안 그래도 사방이 막힌 밀실에서 저 인원이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온다는 사실만으로 뒷걸음질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뒤에선 일행들이 전투 중이다.
자신이 물러난다면 그 몫은 일행들이 감당해야 하고,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일행은 분명 전멸할 것이다.
우선 호진은 무기를 교체했다.
적이 방패로 무장한 만큼 그에 적합한 무기를 꺼내들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는 실패한 적이 없는 조합.
투핸디드 소드와 ‘투구 가르기’다.
천천히 공격의 수위를 높여도 좋지만 우선은 기선제압이 먼저다.
몸을 퉁긴 호진은 순식간에 템플 가드들 앞으로 이동해서 검을 휘둘렀다.
벼락같은 일격을 받아낸 템플 가드는 무릎이 부서져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러곤 속이 진탕이 된 건지 입에서 붉은색의 피거품을 쏟아내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검을 휘두른 호진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민첩 스탯이 놈들보다 한참 앞서기에 가능한 전법이었다.
일방적인 교전에 신전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들려오던 북소리도 뚝 끊겼고, 녀석들의 움직임도 경직된 게 눈에 보였다.
호진이 이 정도로 강할지는 예상 못 했던 듯하다.
하지만 정작 호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것만으론 안 되겠네.’
방금 교전에서 템플 가드의 방패는 금만 갔을 뿐 부서지진 않았다.
즉, 자신이 가진 강력한 일격으로도 놈들을 정면에서 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투구 가르기’도 언제까지 쓸 수는 없다.
10번도 반복하기 전에 적들에게 둘러싸일 것이고, 동작에 빈틈이 많은 ‘투구 가르기’를 그 상황에서 썼다가는 다진 고기가 되고 말 것이다.
목표는 난전이다.
어떻게든 저 단단한 방패 벽을 무너트려야 활로가 트인다.
호진의 눈이 바삐 위아래로 움직이며 방법을 찾을 때.
문뜩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네모꼴의 타일들.
‘될까?’
호진은 자문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우선 해보는 거다.
호진은 이번에도 순식간에 가드들을 향해 접근했다.
이번엔 아까와는 다르게 호진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순간, 놈들은 전진을 멈추고 방진을 굳혔다.
앞 열이 방패를 몸에 딱 붙이고 서자, 뒤의 녀석들이 딱 붙어 등을 받쳤다.
충격을 분산할 셈이다.
‘허!’
놈들의 코앞까지 다가간 호진은 어이가 없어서 숨을 들이켰다.
‘벌써 대처법을 찾다니.’
역시 방진을 깨는 것이 먼저였다.
호진은 들어 올린 검을 크게 휘둘러 내리꽂았다.
─쾅
충격에 대비했던 템플 가드들은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였다.
호진이 검을 놈들의 방패가 아닌, 바닥에 내리꽂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사방에는 돌가루와 먼지가 피어올랐고, 놈들은 잠시 호진의 움직임을 놓쳤다.
그때.
─기우뚱
땅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충격에 대비하던 가드들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떠오른 그들의 눈에 비친 건, 뒤집어진 거대한 네모꼴의 타일과 자신들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 호진이었다.
호진이 전열을 무너트린 방법은 간단했다.
놈들이 서 있는 바닥 자체를 뒤집어엎는 것.
호진은 바닥에 깔린 거대한 타일을 보고 가능성을 보았다.
놈들을 공격하는 척 다가간 호진은 검을 타일의 틈새에 꽂은 후,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타일을 들어 올렸다.
지렛대와 지지할 곳을 준다면 지구를 들어 올리겠다던 아르키메데스의 말이 와 닿는 순간이었다.
물론 타일이 평범하게 돌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면, 아무리 지렛대를 사용한다 한들 바닥을 뒤엎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들은 나무 톱밥과 진흙을 구워 만들어 낸 듯한 타일을 사용했고, 유달리 가벼운 무게 덕분에 타일을 뒤집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게 되네.”
정작 성공시킨 호진도 공중에 붕 뜬 템플 가드들을 보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녀석들은 재빨리 몸을 돌려 새롭게 방진을 짜려 했지만, 급조된 방진으로는 호진을 막아설 수 없었다.
