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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31화 (31/241)

31화. 해우 (4)

용재에게 달려들던 짐승들은 낙하의 충격으로 인해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검은색 형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섰다.

낙하로 인해 뿌옇게 떴던 모래들이 가라앉자 주변에는 정적이 흘렀다.

잠시 찾아온 소강상태.

짐승들도 호진과 일행들도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기에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용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호진도 용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저건…… 설마 사람인가?’

덩치가 있는 용재와 비교해도 머리 두 개쯤 더 큰 거대한 덩치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 형체는 분명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다음 순간.

검은 형체는 저벅저벅 걸어 짐승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짐승들이 움찔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본 녀석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멈춰 섰다.

그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

가까이 접근하면 공격하겠다는 의사표명.

“크르르르륵.”

그때 물러났던 푸른 늑대도 조금 진정이 됐는지 피가 끓는 소리를 내며 안면을 잔뜩 구긴 채 호진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이내 몸을 돌린 녀석은 목을 길게 빼곤 길게 하울링을 했다.

─아우우우우우우!

그 소리에 짐승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물러났다.

우회해 기습한 녀석들도 마찬가지.

아무래도 푸른 늑대는 승산이 없다 생각했는지 빠르게 전투를 포기한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판단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호진은 그런 녀석들을 그냥 보내줬다.

지금 놈들을 쫓아 모두 섬멸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정체불명 양복남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시급했다.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 그 정체나 의도까지는 모르는 상황이다.

호진은 서둘러 일행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점점 다가갈수록 양복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로 얼룩진 셔츠와 남색의 재킷.

파란색 넥타이가 단정하게 매어져 있고 검은색의 구두는 제법 비싼 브랜드의 것인 듯했다.

그리고.

“이건 도대체, 뭐지?”

용재가 양복남을 보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게 내뱉기에는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호진은 그 마음이 이해됐다.

옷으로 가린 몸과는 달리 양복남의 머리와 손은 훤히 드러나 있었는데, 그곳엔 살 대신 차갑고 단단해 보이는 돌이 있었다.

남자의 몸은 말 그대로 돌.

양복남은 걸어 움직이는 돌덩어리였다.

호진은 이것과 유사한 존재를 알고 있었다.

‘골렘.’

호진이 다가가자 골렘은 눈도 코도 없는 얼굴을 돌리더니 호진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적은…… 아닌 것 같네.’

골렘의 적대적이진 않은 태도에 호진은 한시름 덜며 마주 인사를 했다.

그러자 녀석은 대뜸 자신의 팔뚝의 와이셔츠를 풀고 걷어 올리더니 호진을 향해 내밀었다.

호진은 순간 움찔하며 검을 움켜쥐었지만, 골렘은 다른 팔을 들어 자신의 팔뚝을 가리켰다.

그건 뭔가를 봐달라는 제스처였다.

호진이 골렘의 팔뚝을 살피자 그곳엔 영문으로 무언가 적혀있었다.

“스……미스. 스미스? 뭐야, 그 스미스?”

호진이 놀라 되묻자 골렘은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형 이게 뭔지 알아?”

용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호진은 어이없다는 듯 숨을 토해내며 답했다.

“아마…… 아는 것 같아. 이런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게 뭔데?”

“스미스. 내 형이 예전에 만들어낸 인공지능 AI야.”

***

세기의 천재.

단군 이래 최고의 사기꾼.

중증 대인 기피증 환자.

호진의 형, 이호연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수도 없이 많다.

그래도 형이 천재라는 사실을 가장 명확히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스미스일 것이다.

세상에는 밝히지 않았지만, 형은 연구원 시절 거의 완벽한 AI 시스템을 구축해냈다.

몇 년 전까진 호진도 몰랐고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들이지만 말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얼굴도 안 보고 살았으니까.’

호진이 쓰게 웃으며 용재와 예은에게 스미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했다.

그러자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들은 호진에게 물었다.

“그럼, 이것도 형의 형님이 만드신 거야?”

