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해우 (1)
드래곤(Dragon).
또는 용.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환상 속의 존재.
그들은 때로는 신비롭고 신성하게, 때로는 두렵고 포악하게 그려진다.
외형은 종교, 지역, 이야기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묘사되지만 공통적인 것들이 있다.
뱀과도 같이 비닐이 덮인 몸.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거체까지.
지금 그 존재로 보이는 녀석이 호진의 머리 위를 지나 창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다 끝내는 안 보이게 됐다.
그로부터 한참 후.
“……형, 방금 드래곤이야?”
용재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놈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그러나 호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
처음에 하늘을 뒤덮은 검은 날개와 길게 뻗은 머리를 봤을 때는 틀림없이 드래곤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침착하고 멀어져가는 놈을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비늘이 없어. 그리고 용이라기에는 뭔가 너무 날개 달린 뱀 같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더 몸을 일으켰다가는 놈에게 발각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놈은 점점 멀어져갔다.
이젠 보이지조차 않으니 의문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용재의 질문에 대답을 고민하던 그때, 뭔가 호진의 옷깃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곳을 바라보니 놀란 듯 상기된 얼굴의 소년과 소녀가 호진의 가슴팍에서 몸을 꼬물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일행들을 지나치는 순간,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뒤에 따라오던 소년과 소녀를 껴안아 몸을 낮췄던 거였다.
“아아, 미안해.”
호진이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둘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중 더벅머리 소년은 뭔가 불편한지 손끝을 모았다 폈다 하며 호진을 바라봤다.
“뭔가 불편한 점이라도?”
호진이 묻자 소년은 주먹을 불끈 말아 쥐더니 호진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그러곤 대뜸 고개를 저었다.
“응?”
호진이 당황하여 되묻자 소년이 용재와 하늘을 가리킨 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설마.
“드래곤이 아니라고?”
─끄덕끄덕
호진은 방금 지나간 것이 드래곤이 아니라는 사실보다, 이 소년이 자신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 한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감정의 표현을 자제하며 의견이나 생각을 최대한 감추려 하던 이들이다.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어찌됐든 그들이 적극적으로 심지어 유용한 정보를 공유하려 한다는 사실이 기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나저나 드래곤이 아니라면 뭐지?’
고민하던 호진의 머릿속에서는 다른 유사한 존재가 흐릿하게 스쳤다.
“음, 드래곤이 아니면…… 혹시 와이번 같은 건가?”
호진이 중얼거리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뜬 후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크기가 작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의 손짓을 했다.
“성체 와이번이 아니라는 거야?”
소년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게 덜 자란 거라니, 충격적인데.’
드래곤이 아니라 와이번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성체조차 아니라니.
쉽게 믿기지는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소년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가 살았던 세계에는 저들이 존재하는 듯한데,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새끼는 아닌 것 같던데, 레서 와이번…… 이런 식으로 부르려나?”
명칭을 정확히 맞추기라도 한 걸까.
소년은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이제야 제법 또래 아이 같은 면모가 보이는 소년.
안 어울리는 가면을 벗어던진 모습이다.
호진은 소년의 더벅머리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때 멀리서 예은이 보내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타닥 타닥
위험이 사라졌으니 이동해도 좋다는 표시다.
호진은 몸을 일으켜 다른 이방인들을 향해 말했다.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끄덕 끄덕
아닌 척하면서도 소년과 자신을 지켜보던 이방인들은 뭔가 한층 더 생기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공포의 잔재를 떨쳐내는 것도 그리 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
─탁탁 타닥 탁탁
이번에도 적이다.
호진의 생각보다 강화도는 몬스터의 밀집도와 수준 모두 높은 편이었다.
군이 강화도를 안전구역으로 만드는 데 애를 먹는 이유를 알 만했다.
벌써 4번째 우회.
가도도 벗어난 지 한참이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다.
호진이 짧게 혀를 차며 손을 들어올렸다.
─척
신호와 동시에 이방인들은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멈춰 섰다.
명령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들의 모습이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호진은 이들이 호진의 말에 너무 딱딱하게 행동하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그래도 이들이 이렇게 잘 따라주는 덕분에 아직까지 희생자가 없던 것일지도 몰랐다.
“또 몬스터네. 이번은 그냥 뚫고 가면 안 되나?”
그때 행렬의 가장 후미에서 따라오던 용재가 호진을 향해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자 호진은 어이없는 눈으로 용재를 바라봤다.
“이번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만날 때마다 그냥 뚫고 가자 해놓고서는.”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뚫고 가자.”
“아까도 말했지만, 위험하지 않은 적하고만 싸울 거라니까.”
“안 위험한 몬스터가 어디 있어. 그냥 다 감수하고 하는 거지.”
용재가 계속해서 툴툴대자 호진은 슬그머니 도발하듯 물었다.
“너 그럼 아까 와이번 상대로도 뚫고 가자고 할 수 있어?”
“그럼, 와이번이고 뭐고 내가 다 없애줄게!”
“와이번입니다.”
언제 다가온 걸까.
후드를 뒤집어쓴 예은이 용재의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랐네.’
