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7화 (27/241)

27화. 군대와 헌터 (4)

주 대위의 제안은 간단했다.

그건 바로 일행들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제안한 헌터가 되는 것이었다.

헌터가 된다면 일행들은 무기 소지가 가능했고, 독자적인 체계를 갖춰도 대대장이나 다른 피난민들이 간섭할 수 없었다.

주어지는 것은 자유와 동시에 두 가지 의무.

하나는 생존자들의 구출과 보호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괴물 처치에 앞장서는 것이다.

월급도 준다고는 하는데, 처리한 괴물들에 따라 성과급 위주인 듯하다.

뭔가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모험가 길드와 비슷한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 돈이 유의미할지는 의문이지만, 앞서 주 대위가 말한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괜찮은 방안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다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근데 시험은 어떻게 보는 겁니까?”

호진의 질문에 주 대위는 웃으며 대답했다.

“현재 정부 지침상, 플레이어 3레벨 이상인 사람들은 헌터가 될 수 있습니다.”

순간 호진은 할 말을 잃었다.

‘……대대장 녀석, 왠지 입대를 서둘러 강요하던 눈치더니.’

그 구릿빛 아저씨가 수작질을 부린 거였다.

애초부터 헌터 자격을 보유하고 있던 호진은 입대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방인들과 주연이를 제외한 일행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헌터 자격을 신청했다.

대위는 곧바로 일행들에게 무기를 돌려줬고, 이어서 부대의 경계와 맞닿은 건물 몇 채를 거처로 제공했다.

“그런데, 대대장님이랑 상의는 되신 겁니까?”

호진이 주 대위의 눈치를 살피며 묻자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보였다.

“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호진이 약간 놀라며 눈을 크게 뜨자 대위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전 제가 본 것만 믿습니다. 적어도 제가 어제 본 여러분들의 모습은…… 이 나라의 미래 그 자체였습니다.”

말을 잠시 멈춘 주 대위가 이어 말했다.

“쉽게 말해서 이건 정부의 투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쥔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 대위가 본 것은 플레이어가 가진 역량의 편린에 불과하다.

호진이 체감하는 플레이어의 가능성은 그 이상이었기에, 주 대위의 의견에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받은 투자를 몇 배로 갚아 주겠다고.

***

그날 오후.

점심이 지난 시점 호진을 다시 찾아온 주 대위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해주신 분은 찾아봤는데, 안 계셨습니다.”

“괜찮습니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호진은 내심 아쉬웠지만 티내지 않고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형은 이곳에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형 성격에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

사람이 싫어서 강화도 산골짜기에 틀어박힌 형이다.

사람들끼리 부대끼는 피난민 캠프 같은 곳에 올 리가 없다.

“그리고 일행분들 모두 헌터로 등록 완료했습니다. 다만, 그 외국인 친구분들은…….”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죠.”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부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임시에 불과했다.

혹시나 더 체류가 가능할지 물어봤지만 주 대위도 더 이상 손쓰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듣자하니 일행들을 헌터로 만든 일로 대대장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는데,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대대장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안 그래도 병사들이 부족한 상황에 사지 멀쩡하고 전투경험이 있는 자신이나 일행들을 보고 욕심이 안 났다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그래도 재입대를 시키려는 건 선 넘긴 했지.’

호진은 쓰게 웃으며 장비들을 점검했다.

“바로 가시는 겁니까?”

“네, 형 집으로 한번 가볼까 합니다.”

형이 사는 곳은 이곳에서 서쪽에 있는 마니산 근처 산골짜기다.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 아직 있을까 싶긴 하지만…….’

왠지 호진은 형이라면 그곳에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똑똑

“형, 준비됐어.”

용재다.

채비가 빠르게 끝난 모양이다.

“그래, 금방 나갈게. 아 그리고, 형 대학교 친구들도 떠날 준비하라고 해줘.”

“오키.”

그 대화를 듣던 주 대위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다른 분들도 가시는 겁니까?”

“용재랑 예은 씨만요. 박 순경님은 여기서 할 일이 있으셔서요.”

“아. 하긴, 박 순경님이 부대표시라고 들었습니다. 두 분 다 자리를 비울 수는 없겠죠.”

확실히 박 순경이 그런 느낌이긴 한다.

아파트 생존 그룹은 호진보다도 박 순경의 말을 더 따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대표니 부대표니.

‘누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건지…….’

물론 통솔자 역할을 자처하긴 했었지만 그런 체계는 만든 적이 없는데.

곤란할 따름이다.

그런 호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 대위는 부럽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생들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 호진 씨를 돕겠다고 바로 밖으로 나가다니. 전우애가 끈끈하네요.”

“네,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호진은 뭔가 민망해져서 뺨을 살짝 긁었다.

사실은 용재와 예은뿐이 아니었다.

생존자 전원이 따라오겠다는 걸 뜯어말리고 용재와 예은만 데려가는 거다.

다른 이들은 같이 움직이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었다.

안 그래도 급격한 행군에 일행 중 3명을 잃은 아파트 생존자들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충분히 쉬고 훈련하며 천천히 강해지는 편이 좋다.

호진은 박 순경에게 그들의 성장을 맡겼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날이 올 것이다.

벌써부터 서두를 필요는 없다.

주 대위와 호진은 창밖에 배웅을 위해 모인 사람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인 일행들.

이방인들도 준비를 마쳤는지 오와 열을 맞춰서 서 있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조심히 다녀오시죠, 아참.”

인사를 나누던 중 주 대위는 큰일 날 뻔했다며 주머니에서 검은색 물체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무전기입니다. 사용 방법은 아십니까?”