“그런 것 같긴 한데. 애매하네. 로봇 부품으로 돌을 쓰는 게 요즘 트렌드는 아닐 거 아니야.”

“그렇긴 하죠? 철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돌을.”

일행들이 애매한 표정으로 스미스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스미스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스미스. 예전에는 말할 수 있었잖아. 지금은 못하는 거야?”

저번에 형 집에 갔을 때 스미스는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의 스미스는 말을 전혀 못하는 모양.

호진의 질문에 스미스는 움찔하더니 고개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시무룩한 제스처를 취했다.

아무래도 사람 형태로 제작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뭔가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해진 호진이 스미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도 몸이 생겼네. 잘 어울려.”

스미스는 호진의 칭찬에 금세 어깨를 쭉 펴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자신을 봐달라는 모양.

스미스 본인도 몸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스미스는 마치 방금 기억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치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호진에게 내밀었다.

“핸드폰? 전파가 끊긴 지가 언젠데 핸드폰을…….”

호진이 핸드폰을 받아들자 용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우우웅

호진의 손 위에서 핸드폰이 반짝이며 진동했다.

화면 속에는 호진에겐 익숙한 번호가 떠 있었다.

“……잘 되네.”

용재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는 동안 호진은 천천히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영상통화인 듯 반대편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새까만 어둠밖에 없었지만 점점 화면 속에 특정한 형상이 맺혔다.

의자에 앉아 불안한 듯 다리를 떠는 사내.

두꺼운 안경과 깎지 않은 수염. 덥수룩한 머리카락으로 영락없이 노숙자 같은 행색이다.

호진은 피식 웃으며 영상 속 사내와 마주 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내는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 오랜만이네. 호진아.”

“어 오랜만이야, 형.”

***

호연은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여…… 여긴 어쩐 일이야?”

호연의 질문에 호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걱정되니까 왔지.”

“아…… 아. 그렇구나.”

그 대답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당황한 호연은 한층 더 심하게 다리를 떨었다.

하지만 내심 좋았던 건지 손가락을 연신 꼼지락거린다.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지금 안전한 거지?”

“으…… 응! 물론이지.”

호연의 대답에 호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잠시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

꽤 나아지긴 했지만, 호진과 호연 사이에는 아직까지 어색함이 많이 남아있었다.

아직 풀지 못한 감정의 골 또한 있었고.

어색한 정적 끝에 호진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스미스는 형이 보낸 거야?”

“어, 맞아! 그…… 경계망에 네가 잡혔는데 위…… 위험해 보이길래. 오…… 오지랖이었나?”

호연이 불안한 듯 묻자 호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위험했어. 고마워, 형.”

“그…… 그렇다면 다행이네.”

호연이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스미스는 어떻게 된 거야? 이런 모습 아니었잖아.”

분명 저번에 호연의 집에 갔을 때만 해도 스미스는 컴퓨터 안에 내장된 AI로 명령을 수행하는 비서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유명한 히어로 영화에 등장하는 AI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이해하기 어려울 텐데…….”

호연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냥 간단하게 말해줘.”

“봐…… 봐봐. 호진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스미스는…….”

호연은 어디서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미스는…… 철과 돌로 만들어진 골렘이야.”

세상 근엄한 표정을 짓는 호연.

마치 원시인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 같은 태도다.

“……그건 알아.”

“어라? 알아?”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호연은 재차 말을 이었다.

“그…… 그럼, 철이 금속 고체라는 것도 아는 거 맞아?”

“……어.”

그 대답에 호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그래, 그럼 얘기하기 편하지. 너도 알다시피 철의 원자량은 55.845(2)u잖아? 산화물 형태의 철광석을 집적 구매해 내가 직접 주조해서 만들어낸 녀석인데, 평균 밀도인 7.874g/㎤보다 훨씬 고밀도 고강도인…….”

“그만.”

호진은 중얼거리기 시작한 형을 뜯어말렸다.

“알아들었어, 대단하네.”

“으응!”

호연은 말이 끊겼음에도 칭찬받은 게 기쁜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형은 지금 어디 살아?”

“여……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나와.”

