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해우 (2)
외길로 이어지는 산길.
아스팔트가 깔려있긴 하지만 차량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폭이다.
산을 깎아서 길을 낸 것인지 옆으로는 바위 절벽과 낙석 방지 펜스가 있었다.
아까부터 눈에 보이는 풍경들과 길이 제법 눈에 익었다.
마지막으로 온 지 2년이 넘었지만,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익숙함이 있다.
왠지 모르게 예전 추억들이 떠올라 기분이 둥실 부풀어 올랐다.
기껏 해봐야 형을 보려고 3번, 4번 왔던 게 전부인데 이상하다.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새삼 깨달았다.
당시는 어색해서 잘 몰랐지만, 사실 형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그리 나쁘지 않았었다는 걸.
호진이 기분 좋은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탁탁 타닥 탁탁
정지를 알리는 신호가 울려왔다.
또다시 몬스터들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왠지, 잘 간다 싶더라니.’
호진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일행들이 정지하자 호진은 그들을 쉬게 하며 예은을 기다렸다.
용재는 아까 호되게 당한 탓인지 이번에는 조용히 명령을 따라줬다.
그렇게 다시 쭉 뻗은 아스팔트 산길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길의 한복판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예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릿한 존재감 덕에 지근거리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 존재를 알아채기조차 어려운 수준이다.
이제 척후만큼은 예은이 호진보다 확연히 뛰어날 듯하다.
다만, 발소리는 조금 줄일 필요가 있겠다.
‘잘 안 들리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아쉽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소리가…… 어?’
뭔가 이상했다.
돌이켜보니 ‘하픈덤의 안개 낀 동쪽 해안가’를 나온 이후로 예은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녀는 캠프에서조차 발소리를 낸 적이 없었는데, 그런 그녀가 정찰 중에 발소리를 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호진의 앞에서는 미세하지만 무언가 아스팔트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륵
그 순간 호진은 예은의 뒤쪽에 위치한 나뭇잎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엎드려!”
안 그래도 호진의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예은은 기다렸다는 듯 바닥을 굴렀다.
그렇게 몸을 날려 바닥을 구르는 그녀의 머리 위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스쳤다.
말과 동시에 출수한 호진의 검이 허공을 가른 것이다.
그러자 허공을 갈랐어야 할 검의 끝에서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크륵─.”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허공에서 회색의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늑대 같은 외관.
온몸에는 회색 털이 북슬북슬했다.
다만, 이마에 양의 그것과 유사한 뿔이 달려있었기에 평범한 늑대라고 하긴 어려웠다.
호진의 검에 베인 것으로 보이는 상처는 목부터 어깻죽지까지 길게 이어져 바닥에 피를 후드득 쏟아냈다.
잠시 비틀거린 녀석은 자세를 다잡고는 호진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제법 강맹한 기세였지만 당연하게도 호진에게 그 이빨이 닿을 리가 없었다.
은신을 제외한다면 공격 패턴 자체가 쇼핑몰에서 싸웠던 고블린 늑대 기수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기수가 없는 만큼, 변용이 적고 단조로운 공격이라 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녀석의 목을 양단한 호진은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추가적인 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50m쯤 떨어진 길 위에서 방금 쓰러진 녀석과 동일한 외형의 녀석 한 마리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이쯤 되면 확실했다.
‘하다 하다 은신 능력까지 나온다고?’
호진이 미간을 모으며 얼굴을 찡그리자, 모습을 드러낸 녀석이 목을 길게 빼더니 하울링을 시작했다.
높고 청아한 소리가 멀리 퍼져나가려던 그때.
“아우우…… 켁 크엑.”
어느샌가 쏘아진 예은의 화살이 녀석의 목에 구멍을 냈다.
하울링을 하다 끊긴 녀석의 입에서 붉은 피거품이 울컥 울컥 쏟아져 나왔다.
녀석은 잠시 비틀거리다 아스팔트 바닥 위로 축 몸을 늘어트렸다.
잠시 들썩이던 짐승의 가슴이 이내 천천히 멈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늑대과의 짐승들이 하는 하울링은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다.
소집이라는 의미를 말이다.
포식자를 발견하던, 사냥감을 발견하던 녀석들은 하울링을 통해 공명하고 한곳으로 모여든다.
예은이 재빨리 놈의 하울링을 끊었지만 분명 소리가 새었다.
만약 놈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우우우우우우!
역시 어림도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방금 끊겼던 울음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긴 울음이 토해져 나왔다.
그리고.
─아우우우우우우! 아우우우우우우우!
그 뒤를 다른 하나, 또 다른 한 마리가 따라 하더니 곧 수십 수백으로 불어났다.
그 소리를 망연하게 듣고 있던 예은이 화살에 쓰러진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녀석, 제가 본 녀석들이에요. 언덕 너머에 잔뜩 모여 있더군요.”
“그렇겠죠. 방금 물러나서 하울링 하던 것도 그렇고. 이 녀석들은 척후였던 모양입니다.”
호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은이 입술을 잘게 씹었다.
“……죄송해요. 아마, 저를 따라온 것 같아요.”
“아니요, 제 잘못도 있어요.”
설마 몬스터들이 정찰병을 운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군다나 은신 같은 능력이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주의했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주위를 둘러보던 호진이 버려진 봉고차 하나를 발견했다.
“차량이 있는 곳까지 물러납시다. 예은 씨는 봉고차 위에서 지원사격 부탁하겠습니다.”
