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농장 탈환 (1)
물안개가 옅게 깔린 이른 아침.
호진 일행은 스미스를 비롯한 열한 대의 골렘과 함께 두꺼운 철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목표는 이틀 전 호연과 이야기를 나눴던 생명공학 장비들과, 개조 종자들이 있다는 호연의 4번째 집 탈환이다.
호연의 집에서 쉰 것은 도착한 당일과 그 다음날 하루뿐.
골렘의 완성이 예상보다 일러 곧바로 탈환 작전에 참가해야 했다.
‘그래도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함 없는 컨디션이네.’
호진이 가볍게 목을 풀며 푹 쉬었던 어제를 떠올렸다.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맛있는 걸 마음껏 먹었으며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일행들과 농담이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꽃피우기도 했고, 오후에는 심심해서 스미스를 붙잡고 대련을 했다.
‘강했지, 스미스.’
호진은 앞서가는 스미스의 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미스는 자신보다 느린 상대에게 매우 강한 스타일이었다.
우선 신체 스펙이 우월했다.
호진보다는 느렸지만 충분히 빨랐고, 힘만큼은 호진보다도 좋았다.
무엇보다 그 외골격의 단단함은 정상이 아니었다.
강도만 따지자면 ‘이어붙인 왕’의 몸을 덮었던 검은색의 점액질과 비슷한 정도.
덕분에 대련 중 ‘투구가르기’의 레벨이 하나 올랐던 건 예상치 못한 수확이긴 했다.
반면 그 외의 골렘들은 스미스와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부족했다.
그래도 그 단단함만큼은 스미스와 다를 바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서 걷다 보면 벙커 안에 있는 것 같은 든든한 느낌이 들긴 했다.
“형, 그래서 우리 상대가 누구라고?”
용재가 갸웃하며 묻자 호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듣기로는 무슨 도마뱀 비슷한 거라던데.”
“도마뱀? 쉽겠네.”
용재가 코웃음을 치자 호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힘들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도 그렇군요.”
예은 역시 싸늘해진 표정으로 용재를 노려봤다.
“내가 뭘?”
“뭐랄까. 항상 네가 말하는 반대로 일이 일어나니까.”
“둘 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상한 데에서 이성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네. 징크스나 뭐 그런 것도 미신인 거 알지?”
용재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빠득
예은과 호진의 입에서 동시에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재에게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듣다니.’
따지고 보면 미신보다는 통계가 아닐까 싶다.
용재가 낮은 통찰력으로 자주 오답을 내놓았기에 주변에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닐까.
호진이 용재에게 자신이 세운 이론을 열심히 설명하자 용재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왜 갑자기 열을 올려……. 형 조금 찐 같아.”
─아득
이번엔 약간 입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예은이 호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시선을 보냈다.
만약 예은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서 용재의 뒤통수를 후려쳤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빡세기만 해봐, 넌 뒈졌다.’
호진은 이제 내심 이번 일이 빡세길 바라며 화를 삭였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앞장서던 스미스가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드론이 적을 포착한 모양이다.
스미스와 연동된 드론들은 실시간으로 주변의 정보를 스미스에게 전달한다고 했다.
몸을 낮추고 느린 보폭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스미스.
일행도 동일한 동작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아가길 5분여가 지나자 스미스가 돌담 뒤에서 일행들을 향해 조용히 손짓했다.
천천히 다가가 돌담 너머를 살피자 두 생명체가 눈에 들어왔다.
울퉁불퉁하고 푸르스름한 비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한 손에 쥔 나무 클럽까지.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리자드맨의 모습이었다.
형에게 이야기로만 들었던 적의 실체를 본 호진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형은 다른 건 설명충이면서 이런 건 왜 말 안 해주는 거야.’
저게 어딜 봐서 도마뱀이란 말인가.
예전부터 그랬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는 죽으라고 떠들면서 꼭 필요한 정보는 안 알려주는 인간.
두 발로 걸어 다닌다든가 무기를 들고 있다든가 특징적인 부분이 차고 넘치는데 이걸 설명 안 해주다니.
미리 언질을 들었다면 이것저것 대응법을 고민해 보고 실험해 봤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호진은 한숨을 옅게 내뱉은 후, 검을 뽑으며 예은에게 신호했다.
그 즉시 예은이 화살을 노킹했다.
호진이 놈들을 향해 쇄도하는 순간, 화살도 동시에 시위를 떠나 호진의 옆을 스쳤다.
화살이 한 녀석의 눈을 꿰뚫고, 다른 녀석이 흠칫 놀라 돌아봤지만 빠른 속도로 달려온 호진의 검이 이미 목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서걱
검이 녀석의 목을 가르자 놈의 목에서 푸른 피가 울컥 쏟아졌다.
결과적으로 거의 동시에 두 녀석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소리조차 나지 않은 교전이었다.
‘흠.’
생각보다 푸른색의 비늘이 질기다.
하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점이 없다.
기습이 성공적이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놈들은 강한 편은 아니었다.
“봐봐. 쉬울 것 같다고 했잖아.”
어느새 다가온 용재가 여유롭게 웃으며 호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무리 없이 4번째 집을 탈환할 수 있을 듯하다.
“스미스. 집까지 얼마나 남았어?”
호진의 물음에 스미스는 손가락을 펴 보였다.
“8분?”
끄덕끄덕.
