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해우 (5)
“여기야.”
─덜컹
스피커 속 호연의 말과 동시에 철로 만들어진 펜스의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땅속 깊이 두꺼운 기둥이 박힌 펜스는 흡사 동물원에 있는 맹수 울타리 같았다.
높이 또한 4~5m에 끝에는 철조망까지 둘렀다.
“무슨 군부대 같네.”
“그러게. 저기 건물 좀 봐.”
용재가 중얼거리자 예은도 그 말에 동의했다.
두툼한 철문을 지나자 나타난 하얀 외벽의 건물은 집이라기보단 연구소 혹은 교도소 같은 모양새였다.
건물의 크기는 상당한 반면, 창문들은 수가 적고 크기도 작았다.
단단해 보이는 잿빛의 외벽은 그냥 봐도 단순한 벽돌로 쌓아 올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진이 형, 도대체 형님은 뭐하시는 분이셔?”
“……과학자?”
“과학자는 돈을 많이 버나? 아니, 그보다 평소에도 적이 많으셔?”
“음, 예전엔 그랬지.”
호진은 한때 형은 물론 자신에게까지 보디가드가 붙어 다녔던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과 능력이 많으면 적이 많아지는 법이다.
물론 지금은 그냥 대인기피증 환자라 이런 집을 지은 거 같지만.
“와, 이씨. 나도 과학과나 갈걸.”
“……?”
‘과학과’는 뭐 하는 곳일까.
영문과도 국문과도 수학과도 아니고, 과학과는 처음 듣는다.
‘그보다 까먹고 있었다. 이 녀석 대학생이었지…….’
호진이 그 사실에 새삼 놀라며 물었다.
“지금은 무슨 과인데?”
“나? 검도학과. 그러니까 아직도 검도하지.”
“……검도학과? 근데 왜 검 안 쓰고 그런 걸 들고 다니냐.”
호진이 용재가 든 도끼를 의아하게 쳐다보자 용재가 발끈했다.
“이거 형이 준 거잖아. 그리고! 검도학과라고 검도를 잘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
“그게…… 편견인가?”
검도학과가 검도를 못 하면 누가 잘해야 한다는 거지?
“그럼. 편견이야. 형은 형 전공 잘해?”
“아하.”
용재에 질문에 고민하던 호진은 납득 당해버렸다.
호진도 상담이론은 제법 잘했지만 정작 상담을 할 때는 꽝이었으니까.
“그래, 편견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니까.”
둘이 진지한 표정으로 주억거리며 걷고 있자니, 예은이 다가와 호진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용재랑 노는 건 좋은데, 너무 닮지는 마요.”
“…….”
예은의 말에 호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용재와 티키타카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조금 바보 같아지는 것 같긴 했지만, 설마하니 닮았다니.
다소 충격적이었다.
충격에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건물의 현관.
그 앞에 서자 철로 된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안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자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기다란 소파와 두툼한 카펫이 깔린 넓은 방.
벽난로에선 장작이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다소 뜬금없는 풍경이었지만, 알 수 없는 아늑한 분위기에 일행들의 긴장 어린 표정들이 풀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때 문득 스미스 탁자 위에 있던 공책을 빼 들고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일행분들은 이곳에서 대기하시고 호진 님은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역시 말만 못할 뿐, 스미스의 인공지능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예은과 용재가 호진을 따라오려 하자 스미스는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래도 이들을 집 안에 들인 것까지가 형의 한계인 모양이다.
─끄덕
호진이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것을 확인한 스미스는 다시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스미스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3층의 어느 목재로 된 방문 앞.
─똑똑
앞장서던 스미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두 번 울리는 목소리.
안쪽에서 호연의 목소리가 들린 후, 약간의 딜레이를 두고 핸드폰 스피커에서도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형은 먼저 통화를 끊는 법이 없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호진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후, 방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커튼이 쳐진 방 안은 불도 켜지 않아 어둑했다.
