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군대와 헌터 (2)
─저벅 저벅
수십 개의 강렬한 빛이 일렁이며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빛에 노출된 호진은 눈을 찡그렸다.
손을 들어 빛을 가리자 그제야 일정한 간격으로 선 인형(人形)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뭐죠?”
“…….”
박 순경이 당황한 말투로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어둠 속을 볼 수 있는 호진과 예은만 상대가 인간이라 어림짐작할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빛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뜨고 있지 못했다.
그렇게 강렬한 빛이 점점 다가오던 와중에, 구름 밖으로 고개를 내민 달이 어둠이 드리웠던 해안가를 환히 비췄다.
동시에 다가오던 이들의 모습이 달빛아래 희끄무레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눌러쓴 철모 아래 검게 칠한 얼굴.
단단한 발소리를 내는 검은색 워커화와 얼룩덜룩한 군복.
어깨에 견착한 소총의 총구는 검은 광택을 흩뿌렸다.
예상치 못한 존재들의 등장에 모두가 얼어붙어 있던 그때.
정적을 깨고 생존자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구…… 군인! 군인이다!”
그 외침을 기점으로 일행들 사이엔 일순 소란이 번져나갔다.
“사…… 살았다!”
“드디어!”
“여기요! 여기입니다!”
그 중 한 명이 방패를 집어던지고, 군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잠깐 진정 좀……!”
그 돌발 행동에 호진은 손을 뻗어 그를 말리려 했으나,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 우르르 방패 밖으로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탕!
갑자기 울려 퍼진 총성에 사람들은 우뚝 멈춰 섰다.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흐르고.
군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앞으로 나오더니 확성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후우 후우.”
바람을 불어 소리를 체크한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동작 정지. 동작 정지. 더 다가오면 발포하겠습니다.”
차가운 확성기 속 목소리에 사람들은 한층 더 몸을 경직시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진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군인이라고 해도 반드시 구조대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정부의 통제를 받는 군대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
하물며 정규 군대라 하더라도 저들의 눈에 이쪽은 단순 생존자들이 아니다.
웬 방패와 칼, 창, 도끼, 활로 무장한 수상한 그룹.
심지어 박 순경쯤 되면 몸에 철갑옷까지 두른 중갑 보병 그 자체다.
‘이러면 나가린데.’
호진이 곤란해하는 사이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무장들을 해제하시고 저희의 통제에 따르시길 바랍니다.”
“…….”
사람들은 예상치 못하게 강압적인 군인들의 모습에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은 심상치 않은 부위기 탓인지 무기를 더욱 움켜쥐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철컥
기묘한 기류 속 군인들의 분위기가 슬며시 바뀌려는 순간.
호진이 입을 열었다.
“모두 무기를 내려놓으시죠.”
그 발언이 예상 밖이었던 걸까.
“네?”
“아니……. 그래도 어떻게.”
놀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시선이 모두 호진을 향하자 호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힐끔 군인들을 쳐다본 호진이 이어 말했다.
“제대로 된 군대 같습니다. 믿어보죠.”
호진이 바라본 것은 확성기를 든 사람이었다.
어깨에 찬 견장으로 보아 대위.
젊은 중대장으로 보이는 그는 주변에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제발’이라는 단어를 누차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대위도 그렇지만, 병사들의 흔들리는 눈빛에 담긴 감정들도 긴장과 두려움이 전부였다.
이중에서 전투를 바라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호진은 그렇게 판단했다.
─탁
호진이 먼저 무기를 내려놓자 눈치를 살피던 일행들도 하나둘 그를 따라 무기를 내려놨다.
그와 동시에 그 모습을 본 상대 쪽의 분위기도 크게 누그러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호진의 선택이 맞은 듯했다.
“저희는 생존자들입니다. 지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호진이 외치자 대위도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저희는 30여단 보병 중대입니다. 규정에 따라 움직여만 주신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확답을 들은 호진은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쁜 의도를 가진 집단이었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거다.
‘어쨌든 항복했겠지만.’
애초에 총을 든 적을 상대로 날붙이를 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괴물들에겐 효과가 미묘한 듯했지만, 인간은 총 한 방이면 죽는다.
총은 인간을 죽이기 위한 무기이니까.
상대의 의도가 무엇이든 우선은 항복 후에 나중을 도모하는 게 맞았다.
다행히 그럴 일은 없을 듯 보이지만 말이다.
군인들은 생존자들을 경계하며 무기를 빠르게 회수했다.
“갑옷도 벗어야 합니까?”
“어어…… 그게.”
용재가 묻자 그 앞에 선 군인은 당황한 듯, 뒤에 있는 소대장을 쳐다봤다.
‘짝대기가 두 개. 일병인가?’
소대장은 당황한 일병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대신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갑옷 안에 무기를 숨긴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어색한 정적.
“……내놓으십시오.”
정곡을 찔린 용재는 주섬주섬 갑옷 안에 숨겨뒀던 나이프와 손도끼를 차곡차곡 꺼냈다.
무려 5개.
“형, 저 사람 제법이네. 눈치가 엄청 빨라.”
“…….”
소대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용재와 호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용재를 마지막으로 무기를 모두 회수하자, 일행들을 향했던 총구들이 치워졌다.