“대충은 압니다.”

예전에 의경에서 복무할 때 사용한 것과 비슷한 기종으로 보이는 무전기였다.

“위험한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이쪽에서는 항상 대기 중입니다. 반대로 이쪽에서도 용무가 있으면 연락드릴 테니, 12시와 18시마다 전원을 켜놔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호진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자 주 대위도 거의 맞절을 하듯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형님분이 무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네!”

인사를 마친 호진은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저벅저벅

잠시 뒤.

호진이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자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서서히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하자 부담스러웠다.

‘뭔가, 말해야 하나.’

호진이 고민하는 와중에 박 순경이 다가왔다.

“잘 다녀오세요, 호진 씨.”

“아, 예 감사…….”

평범하게 감사를 표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용재가 불쑥 껴들었다.

“아니, 박 순경님. 이런 공적인 자리에선 이제 대표님이라고 하라니까요.”

“아참, 그랬죠. 죄송합니다. 대표님.”

까먹었다며 머리를 긁적이는 박 순경.

“…….”

드디어 헛소리의 근원지를 찾은 듯 했다.

“재밌는 얘기네. 용재야, 내가 뭐라고?”

─우드득

호진이 웃으며 목을 풀자 용재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한 발 물러났다.

“어라? 대표 싫었어? 아니 그래도 우리 리더인데. 소개할 때 그냥 이름만 소개하기엔 밋밋해서……. 그럼 대장은 어때?”

─뚜둑

한층 더 격렬하게 목 꺾는 소리에 용재의 뒷걸음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때 예은이 용재를 가로막으며 말렸다.

“호진 씨, 힘 빼지 말죠. 용재도 나쁜 의도가 아니라 우리들 체면치레 때문이라잖아요.”

용재를 향해 다가가던 호진이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일행들이 헌터가 된다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는 쪽이 대외적인 이미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호진 개인의 발언과 헌터들 대표의 발언.

무게가 있는 것은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호진은 용재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려고 했던 게 미안해졌다.

호진이 사과하기 위해 입을 떼던 그때.

“마……마스터? 아니면 주인님?”

“…….”

“……아니네요. 그냥 때리죠.”

용재를 커버하려던 예은이 포기하고 돌아서자 둘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용재가 걷어차인 엉덩이를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아니, 물론 조금 장난쳤지만 너무 아프게 찬 거 아니야?”

“그러게 내가 고백 받은 얘기는 왜하고 다녀.”

“……그게 들렸어?”

“그럼, 그게 안 들렸겠냐.”

둘이 투닥거리며 걸어가자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이방인 둘이 쿡쿡 웃었다.

호진이 돌아보자 언제 웃었냐는 듯 입을 꾹 닫고 따라오는 이방인들.

“설마, 저번에 게이트에서 했던 내 고백 받은 썰까지 전부 알아들은 건 아니겠지.”

호진이 미간을 모으며 그들을 바라보자.

바로 뒤에 붙어서 따라오던 주황머리 주근깨 소녀와 더벅머리 소년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알아들었다는 것 같은데?”

용재가 고개를 갸웃하자, 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둘의 얼굴에선 감정이 훤히 드러났다.

이 둘은 이방인들 중에는 가장 어린 편에 속했는데, 아마 그 탓인 듯싶었다.

“이야, 번역기 성능 확실하네.”

“……넌 앞으로 이 사람들 앞에서도 입조심해라.”

자신의 흑역사가 동네방네 소문이 나다 못해 이젠 이차원 사람들도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엉덩이 한 번 걷어찬 걸로는 부족하다.

‘한번 혼낸 일로 다시 때릴 수도 없고,’

호진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후.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들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현지인에게 듣는 다른 세계 정보라니,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값진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다’ ‘아니다’를 제외한 다른 의사표현 자체를 꺼려했다.

무엇보다 그 세계에 대해 물으면 고통스러워했기에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일종의 금제나 규칙이 아닐까 싶긴 한데, 그 사실 여부조차 확인은 불가능했다.

‘궁금한 게 많은데…….’

그 세계에는 어떤 세력들이 있는지.

괴물들은 어떻게 상대하는지.

등등.

호진이 고개를 돌아보자 주근께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소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어차피 고개를 돌리면 또 호진을 빤히 쳐다볼 거다.

‘저들 눈엔 내가 신기하게 생긴 걸까?’

이방인들의 생김새는 서구적인 편이다.

대체로 영드나 미드에서 나오는 사람들 같다고 할까.

저런 외모가 보편적인 세상이라면 동양인들의 외모가 특이해 보일 수도 있겠다.

이세계 사람이라니.

평소 판타지 마니아인 호진으로서는 정말 두근거리는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이세계 괴물들보다 저들을 먼저 만났다면 그랬겠지.’

괴물들을 보고 놀란 경험은 저들을 만났을 때의 감동을 반감, 아니 반의 반으로 깎아먹었다.

이젠 엘프나 드워프, 용이라도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흥분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호진의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잡혔고, 곧바로 잠시 손을 들어 일행들을 멈춰 세웠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사위.

그 적막 속에서 오직 호진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탁탁 타닥 탁탁

척후 역할을 하던 예은이 보내는 신호다.

화살대를 서로 부딪치는 박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지금은 정지를 뜻하는 신호.

호진의 손짓에 이방인들과 용재는 신속하게 가도에서 벗어나 옆에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펄럭

거대한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그림자 하나가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날아갔다.

“드……래곤?”

용재의 조용한 중얼거림이 한동안 귀에서 맴돌았다.

호진은 그제야 자신이 본 게 환상이 아님을 깨닫고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그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