그리고 방의 한가운데 목제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뭔가 불안한 듯 다리를 떨고 있었는데, 호진과 눈을 마주치자 떠는 속도가 배로 빨라졌다.
“보고 싶었어. 형.”
“어…… 아, 응.”
호연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담이 올 것 같은 몸놀림에 다소 걱정됐지만, 지금은 평범한 대화를 통해 긴장을 풀어주는 게 우선이다.
“오는 길이 조금 험하더라. 5일 전쯤 출발했는데 지금 왔네.”
“그…… 그렇구나.”
다시금 방에 맴도는 정적.
그러자 불안한 듯 떨리던 호연의 다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핸드폰 진동처럼 떨리는 호연의 다리를 보니 호진조차 없던 긴장이 생겨날 듯했다.
“형은 어떻게 지냈어? 스미스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뭔가 많이 바뀌었네.”
“아! 응.”
호연은 먼저 말을 걸어준 게 고마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5일쯤 전. 예전 집에서 새로운 재배종을 만들고 있을 때였어.”
“재배종?”
“왜 저번에 네가 마…… 망고 좋아한다 했었잖아. 그래서 날씨나 토양과 상관없이 자라는 망고를 만드는 중이었거든.”
호연의 말을 들은 호진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을 땠다.
“내가 그랬던가? 아니, 그보다 그런 걸 뚝딱 만들 수 있어?”
호진이 놀라서 묻자 호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답했다.
“그……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요즘은 유전자 편집 기술이 많이 발달해서 도구만 있으면 돼. 기본적으로 징크핑거뉴크라아제랑 탈렌, 크리스퍼─카스9가 필요한데, 요즘에는 새로 나온…….”
“그렇구나, 그래도 대단하네. 그래서 5일 전에 뭐라고?”
호진은 호연의 급발진을 능숙하게 끊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으응! 아, 아무튼 저번에 네가 왔던 집은 재배종을 만들고 기르는 집이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짐승들이 밭을 헤집어놓더라고. 가끔 고라니가 어슬렁거리긴 하는데, 철조망을 끊어내고 들어온 건 그 짐승들이 처음이었어.”
“응, 그래서?”
호진이 궁금하다는 듯 호연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호연은 신나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짐승을 쫓아내려고 나갔는데, 놈들이 달려들더라고. 나…… 난 바로 집으로 들어와 숨었지. 그때 경비용으로 제작 중이던 기계에 스미스가 스스로 동기화해서 날 구해줬고.”
호연은 옆에 있던 스미스를 툭툭 두들겼다.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스미스.
이런 걸 보면 AI도 주인을 닮은 듯했다.
“그……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플레이어가 됐다더라고. 막 스킬도 주고.”
“어떤 스킬을 받았는데?”
“고유 스킬로 ‘천고의 기재’라는 걸 바…… 받았어. 유니크 스킬로는 ‘골렘 제작’을 받았고.”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았음에도 호연의 스킬이 사기적인 능력을 소유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당장 ‘골렘 제작’으로 만들었을 게 분명한 스미스의 외골격은 수십m가 넘는 곳에서 떨어진 낙하의 충격조차 견뎌냈다.
싸워보지 않았지만 호진도 지금의 스미스를 상대로 무조건 이길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굉장하네.”
호진이 웃으며 칭찬하자, 호연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벼…… 별거 아닌데. 뭘.”
그런 호연을 보며 호진은 피식 웃었다.
예전이었다면 호연을 칭찬하는 자신의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호진은 형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었다.
지난 며칠간의 경험은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해줬으니까.
“그…… 그래도, 거기를 계속 지키기엔 집이나 경비도 허술하고 자꾸 그 파충류 닮은 짐승들이 공격해 와서 이곳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어.”
“여긴 뭐 하는 덴데?”
“여기는 공방이야. 원래 이것저것 물건을 만들던 곳. 지금은 무기나 드론, 골렘을 만드는 중이지만.”
“골렘이 더 있어?”
