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해우 (3)
잔뜩 굳어있던 짐승들은 다시 호진을 향해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대장의 하울링이 놈들의 사기를 높여준 것이다.
‘흠, 쉽게 가나 했는데.’
아까까지 좋은 분위기였는데 아쉽게 된 상황.
호진은 가볍게 혀를 찬 뒤 놈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선두 두 번째 줄 왼쪽에 하나, 세 번째 줄에 가운데 하나 오른쪽에 둘.’
다가오는 놈들 사이로 빈 공간이 하나둘 늘어간다.
멀쩡히 있던 녀석들이 사라질 일은 없으니 그 이유는 간단했다.
몇몇 녀석들이 은신 능력을 사용한 것이다.
‘아직은 괜찮아.’
놈들이 어디쯤에 위치했는지 빈 공간을 통해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놈들은 착실하게 바닥에 고인 피와 물을 밟고 족적을 남기고 있다.
물론 점점 발자국들이 알아볼 수 없게 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알아보는 데 무리가 없었다.
‘아직까지는……이지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선두의 녀석들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췄다.
그러곤 치타처럼 가속하여 호진을 향해 쇄도했다.
그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고 치명적이다.
대시하는 구간 없이 이런 속도를 내게 되면 반응하기가 퍽 까다롭다.
시속 100km의 야구공이 멀리서 날아온다면 칠 수 있지만, 코앞에서 날아오면 치기 어려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까 은신을 한 녀석들의 공격 방식도 그렇고, 이 녀석들의 공격 방식은 상대를 기습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 같았다.
그럼에도 호진은 어렵지 않게 달려드는 녀석들의 힘을 이용해 적절한 타점에 카운터를 박아 넣었다.
아무리 상대가 기습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기본적인 스펙의 차이가 너무 큰 까닭이다.
호진은 우선 폼탁에서 한 발 내디디며 검을 휘둘러 가장 앞에 오던 녀석의 목을 부드럽게 갈랐다.
그러곤 곧바로 쉬랑크훗(Schrankhut).
장벽 자세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래로 짓쳐들어오는 짐승의 이빨을 막아냈다.
이어서는 그 막아낸 힘을 이용해 손잡이 위치를 고정한 채 검 끝만을 빠르게 돌려 녀석의 목에 박아 넣었다.
꺾어베기라는 의미의 크럼프하우(Krumphauw)를 운용한 동작이다.
이처럼 롱소드 기술, 그중 특히 리히테나워 계통에 기반을 둔 검술은 분명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에 방어에 적합한 동작을 섞는 것이 특징이다.
안정적이고 밸런스가 뛰어난 검술.
이렇게 자신보다 약한 녀석들을 상대로는 정공법이 최고였다.
호진은 침착하고 안전하게 녀석들의 수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적들을 흘렸지만, 용재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숫자였다.
하물며 예은까지 있는 뒤쪽이 위험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크륵, 켁 케겍.”
목에 검이 박힌 짐승 한 마리가 피를 뿜어냈다.
그러나 호진 역시 팔뚝의 찍힌 상처에서 피를 뚝뚝 흘렸다.
은신한 녀석의 공격을 간신히 눈치채고 반격까지 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거다.
‘슬슬 구분이 안 가네.’
은신한 녀석들을 구분할 수단이었던 바닥의 물과 피는 이제 무의미했다.
마른 바닥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놈들의 은신 능력은 정말 위험했다.
격전 속에 그 미묘한 발소리를 눈치채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발소리로 간신히 위치를 잡아낸다 해도 정확한 공격 방식을 모르니 막아야 할지 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피지컬로 찍어 눌렀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
도박수가 필요한 시점이다.
“예은 씨, 지원사격 부탁드립니다!”
“네!”
화살을 아끼던 예은이 아낌없이 화살을 퍼붓기 시작하자 짐승들은 당황하며 물러났다.
그 틈에 호진이 재빨리 꺼내 든 것은 ‘맹인 악사의 눈가리개 헝겊’이었다.
이전과 달리 스탯이 오르며 신체 능력들과 감각도 많이 올랐다.
지금 사용한다면 이전보다는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착용하는 순간 어두워지는 시야.
시각을 잃어버렸지만, 이내 청각과 촉각 그리고 후각을 비롯한 정보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무엇보다 파문처럼 생명의 기척이 울려 퍼져서, 자신을 둘러싼 짐승들의 위치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됐다.’
그럼 이제 슬슬 사용할 때가 됐다.
‘사냥꾼의 눈.’
시야가 밝아지며 동시에 점점 다가오는 짐승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냥꾼의 눈이 레벨 2를 찍었고, 스탯도 많이 올라 눈앞이 매우 잘 보였다.
“됐습니다!”
호진은 예은에게 사격 정지를 요청한 후 놈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짐승들은 호진이 먼저 달려들지는 예상치 못했는지 경직된 움직임을 보였고, 그대로 호진의 검에 썰려나갔다.
‘진즉에 이렇게 할걸. 아오, 쓰라려.’
혹시 몰라 사용 안 하고 있다가 괜히 팔만 다쳤다.
호진은 혀를 차며 검을 고쳐 잡고는 재차 밀려드는 녀석들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
그 뒤로는 파죽지세였다.
호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길 위에는 하나둘 회색 짐승들이 쓰러졌고 길은 붉게 물들어갔다.
놈들은 점점 덤벼들기를 꺼렸고 오히려 호진이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누가 누구를 습격한 것인지 모르게 된 상황에 놈들도 혼란스러운 듯했다.