기척도 없이 등장한 예은 탓에 놀랐던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잠시 곰곰이 예은의 말을 되씹다가 잘못 들었나 싶어 물었다.
“……예?”
“전방에 와이번이 있습니다. 아까 봤던 놈이랑 동일한 개체 같아요.”
다시 한번 또렷하게 말하는 예은.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호진은 얼굴에 미소를 띠운 채 용재를 바라봤다.
“…….”
“……용재야, 아까 뭐라고 했지?”
용재의 눈이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상하좌우로 진동하듯 떨려왔다.
“형.”
“뭐해, 안 가고.”
“사랑해.”
“난 별로. 그래서 언제 간다고?”
“아, 형! 잠깐 동생이 허세 좀 부린 거로 너무한 거 아니야?”
용재의 목소리가 조금 커지자 호진은 짜게 식은 눈으로 용재를 바라봤다.
“시끄러. 와이번 오기라도 하면 너만 던져놓고 가버릴 거야.”
─키득키득
그 모습에 뒤따라오던 더벅머리 소년과 주근깨 소녀가 소리죽여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아이들을 본 호진과 용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둘의 대화가 제법 재밌게 느껴진 모양.
“흐음.”
그때 묘하게 싸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리니, 예은이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들이 좋으시네요. 저 혼자 정찰 보내신 동안 서로 사이가 많이 좋아지신 거 같아요.”
예은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 말에 담긴 싸늘함에 호진은 움찔했다.
예은은 아파트 이후부터 모든 정찰을 전담하는 중이다.
능력에 따른 효율적인 배치라고 하지만…….
언제 적과 마주칠지 모르는 긴장되는 상황의 연속과 혼자라는 고독함.
그것을 모두 떠넘긴 호진은 미안함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하하하하……,”
웃으며 얼버무리려던 호진은 단 1mm도 움직이지 않는 예은의 경직된 미소를 보며 빠르게 노선을 변경했다.
호진은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꺼낸 육포 한 봉지를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나름 자신이 챙겨온 보존식 중 가장 비싸고 맛있는 제품이다.
‘이거라면 예은 씨도 내 마음을 알아 주겠…….’
─찌익
예은은 육포봉지를 찢어버리곤 돌아서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여자 친구가 없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알았지?’
생각해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왜 저런 말을 들었는지 알기 위해선 저 말을 곱씹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것들 좀 드세요. 저기에 있는 바보 같은 오빠가 준 상여금이랍니다.”
예은이 육포를 소년과 소녀에게 쥐여주자 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담스러운 건지 아니면 어떤 건지 모르기 때문인지 먹기를 망설이는 아이들.
그때 그녀가 육포 한 점을 입에 넣고 질겅거리며 씹자.
아이들도 그녀를 따라 천천히 육포를 입에 가져가 씹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들은 씹는 것을 멈추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예은을 바라봤다.
“어라, 별론가요?”
예은이 묻자 아이들은 고개를 격렬하게 붕붕 가로저었다.
입에 든 것을 꼭꼭 씹어 삼키고 녹아내릴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두 아이.
형용할 수 없이 황홀한 맛에 취한 아이들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예은에게 감사하다는 듯 허리를 깊게 숙여 배꼽인사를 건넸다.
“별말씀을.”
예상보다 과한 반응에 민망했던 건지 예은은 맞절을 하듯 허리 숙여 인사를 받아준 후, 몸을 돌려 호진에게 다가왔다.
“더 줘요. 상여금.”
“……그럼요. 드려야죠.”
호진이 육포를 여러 개 꺼내 주자 예은은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빠짐없이 육포를 돌리고는 아이들에게는 추가로 몇 개 더 쥐어줬다.
꽤 넉넉하게 쥐여줬음에도 아이들은 아껴먹고 싶은 건지 육포를 씹지 않고 입에서 굴리기만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호진의 옆에 예은이 다가와 나란히 섰다.
“제가 정찰 임무를 전담하는 건 당신을 위해서예요.”
호진처럼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던 예은은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
호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고맙다는 한마디만 해주세요. 육포 같은 걸로 얼버무릴 생각 말고.”
잊고 있었다.
그녀의 노력과 수고를 잊었던 건 아니다.
호진의 마음 한편에는 늘 그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었으니까.
다만 그 감정을 그녀에게 전하진 않았다.
당연하지만 말은 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하지 않았기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분명 반성할 점이었다.
“고맙습니다. 예은 씨.”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그게 뭐예요. 나중에 다시 해주세요.”
호진의 인사에 예은은 투덜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예은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다시 출발하려고 몸을 일으킨 호진의 앞머리를, 마주 불어온 바람이 기분 좋게 쓸어 넘겼다.
나아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분명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이 호진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예은의 안내를 받으며 걷기 시작한 지 다시 10여 분이 흐르고.
눈앞에 있는 작은 둔덕을 지나자 탁 트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이어진 가도와 흔들리는 황금빛 벼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는 가을에 접어들어 오색 빛을 띠고 있는 마니산이 보인다.
조금 돌아왔지만 목표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듯 높게 솟은 산세.
호진은 왠지 산이 자신들을 반겨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