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농장 탈환 (2)
리자드맨들의 진영에서 떨어진 인근 마을.
“허, 허억…… 헉.”
좁은 골목길을 한 소년이 달리고 있었다.
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얼굴과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소년은 입에서 단내가 났고 앞이 노랗게 보였다.
살면서 이렇게 달려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두 발은 멈추지 않는다.
소년은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발을 놀렸다.
‘뛰어.’
도망치던 중 다리가 접질린 엄마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
그 말이 자꾸 소년의 머릿속에 반복해서 들려오는 듯했다.
머뭇거리다 한 번 달리기 시작한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죄책감이 순식간에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죄책감을, 잡념을 잊기 위해서라도 소년은 쉴 새 없이 뛰었다.
이제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 얼마나 달린 걸까.
그리고 얼마나 달려야 하는 걸까.
소년은 떠오르는 의문들을 집어삼키며 천근처럼 무거운 발을 옮겼다.
‘뛰어.’
소년은 엄마의 마지막 말을 되뇐다.
‘뛰어, 뛰어, 뛰…….’
그런 소년에게 문득 거친 쇳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케륵.”
소년이 비척이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샛노랗고 쭉 찢어진 동공을 지닌 괴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인 괴물들이다.
“아…… 아아.”
소년은 그럼에도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미 말을 듣지 않은지 오래인 몸은 관성처럼 괴물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케르르르르륵!”
비틀거리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년이 웃긴 것인지 괴물은 가늘고 길게 조소를 터트렸다.
자신의 발버둥도, 엄마의 희생도 모두 의미가 없었다.
보상받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소년의 뺨에는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괴물은 실컷 웃었는지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끝이다.
소년이 허망하게 다가오는 손을 보고 있던 그 순간.
─콰득 우드드득
돌연 커다란 손이 괴물의 뒷목을 움켜쥐더니 머리를 척추째 몸에서 뽑아냈다.
사방에 흩뿌려진 차갑게 식은 괴물의 푸른 피.
그 피를 맞은 소년은 그 비현실적인 장면에 그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도마뱀의 목을 뽑아낸 것은 다름 아닌 사람 형체의 거대한 석상이었다.
소년이 멍하니 있자 석상은 소년에게 다가가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동시에 어디선가 나타난 드론이 소년의 머리를 툭 치더니 천천히 어디론가 움직였다.
소년이 멀뚱히 서있자 드론은 다시 다가와 소년의 머리를 친다.
명백히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한순간 모든 걸 포기했었기 때문일까.
소년은 이상하게도 그 드론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어졌다.
미심쩍었지만 지금 소년은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도저히 살기위해 무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소년이 드론을 따라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자신을 구해준 석상은 다시 묵묵히 마을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소년은 왠지 모르겠지만 석상이 걱정되어 자꾸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얼마나 멀어졌을까.
이제 골렘이 손가락만 하게 보일 때쯤.
─뿌우우우우
익숙한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의 마을을 습격한 괴물들이 들고 다니는 뿔나팔이다.
저것을 부르며 녀석들이 한곳으로 모여든다.
목표는 자신을 구해준 석상이 분명했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구해준 석상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길을 안내하던 드론이 그 앞을 단호히 가로막았다.
그제야 소년은 자신이 석상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려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자신은 석상을 구해야 할 이유도, 힘도 없는데 어째서 달려가려 했을까.
소년은 멍하니 자리에 서서 모여드는 괴물들과 괴물들에 맞서 싸우는 석상을 지켜보았다.
한 놈.
두 놈.
괴물들의 머리를 분쇄하던 석상은 어느 순간 점점 괴물들에게 둘러싸이고 그 움직임이 느려졌다.
석상을 후려치는 도끼와 석상의 관절을 파고드는 괴물들의 발톱.
얼마 안 가 팔이 뜯겨나가고, 무릎이 무너져 내렸다.
끝내는 머리를 지탱하던 뒷목이 뜯겨나가고, 괴물들은 뽑아낸 골렘의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년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자신도 저 석상과 같이 죽고 싶다는 것을.
엄마를 버리고 도망치느니 저 석상처럼 싸우다 죽어야 했다는 것을.
하지만 소년은 비겁하게 살아남았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못 견딜 만큼 치밀어 올랐다.