“아직 20분도 안 싸웠다. 벌써 지쳤냐. 똥개들아.”
5시간 연속으로도 싸운 적이 있는 호진은 아직 체력이 남아돌았다.
문제는 이제 놈들이 더 이상 덤벼들지 않는다는 것.
그때 놈들이 좌우로 길을 터고 무리 사이로 거대한 푸른 늑대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크르르르르릉.”
거대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늑대와 같은 외관을 지닌 녀석.
그러나 그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놈의 몸에선 강렬한 존재감과 신비로움이 뿜어져 나왔다.
푸른색 털은 바람결에 살랑이고, 차가울 정도로 푸른 두 눈동자는 호진을 향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거냐?”
하지만 정작 호진은 그런 녀석을 보며 차갑게 냉소했다.
여태껏 100마리가 훨씬 넘는 놈들을 베었다.
언제 나오나 기다렸는데, 솔직히 나오는 타이밍이 더럽다.
실컷 간 보고 힘을 빼놓은 다음에 공격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였다.
생긴 거는 영험하고 고아하게 생긴 주제에 하는 짓은 부하들보다 못했다.
“근데 어쩌나. 차라리 처음에 공격했으면 모를까, 지금은 몸이 풀렸는데.”
심지어 레벨 하나가 올랐고 검술 스킬은 9레벨이 됐다.
잔여 스탯만 해도 9.
놈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거슬리는 게 한 가지 있다면 이상하게 여유로운 놈의 태도다.
‘사실 엄청 강한 건가?’
호진이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후방에 적 출현!”
예은의 긴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봉고차의 뒤쪽으로 난 외길을 따라, 몰려오는 회색빛의 짐승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얼핏 봐도 그 수가 백 단위다.
방금 상대하며 느꼈지만 용재는 은신 능력이 있는 녀석들을 상대할 수 없다.
한 마리, 두 마리라면 바닥에 찍히는 족적을 보고 상대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저 정도 숫자는 호진조차 맹인의 눈가리개 없이는 상대하기 버거울 터.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봉고차에 붙어 양쪽에서 오는 녀석들을 모두 상대할 수밖에 없다.
빠르게 판단한 후, 호진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후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섬찟한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호진은 재빨리 비스듬히 검을 돌려 상체 전체를 드리우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코앞까지 다가온 푸른 늑대의 날카롭고 예리한 어금니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까강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호진이 든 대검이 성인남성의 팔뚝만 한 녀석의 어금니를 간신히 막아냈다.
그 상태로 놈이 힘을 줘 밀어버리자, 급하게 돌아서며 균형이 무너진 호진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바로 이어서 거대한 늑대의 앞발이 날아들었다.
뻔히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호진은 그것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깡!
큰 소리와 함께 날아가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른 호진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후속타 없이 자신을 여유롭게 내려다보는 푸른 늑대.
‘이거였군.’
수백의 부하가 죽어 나가는 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유.
놈이 묘하게 여유롭던 이유.
그것은 바로 놈이 처음부터 이 시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은 호진 일행의 전력과 계획을 파악한 시점에서 부하 일부를 우회시켰을 것이다.
이건 처음부터 수 싸움에서 패배한 싸움이었다.
‘완전히 당했다.’
심지어 호진은 회색 짐승들을 쫓아 이미 봉고차와 거리가 꽤나 멀어진 상황.
그런데 대장으로 보이는 이 녀석은 자신을 상대로 철저하게 시간만 끌려고 한다.
“……민첩에 9포인트.”
이렇게 된 이상 보스를 빠르게 쓰러뜨리고 합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용재가 시간을 벌어주길 기도하며 호진은 민첩에 잔여 포인트를 때려 박았다.
회색 짐승들의 특징은 빠르고 공격에 특화된 대신 방어가 취약하다는 것인데, 생김새로 보나 공격 방식으로 보나 푸른 늑대도 그와 비슷해 보였다.
스킬을 사용한다면 공격력은 충분할 터.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다.
순식간에 민첩이 23에서 32가 되었다.
이 정도까지 급격하게 스탯을 끌어올려 본 적은 없어서, 그 변화가 어떨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스탯을 분배한 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간을 보듯 서 있는 푸른 늑대를 향해 내달렸다.
순식간에 좁혀드는 거리.
호진조차 그 속도가 감당이 되지 않아 중심을 잡느라 애먹을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본 푸른 늑대는 화등잔처럼 눈을 크게 뜨고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놈이 물러나는 속도보다 호진이 접근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튕기듯 바닥을 박찬 호진은 검을 휘둘렀다.
호진은 목엽참(木葉斬)을 펼쳐 두부를 썰 듯, 공중에 뜬 녀석의 턱부터 콧잔등까지 길게 베어냈다.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 붉은 피.
검을 휘두른 호진은 멈추지 않고 아직 착지하기 직전 대거(Dagger)를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날아든 대거는 놈의 오른쪽 수정체를 박살 내며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크라라라라라락.”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치며 바닥에 착지한 녀석이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호진은 놈을 마무리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처음부터 호진의 목표는 놈의 무력화였다.
지금 중요한 건 일행들의 안전.
놈들을 모두 죽인다 하여도 일행들이 당한다면 그건 호진의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뒤를 돈 호진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
봉고차에 다다른 녀석들.
용재가 도끼를 휘둘러 가장 앞에선 녀석을 베어 넘기는 중이지만 잠시도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봉고차까지 빠르면 10초 정도.
아슬아슬한 시간이다.
호진이 달려 나가려는 그 순간.
─쾅
검은색의 인형(人形)이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져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