“다들 정숙하시고 저희를 따라와 주십시오.”
대위가 앞장서 출발하자, 길게 늘어선 일행들은 군인들에게 경계에 가까운 호위를 받으며 그 뒤를 쫓았다.
그렇게 걸어가기를 10여 분.
대위와 군인들은 커다란 대교 위를 망설임 없이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익숙해 보이는 그들의 걸음걸이를 따라 빼곡한 엄폐물들을 통과해가며 다시 한참을 걸어 나가자 거대한 철문과 벽이 우리를 가로 막았다.
그것도 잠시.
─철컹
대위가 무전기로 암구호와 소속을 말하자 곧장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충성!”
“충성.”
문을 열어준 병사의 인사를 받아준 대위는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강화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정말 길었다.
하지만 값진 여정이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캠프를 보니 더더욱 그런 마음이 샘솟았다.
호진과 일행들은 어제 강화도에 도착했다.
잠시 철문 안쪽에 있는 검문소에서 물과 음식을 먹는 동안, 군인들은 일행들의 신상정보를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이방인들은 통과하지 못해 구류됐지만, 호진이 대학교 지인들이라고 잘 둘러댄 덕에 일시적으로 입장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픈 곳이 없는지 메디컬 체크를 했는데, 의무인 것으로 봐선 아무래도 감염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인 듯했다.
그렇게 모든 과정이 끝나고 우리는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구호 캠프로 이동할 수 있었다.
군대에게 보호받고 있기 때문일까.
힘들게 도착한 구호 캠프는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했다.
“엄마, 엄마, 또 사람들이 왔어요.”
“아이고, 다들 고생했어요. 어서 와요.”
낯선 우리들을 배척하지 않고 반겨준 피난민들은 우리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쉴 공간을 배정해줬다.
전기도 들어왔고 뜨거운 물이 나왔으며 노약자는 우선적인 배려를 받았다.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지만, 호진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며칠을 보낸 탓에 그것들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비단 호진만이 아닌 듯 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친절과 편안함은 생존자들에게 혼란과 불편함을 줬다.
특히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몰래 하나씩 챙기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3일간의 투쟁이 사람들을 뼛속까지 뒤바꿔 놓은 것이다.
하지만 다들 지친 탓에 배를 채우자마자 곧장 곯아떨어졌는데, 피곤한 것은 호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싸워온 만큼, 배정받은 텐트에 들어가자마자 기절해버렸다.
호진은 아예 부대에 들어오고 난 후에 기억이 희미한 수준이었다.
다음 날 눈부신 햇살과 함께 눈을 뜬 호진.
정말 달콤한 잠을 자고 일어난 호진은 몸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움을 느꼈다.
그때 들려오는 주호와 주연이의 목소리.
“야, 오주연. 씻고 밥 먹어야지!”
“어제 씻었어!”
“……그래, 잘했어.”
“웅!”
텐트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호진은 작게 미소 지었다.
‘여기로 오길 잘했어.’
이제는 이곳에서 형만 찾으면 된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강화도 안쪽에 있는 형을 찾아가기만 하면 일이다.
호진은 몸을 일으켜 텐트 밖으로 나가는데 옆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잘 주무셨나요?”
방금 씻은 듯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 내던 예은이었다.
매끈한 피부와 윤기 나는 검은 머릿결.
전형적인 고양이상인 예은은 씻은 것만으로도 꽤나 눈에 띄는 외모를 지녔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진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기름으로 떡진 머리와 피가 덕지덕지 묻은 피부가 손끝에서 느껴졌다.
예은과 눈이 마주친 호진은 민망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잤습니다. 좋은 곳이네요.”
“네, 정말 좋은 곳이에요.”
“……다 좋은데, 내 도끼는 언제 돌려주는 거지?”
옆 텐트를 젖히고 나온 용재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글쎄. 일단 너는 좀 씻어야겠다.”
침 자국이 선명한 용재를 보며 호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형보다는 아닐걸. 누나, 여기 씻는 곳이 어디…….”
용재가 말을 잇던 그때.
누군가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어제 만났던 그 대위였다.
“수고하십니다.”
“네, 대위님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호진이 대위의 인사를 정중하게 고개 숙여 받자 대위는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편히 쉬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 감사할 따름입니다.”
호진이 재차 인사를 하자 대위는 손을 저었다.
“국민을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보다 그룹의 대표시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대표……는 아니지만, 무슨 일이시죠.”
“대대장님이 찾으십니다.”
‘대대장이라…….’
이 캠프의 규모로 봐선 아마도 책임자일 터.
호진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언제쯤 가면 될까요?”
“바로면 좋겠지만…….”
호진을 잠시 바라본 대위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하실 것 같군요.”
“……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몰골을 깨달은 호진은 헛기침을 한 후, 한 시간 후로 약속을 잡았다.
한 시간 후.
따듯한 물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식사를 마치기까지 50분이면 충분했다.
순식간에 단장을 마치고 호진은 여유롭게 대대장이 있다는 관사에 도착했다.
경비병에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대대장의 집무실 앞.
─똑 똑 똑
호진이 목재로 된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에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오게.”
호진은 왠지 모를 긴장을 느끼며 차가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