소년은 망연하게 서서 무너져 내린 석상의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
한 무리의 리자드맨들이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어디선가 뿔나팔 소리가 들려오고, 리자드맨들은 한 마리도 빠짐없이 그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잘했어. 스미스.”
─끄덕
스미스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호진은 몸을 일으키며 조용히 명령했다.
“빠르게 올라타자.”
호진의 일행과 스미스를 포함한 10마리의 골렘들은 재빨리 움직여 수레에 실린 시체들을 일부 빼내고 방수포아래 몸을 숨겼다.
이것이 계획의 1단계였다.
성동격서.
의미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원리는 비슷하다.
호진은 수레에 숨어들기 위해 골렘 한 기를 희생시켰다.
골렘이 녀석들의 시선을 끈 동안 수레에 숨어든 것이다.
‘시작부터 전력을 잃고 시작하는 건 아쉽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의 포석이 놈들을 무너트릴 한 수가 될 것이다.
잠시 후.
“케르륵.”
놈들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방수포 아래에서 밖을 살짝 엿보자 리자드맨 여럿이 부서진 골렘 머리를 끌고 오고 있었다.
일종의 전리품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희생시킨 골렘에 대한 미안함이 올라왔다.
호연의 말로는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라고 하지만 인간의 형상을 한 탓일까.
그저 돌덩이만으로 보기만은 어려웠다.
호진이 심란해하고 있는데, 우르르 몰려온 리자드맨들이 골렘의 머리를 수레에 싣고는 곧장 수레를 출발시켰다.
리자드맨들이 신난 듯 케륵거리는 모습을 보니, 어서 돌아가 자신들의 무용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덜컹
수레가 출발하자 일행들은 그저 방수포 아래에서 숨죽일 뿐이었다.
덜컹이는 수레 안.
그 흔들림에 맞춰 가득 실린 사람들의 시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몸에 닿았다.
차갑고 고무 같은 질감.
그 느낌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렇다고 시체를 피할 만큼 여유로운 공간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툭
뭔가가 어깨에 와 부딪혔다.
무심코 돌아보니 피에 젖은 여인의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생기가 사라진 두 눈은 감기지도 못한 채 떠져있다.
눈을 감지 못할 정도로 억울했던 걸까.
두려웠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가 걱정됐던 걸까.
호진은 손을 뻗어 여인의 눈을 살며시 감겨주었다.
***
해가 내리쬐는 정오.
방수포 안까지 뜨듯한 열기가 전해져왔다.
가을이라지만 아직까지 낮에는 제법 따사로웠다.
─스륵
호진은 슬며시 방수포를 젖히고 주변을 살폈다.
새벽에 봤을 때와는 달리 확연하게 진영 안에 활기가 줄어들었다.
보초를 서는 녀석들 역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고 몇몇은 아예 꾸벅꾸벅 졸고 있다.
햇볕에 서있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든 만큼 졸린 모양이다.
‘생긴 게 도마뱀인 만큼 외부의 온도에 의해 체온이 변하는 건가.’
파충류는 변온동물인지라 외부의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생긴 것만큼이나 파충류의 특성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놈들의 경계가 허술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끄덕
호진이 수레 안으로 고개를 돌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시체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일행들이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미리 잘라놓은 방수포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호진과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채는 적은 없었다.
경비들이 내부가 아닌 밖을 경계하고 있는 탓이다.
하나. 둘.
수레에서 내려온 일행들은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몸을 숙이고 수레를 엄폐물 삼아 천천히 이동하던 그때.
“케륵?”
호진은 다른 수레의 짐을 정리 중이던 리자드맨과 눈이 마주쳤다.
칼자루를 곧바로 움켜쥐었지만, 그보다 먼저 날아간 화살이 놈의 눈을 꿰뚫었다.
비틀거리던 녀석이 수레 아래로 떨어지자 스미스가 녀석을 부드럽게 받아냈다.
훌륭한 반응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소리는 발생했기에 호진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멀리서 이쪽을 쳐다보는 리자드맨 보초가 눈에 들어왔다.
─움찔
호진은 가만히 움직임을 멈춘 채 그 리자드맨의 시선을 가만히 받아내었다.
“……?”
고개를 갸웃거리던 녀석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향했다.
‘후우.’
호진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움직임을 멈춘 이유는 간단했다.