“그랬던가? 아직 한참 더 가야 했던 것 같은데.”

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호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저번에 왔을 때 보…… 본 건 4번째 집.”

4번째 집?

그럼 적어도 3채가 더 있다는 말이다.

‘돈이 많다고 듣기는 했지만…….’

“크흠.”

그때 옆에서 헛기침을 하는 용재.

생각해보니 형과 만난 반가움에 일행들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호진이 용재를 바라보자 용재가 기다렸다는 듯 물어왔다.

“형, 그쪽은 누구……?”

“인사해. 내 친형 이호연이야. 형, 이쪽은 용재. 검도장 후배야.”

호진은 형과 용재를 서로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멈칫했다.

‘형, 대인 기피증이 더 심해진 것 같은데 괜찮나?’

더군다나 상대가 용재다.

이 둘의 친화력은 하늘과 땅 차이.

걱정이 밀려오던 그때 용재가 호연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앗, 안녕하십니까. 형님. 저는 호진이 형의 오른팔과 심장을 맡고 있는 김용재라고 합니다.”

“오…… 오른팔이면서 심장?”

놀란 호연이 호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 사람은 오른팔에 심장이 없는데……. 호진아, 저…… 저 사람도 로봇이야?”

“…….”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아하하하하하하!”

용재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배꼽을 붙잡았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배를 붙잡고 웃어대는 용재.

“와, 호연이 형님. 진짜 재밌으시네요. 호진이 형보다 훨씬 재밌으세요.”

“그…… 그래? 내…… 내가 이래 봬도…… 낯을 조금…… 가리는데. 신기하네.”

뭐가 ‘이래 봬도’라는 걸까.

호진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용재가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와 진짜 빵빵 터집니다. 형님!”

“으응……! 내가 옛날에는 코…… 코미디언 하라는 말도 많이 듣긴 했지.”

뭔가 뿌듯해하는 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가락도 모자라 발까지 꼼지락거렸다.

아마 기쁨을 최대로 표현 중인 듯했다.

그때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예은이 짜게 식은 눈으로 그 둘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전 안 웃긴데, 제가 이상한 건가요?”

“아뇨, 정상입니다.”

마찬가지로 둘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호진이 대답하자 예은이 안도하며 되물었다.

“다행이네요. 전 제가 이상한 줄 알았어요. 그럼 코미디언 얘기는 거짓말이죠?”

“아뇨. 그건 진짜예요. 형이 연구소에서 팀장으로 일할 때 팀원들이 자주 그랬대요.”

“아…….”

이번에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형을 바라보는 예은.

뭐 어쩔 수 있나.

열다섯 살 애였던 형은 정말 자기가 재밌는 농담을 했다고 믿었을 거다.

‘그 나이에 자본주의의 웃음이 뭔지 알 리가 없지.’

어리고 유능한, 출셋길이 열린 팀장에게 팀원들이 잘 보이려 한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제 그가 팀장도 열다섯도 아니라는 건데.

다행히 용재는 호연의 농담이 진짜 재밌는 모양이다.

“그래서 형,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한참 용재와 대화를 꽃 피우던 호연에게 다가간 호진이 말을 꺼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내가 형 집에 머물 수 있을까?”

일단 부탁하긴 했지만 사실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람이 많은 것을 못 견디는 형이다.

대신 형이 거절하면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그 근처에 캠프를 하나 세울 생각이다.

형도 지키고 이방인들에게 거처도 만들어주고.

일석이조라고 할까.

그때 호연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되…… 돼.”

“응, 안 되지? 그래, 그러면…… 잠깐…… 뭐라고?”

호진은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털었다.

“너, 너 친구들이잖아. 밖은…… 위…… 위험해.”

“……고마워.”

예상치 못한 답변에 호진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러면 이방인들의 거주지 문제도 빠르게 해결된다.

무엇보다 형이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조…… 조심해서. 스미스를 따…… 따라와.”

스미스는 호연의 말과 동시에 손을 휘적거리며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걸어갔고, 일행들 역시 그 뒷모습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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