“으…… 응. 스미스처럼 AI는 아니지만. 한 10기 정도 더 만드는 중이야. 아까 말한 몬스터들에게 빼앗긴 집에서 재배종들이랑 장비들을 다시 찾아와야 하거든.”
확실히, 만약 이런 혼란이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식량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적어도 재배종을 개발하고 생산할 수 있는 장비와 종자들은 탈환할 필요성이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아…… 안 돼. 위험해.”
호연이 양손을 펼쳐 흔들었다.
그러나 호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여기 내가 데려온 군식구만 16명이야. 밥값을 해야지.”
“그럴 필요 없는데…….”
“내가 늘 말하지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한다니까.”
호연은 똑똑하지만 그 간단한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남들에게 재능을 퍼주기만 하다가 끝내는 사기꾼 취급을 받았다.
“으음, 그…… 그래. 호진이는 똑똑하니까. 호진이 말 들어야지.”
말은 어쩔 수 없다는 듯했지만, 어쩐지 기쁜 표정을 지은 호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대화가 끊겼지만 아까처럼 어색하진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호연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 나머지는 스미스가 안내해 줄 거야. 일단 좀 쉬어.”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예전의 멀쩡했던 형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호진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마주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 형.”
“뭐…… 뭘.”
금방 다시 요즘의 형으로 돌아왔지만, 호진은 그냥 웃음이 났다.
그렇게 스미스가 방문을 열고 호진이 뒤돌아 나가려던 순간.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호진이 몸을 돌려 호연에게 물었다.
“근데 형은 왜 맨날 전화를 먼저 안 끊는 거야?”
잠시 멈칫한 호연은 머리를 긁적였다.
“네…… 네가 어릴 때, 내가 할 말만 하고 끊었다가 너한테 혼난 적이 있거든.”
‘그랬던 적이 있던가?’
호진은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새삼 느끼는 거지만, 형은 서툴렀을 뿐이지 자신을 늘 아껴줬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밀어낸 건 자신이었음을, 호진은 문득 깨달았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호진은 마음에 있던 말을 입으로 꺼냈다.
“그랬구나,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러자 호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
“네, 어쨌든 그런 일들이 있었지만,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건 다행입니다. 말씀해주신 그 와……이번? 그 개체는 저희 쪽에서도 확인했었습니다만, 스텔스 기능이 있는 늑대라……. TOD(Thermal Observation Device)는 통했으면 좋겠군요.]
“적외선이라면 통할 겁니다. 피가 따뜻했으니까요.”
[다행입니다. 아무튼 좀비 떼도 황당했지만, 강화도 내부도 만만치가 않네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럼 다음 보고 때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18시.
주 대위와 첫 정기 보고를 마친 호진은 무전기를 갈무리해 주머니에 넣었다.
충전기가 따로 없었기에,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게 따로 뽑아서 관리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똑똑
“형, 무전 끝났으면 내려와서 밥 먹어.”
“그래. 내려갈게.”
용재의 부름에 1층으로 내려가자, 온갖 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스미스가 쓴 걸로 추정되는 메모도 있었다.
「뷔페」
이방인들은 침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을 들고 있었다.
“용재야, 먼저 시범 보여주자.”
“응!”
용재와 호진이 먼저 기다란 식탁을 지나며 접시에 먹고 싶은 걸 담자, 이방인들도 머뭇거리며 그들을 따라 음식을 담았다.
호진은 이방인들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말을 전한 후, 음식을 가지고 호연의 방으로 갔다.
─똑똑
“……왜?”
방에서는 왠지 지친 듯한 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건 아니고, 간만에 같이 밥이나 먹자고.”
“안 돼. 지금은.”
꽤 단호한 호연의 목소리에 호진은 움찔 몸을 떨었다.
“……무슨 일 있어?”
잠시 머뭇거린 호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 오늘치 인싸력을 다 썼어.”
“…….”
아직 호연은 갈 길이 먼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