바닥을 뒤집을 때 사용한 투핸디드 소드는 내버려 둔 채, 성검을 꺼내 든 호진은 적들의 진형을 종횡무진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놈들의 방패와 클럽이 쏟아졌지만 호진은 그 모든 것을 피하거나 흘려내며 공격을 이어갔다.
가끔 실수로 막지 못한 공격에 몸에 상처가 나고 피가 흘렀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연타. 연타. 연타.
먹이의 급소를 물어뜯는 맹수처럼, 한번 드러낸 녀석들의 약점을 호진은 집요하게 물어뜯었다.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여러 번 시도하던 녀석들도 끝내 포기하고 호진의 의도대로 난전으로 돌입했다.
원하던 난전으로 끌고 간 호진이었지만, 그렇다고 놈들과의 전투가 결코 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녀석들도 난전이 되자 자신들이 쌓아 올린 기량을 발휘하며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의 공격 하나하나가 위협적이고 치명적이었다.
비슷하지만 각각 개성이 담겨있었고, 그것을 일일이 상대하기란 꽤 벅찬 일이었다.
─푸욱
호진은 마지막 남은 눈가에 상처가 나 있던 녀석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으며 생각했다.
녀석들은 비록 인육을 먹는 괴물들이었지만, 숙련된 전사이자 정병(精兵)들이었다.
“수고했다. 이제 그만 죽어라.”
호진은 검에 박힌 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며 손톱을 휘두르던 템플 가드를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심장에 박혔던 검이 뽑혀 나오자 푸른 피가 공중에 비산하며 놈이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동시에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검술 LV9 → 검술 LV10」
“이건 또 반갑네.”
옅게 웃으며 상태 창을 확인하려던 찰나, 뭔가 알 수 없는 감각에 호진은 바닥을 굴렀다.
순간 서늘한 바람이 머리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휘리릭 쾅!
날아온 거대한 도끼가 호진이 서 있던 곳을 지나쳐 신전의 벽에 박혔다.
완전히 산산조각 난 벽은 우르르 무너져 내릴 정도였다.
─저벅저벅
어둠 속에서 노란 안광이 번뜩인다.
황금색의 방패.
황금색의 창.
황금색의 갑옷.
온몸이 빛나는 리자드맨 하나가 시체들을 밟으며 호진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아훅 쉬툭─칠라 치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상체를 가볍게 숙였다.
‘인사인가?’
약간 얼떨떨했지만, 안 받아줄 이유는 없다.
호진 역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호진이다.”
호진의 인사를 들은 녀석은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 후 창을 들어 올렸다.
“다다무 라후투! 글로리카!”
“뭐라는지 모르겠지만 와라. 최선을 다해 죽여주마.”
호진은 떨어진 투핸디드 소드를 집어 들었다.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상대였다.
스킬이나 전력을 아낄 여유는 없었다.
─콰짓
호진이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발아래 타일에 쩍 하니 금이 갔다.
그리고 저 앞에 있던 녀석의 앞까지 순식간에 이동해 검을 휘둘렀다.
‘투구 가르기.’
호진이 힘차게 검을 휘두르는 순간,
─깡!
황금 갑옷을 두른 리자드맨이 노란 안광을 번뜩이더니 방패를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타격점에 도달하기 직전 방패와 부딪치며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패링(Parrying)!’
호진은 놀라기도 잠시, 이를 꽉 물었다.
무방비해진 호진을 향해 놈이 창을 뻗어왔기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개미굴 때도, 쇼핑몰의 고블린 챔피언 때도, 김포 아파트 방어전 때도 죽을 뻔했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죽음에 근접한 순간이라고.
그래서일까.
몸이 긴장을 한 탓인지, 아니면 이게 주마등이라는 건지.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흘렀다.
‘내가 죽는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생각해보면 허무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호진은 최선의 공격을 했고, 상대는 그것을 손쉽게 파훼했다.
아주 단순한 이치였다.
즉, 상대는 명백한 강자 중의 강자라는 것이다.
결국 빠르고 늦을 뿐, 호진의 패배는 전투와 동시에 정해진 수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걸로 끝인가?’
그런 의문이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죽는다고 해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싸움을, 전투를, 투쟁을 대하는 자세였다.
순식간에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 얼마든지 와라.’
지저분하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