거리인지 시간인지 애매했는데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탈환만 한다면 지속적인 관리도 어렵지 않을 듯했다.
“빨리 해치우자.”
호진의 말을 들은 스미스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이런 X발.”
호진은 정말 오랜만에 욕을 뇌까렸다.
놀람, 화남, 당황스러움 등의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그 기분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호진은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호연의 4번째 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집 바로 옆에는 돌로 쌓아 올린 이상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저런 게 있다고 호연이 말해준 적은 없으니, 일주일 만에 생겨났을 것이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어떻게 저런 걸 쌓아 올렸는지 의문일 정도의,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
가본 적은 없지만 앙코르와트가 저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아직 건축 중인 건지 수십의 리자드맨들이 건물에 달라붙어 조각을 하고 있었다.
그 건물 주변으로는 수십 개의 거대한 텐트들이 쳐져 있고, 놈들은 실시간으로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 넘기며 진지를 확장하고 있었다.
잘못 말한 게 아니다.
저건 진지다.
창과 방패를 든 수십의 리자드맨들이 눈을 번뜩이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호연의 집과 이어진 가도를 따라서 스테고사우루스처럼 생긴 거대한 짐승들이 물자를 운송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는 듯 벨로키랍토르 즉, 랩터 같이 생긴 탈것을 탄 리자드맨 기수들이 물자 주위를 오갔다.
언뜻 봐도 수백에 이르는 녀석들은 분명한 체계를 갖춘 군대였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사냥이라 생각했는데, 전쟁을 하게 생긴 작금의 상황에 호진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물론 이틀 전에도 수백이 넘는 회색 짐승들과 치고받았지만, 제식화된 군대와 싸운다는 건 뭔가 느낌이 달랐다.
‘가능성은…… 있어.’
공룡 같은 녀석들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리자드맨 자체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이곳에 오기까지 여러 마리를 죽여 봤지만, 놈들의 반응속도나 힘은 그냥 무난했다.
용재도 쉽게 싸워 이길 수준이라고 할까.
놈들의 힘으로는 골렘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조차 버거울 터였다.
호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싸울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
문제는 지금 물러났다가는 놈들의 세력이 훨씬 커질 것 같다는 점이었다.
놈들은 고작 일주일 만에 이만큼이나 세력을 키웠다.
더 시간을 줬다가는 아예 요새가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애초에 지금 머무는 곳과 이곳은 그리 멀지 않다.
만약 싸울 거라면 지금 뿌리 뽑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확실히 문명이 느껴지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호진은 망설임을 느꼈다.
‘대화가 통할지는 모르지만…… 시도는 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의외로 평범하게 종자들과 도구들을 받아내고, 불가침 조약을 맺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호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들이 먼저 호연을 공격했다.
그리고 자신도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정찰병으로 보이던 리자드맨을 여럿 죽인 상태.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싸운다.’
호진은 결정을 내리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민하던 호진은 문득, 스테고사우루스 같은 짐승들이 실어 나르는 수레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뭘 저렇게 실어 나르는 걸까.
잠시 지켜보다 보니 진영으로 들어온 수레는 크게 3종류로 나뉘어 분류됐다.
건축 자재로 보이는 돌과 나무가 담긴 수레.
고철들이 담긴 수레.
마지막은 어디서 구했는지 소나 돼지로 보이는 고기와 각종 채소가 담긴 수레였다.
‘별건 없…….’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새로운 수레 하나가 진영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서 구한 건지 파란 방수포가 덮인 거대한 수레.
웬만한 트럭보다 커다란 수레에서는 방수포를 타고 새빨간 피들이 흘러내려 흙바닥에 후드득 떨어지며 가도를 붉게 적셨다.
곧 수레는 식자재가 모여 있는 곳에 가더니 멈춰 섰다.
몇 놈이 수레 위로 뛰어 올라가더니 방수포를 묶어놨던 줄을 풀고는 방수포를 열어젖혔다.
“윽.”
일순 드러난 장면에 시력이 좋은 예은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렇게나 던져 쌓아 올린 시체더미가 있었다.
쌓아올린 시체들은 모두 목에 구멍이 뚫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피를 빼낸 거다.
바닥에 피를 아무렇게나 흘리는 걸 보면 피가 필요한 건 아닐 터.
놈들은 핏기를 제거한 몸을 원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식인.’
호진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애초부터 놈들과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호진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눌러 담았다.
지금 감정적으로 녀석들을 상대해선 안 된다.
지금은 전략이 필요하다.
렙터를 탄 기수들부터 스테고사우로스를 닮은 짐승들까지.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아직 놈들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소수의 정예가 다수의 병력과 싸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게릴라다.
피해를 주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상대의 전력을 깎아내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수성전을 비롯한 수비전이다.
게릴라와는 달리 상대가 공격하지 않으면 피해를 줄 수 없지만, 공격을 유도할 수만 있다면 적에게 큰 피해를 강요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두 가지 모두 사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게릴라를 펼치기엔 적에게 기동성이 높은 기수들이 있다.
그렇다고 놈들에게 공성전을 강요하기엔 마땅한 지형지물이 없고, 무엇보다 놈들이 목숨 걸고 달려들게 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뻐꾸기가 될 거야.”
“뻐꾸기?”
예은은 대충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용재와 스미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전은 간단해…….”
호진은 나지막하게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