놈들의 시력이 극히 나빴기 때문이다.
이는 호연의 집에서 리자드맨의 진지까지 오는 길에 마주친 리자드맨을 상대하면서 얻은 정보였는데, 놈들은 후각이 민감하게 발달한 대신, 시력 자체는 뭔가가 움직이는 정도밖에 구분하지 못했다.
도마뱀의 시력이 나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쩌면 녀석들도 그런 특성을 그대로 닮았는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녀석들은 몸에 시체 냄새가 잔뜩 밴 일행들이 동료인지, 습격자인지 아니면 그냥 식량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호진이 재차 손짓하자 일행들은 천천히 이동을 재개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도착한 신전의 입구에는 4명의 보초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에 비해 훨씬 덩치가 크고 근육질인 녀석들이다.
아니, 애초에 다른 녀석들이 도마뱀을 닮았다면 이 녀석들은 걸어 다니는 바다악어를 닮아있다.
호진은 일행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방법은 없다.
어떻게든 신전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농성을 펼쳐야 한다.
그리고 나선 신전 안에 있을 적들의 우두머리를 제거할 것이다.
놈들이 제식 군대와 사회체계를 갖춘 만큼 우두머리가 가지는 역할은 클 것으로 예상된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전쟁에서 적장의 죽음은 곧 전쟁의 승리를 의미해왔다.
가능하다면 우두머리를 제거함으로써 승기를 가져오는 것이 호진의 목표였다.
지금 그 목표가 코앞이었다.
호진이 빠르게 신호하자 일행들이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놈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크르르르르륵!”
신전의 앞은 탁 트여있었기에, 놈들은 달려오는 일행들을 손쉽게 눈치챘다.
놈들이 낮게 울부짖자 주변을 순찰 중이던 리자드맨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진다.
이제는 속도전이다.
“쏴!”
더 이상 소리를 죽이지 않고 호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화살 하나가 바람을 찢으며 신전 앞을 지키던 보초 중 하나의 눈을 꿰뚫었다.
작지만 빠르고 강력한 관통력을 가진 예은의 새로운 장비.
흔히 ‘편전(片箭)’이라고도 부르는 애기살이었다.
활의 위력을 높이고 싶다던 예은의 부탁에 호연이 뚝딱 만들어 준 물건이었는데, 예은은 처음 쓰는 장비임에도 곧잘 사용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한 녀석이 손쉽게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지 않은 채 서로 간의 간격을 좁혀 신전의 입구를 가로막았다.
역시 정예가 분명하다.
일행 중 가장 먼저 도착한 호진은 검도 뽑지 않은 채 녀석의 무기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크륵!”
크게 휘둘러지는 거대한 도끼.
호진은 몸을 퉁기듯 도끼를 아슬아슬한 각도로 피해내고, 동시에 거합을 사용.
비틀어 틀어쥔 검을 빛살처럼 출수했다.
─서걱
뻗어나간 검로에 따라 보초의 목에는 푸른 선이 그어졌다.
이윽고 선을 따라 놈의 육신이 스르륵 무너져 내리며 사방에 푸른 피를 쏟아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스미스는 한 녀석의 머리를 신전에 박아 넣은 채, 쉴 새 없이 주먹을 꽂아 넣고 있었다.
반면, 용재는 일합에 녀석을 쓰러트리지 못했는지, 꽤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도와줄까.’
호진은 검을 뻗으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조금 고생한다고 바로 도와줬다가는 호진과 용재의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말 것이다.
지금은 용재를 믿어줄 필요가 있다.
호진은 고개를 돌려 신전을 향해 달려오는 예은과 시선을 나눴다.
말은 없었지만 예은은 호진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예은이 손을 빌려줄 것이다.
“신전 앞을 부탁한다. 스미스.”
호진의 말에 보초를 형태도 알아보기 힘들게 다져놓던 스미스가 알았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쉽게 말해 오케이 사인을 했다는 말이다.
호진은 몸을 돌려 신전 내부로 향했다.
안쪽만 정리한다면 신전의 입구를 지키며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전쟁은 방금 시작했지만 호진이 보기엔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호진의 귓가에 새로운 알림음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띠링
[리자드맨들의 사원에 침입했습니다. ‘호수를 기는 여신’이 분노합니다.]
[템플 가드(Temple Guard)들이 격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