끄덕.
일행들은 고개를 재빨리 끄덕이고는 차량으로 이동해, 일부는 차에 타고 남는 인원들은 예은을 따라 봉고차 위로 올라섰다.
“용재야, 넌 이것 좀 도와라.”
“뭔데?”
호진은 생수 몇 통을 내밀며 말했다.
“바닥에 뿌려. 넉넉하게.”
“응!”
용재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생수통을 받아들자 호진은 피식 웃었다.
‘귀한 생수를 바닥에 뿌리라고 했는데, 왜냐고 물어보지도 않네.’
호진은 그런 용재가 고마웠다.
녀석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봉고차를 중심으로 간격을 두고 꼼꼼하게 뿌려. 은신한 녀석들이 다가오면 발자국이 찍힐 거야.”
“아!…… 발자국. 오키, 어떻게 할지 알겠어.”
운 좋게도 봉고차가 있는 곳은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 옆.
낙석방지 펜스와 딱 붙어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막을 곳은 훨씬 줄어든다.
물을 뿌리는 용재를 내버려 둔 채, 호진도 앞으로 나아가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뛰어넘을지도 모르니 넓고 꼼꼼하게 뿌렸다.
용재가 막는 곳은 2차 저지선.
그리고 지금 호진이 지금 서 있는 이곳이 1차 저지선이다.
차량이 지나갈 만한 길을 호진 혼자 전부 틀어막을 수는 없지만, 여기서 수를 줄여준 만큼 뒤쪽에서는 손쉽게 녀석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닥에 물을 실컷 들이붓던 와중, 언덕 너머에서 회색 짐승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륵. 컹컹.”
죽은 동료의 시체를 봤기 때문일까.
한껏 경계하며 낮게 그르렁거리는 녀석.
녀석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자 그 뒤로 하나, 둘 회색 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언덕을 넘어선 녀석들의 수가 점점 늘더니 길을 빼곡히 메웠다.
놈들이 모여 만들어낸 잿빛의 강은 천천히, 하지만 빈틈없이 호진과 거리를 좁혀왔다.
저렇게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걸 보면 은신이 패시브는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은신이 가능한 녀석들은 소수일 수도 있겠네.’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놈들이 은신을 사용할 가능성은 늘 열어둬야 한다.
호진은 우선 무기를 교체했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필요한 건 기선제압이다.
그렇기에 처음 선보일 무기는 단단한 투핸디드 소드(Schwer Two─handed sword).
양손으로 잡은 검을 바닥에 늘어트린 채 오른발을 뒤로하며 허리칼 자세를 취한다.
전형적인 올려베기를 위한 준비 동작이다.
그때.
─찰박
호진의 귓가를 울리는 소리.
무언가 아스팔트에 고인 물웅덩이를 밟았다.
하지만 아직 놈들의 선두는 물웅덩이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역시 왔네.’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는 해가 뜨기 직전이라고 했던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고 다가오는 놈들은 눈속임이다.
상대가 놈들에게 시선이 쏠려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은신 스킬이 있는 녀석들에겐 최고의 기습 타이밍일 것이다.
하지만 호진은 애초에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놈들은 물을 밟아 바닥에 다가오는 흔적을 모조리 드러내는 중이었다.
녀석들은 그것도 모르고 딴에는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왔다.
‘조금만 더.’
호진이 침착하게 녀석들을 기다렸다.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던 짐승들은 호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호진을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호진은 허리를 비틀며 검을 오른쪽 하단에서 상단으로 그어 올렸다.
짐승들은 뭔가 잘못된 걸 깨달았지만 이미 멈출 수가 없었다.
─우지직
녀석들의 몸은 마치 야구배트에 부딪힌 야구공처럼 날아온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다만 투핸디드 소드는 배트와는 달리 짐승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파육음과 함께 붉은색 내장과 살덩이들이 후두둑 비산하며 흩날렸다.
놈들의 일부는 자신들이 지나온 물웅덩이까지 날아가 웅덩이를 붉게 물들였다.
“흠, 한층 더 잘 보이겠네.”
호진은 씨익 웃으며 투핸디드 소드를 어깨에 걸쳤다.
유수같이 흐르던 잿빛 무리는 꽁꽁 얼어붙었다.
특히 선두는 경직된 듯 아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 일합.
그것으로 호진은 그들의 무의식 깊은 곳까지 공포를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호진은 다시금 무기를 교체했다.
이번에는 릴리온 성국의 대검이다.
평범한 롱소드보다 조금 더 긴 이 검은 밸런스 면에선 투핸디드 소드보다 압도적으로 좋다.
롱소드와 같은 양손 검이지만, 이 투핸디드 소드는 지나치게 무겁고 커다랗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근력이 높은 호진이라도 자유자재로 다루기는 아직 어려웠기에 일반적인 상황에서 쓰기에 적합하진 않았다.
호진은 이번엔 왼발을 앞으로 검의 크로스 가드를 어깨까지 들어 올려 ‘폼 탁’ 자세를 취했다.
그러곤 아직도 꼼짝 못 하고 서 있는 놈들을 향해 피식 웃으며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아직 몸도 안 풀렸다. 빨리 와라.”
그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흠칫 뒤로 물렸다.
그 순간.
─아우우우우우!
다른 놈들과는 명백하게 다른, 울음소리 자체에 알 수 없는 힘이 실린 하울링이 놈들의 뒤쪽에서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등장한 모양이었다.
놈들의 대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