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군대와 헌터 (1)
─퍼걱
“으아아. 지겹다 지겨워. 형. 얼마나 남았다고?”
용재는 자신이 쪼갠 감염자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물었다.
“글쎄, 거의 다 온 거 같긴 한데…….”
박 순경과 만나기로 한 대명포구는 분명 이 근처였다.
게이트에 들어갔다 나오기까지 넉넉하게 4시간.
잠시 휴식 후 이곳까지 오는데 다시 8시간 정도가 걸렸다.
합쳐서 거의 딱 한나절.
어쩌면 박 순경보다도 먼저 도착한 것일지도 몰랐다.
‘다만…….’
─퍼억
“이놈의 감염자 새끼들은 끝이 없냐!”
용재가 분노를 토하며 달려드는 감염자들을 양분했다.
호진도 감염자들을 베어 넘기며 약간이지만 화가 난 상태였다.
그 분노는 피곤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이트에서 나와 이곳까지 향하는 강행군이 일행들을 지치게 한 것이다.
도심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사방에 널린 게 감염자들이었기에.
일행들은 쉬지 않고 싸움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이런 행군과 생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느꼈지만 착각이었다.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보충한다고 전부가 아니었다.
호진을 포함한 일행들은 정신적으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어찌됐든 3일 전까지만 해도 모두 일반인이었기에.
너무 잦은 긴장이 그들의 신경을 닳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런 강행군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반복적인 고난과 역경은 늘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으니까.
“참마격(斬馬擊)!”
용재가 도끼 자루의 끝을 쥐고 휘두르자 그 앞에 있던 감염자 여럿이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저것이 용재가 ‘야만전사(Barbarian)’로 전직하며 얻은 스킬 중 하나였다.
위력만 보자면 호진의 거합과 비슷할 정도다.
속도 면에서는 부족한 감이 있지만, 대신 범위가 넓어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용이해 보였다.
야만전사(Barbarian).
용재가 전직한 이 직업은 싸울수록, 그리고 위기일수록 강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스킬도 죄다 수비를 등한시하는 공격들뿐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개척자(Pathfinder) 칭호를 지닌 용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직업이었다.
─슉 슈슉
이어 바람을 찢고 날아온 화살 두 발이, 용재와 호진이 처리하기 애매한 위치에 있던 감염자들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퀵 노킹(Quick Nocking).’
거의 동시에 발사한 것 같은 이 화살들은 모두 예은의 작품이다.
예은 역시 레벨 10을 달성 후 ‘사냥꾼(Hunter)’으로 전직.
그 은밀함과 기동성을 살려 일행의 척후로 활동을 해주는 중이었다.
사냥꾼(Hunter)은 활만 쏘는 직업이 아니었다.
각종 투척술로 시작해 트랩 설치와 척후활동.
단검이나 창 같은 무기도 원한다면 주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듯했다.
다만, 다른 무기에 별 관심이 없는 예은은 척후와 활에만 집중하며 팀의 눈이 되었다.
호진이 화살이 날아온 곳을 보자 초록색 야광봉이 짧게 점멸했다.
서둘러 이동하라는 예은의 신호였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니 빨리 이동하라는 뜻.
“빠르게 이동합니다.”
끄덕─
14명의 이방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소 지친 듯 보였지만 싫은 내색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기특했기에 호진은 살짝 웃어 보이면서도 내심 아쉬웠다.
‘레벨이 안 오를 줄이야.’
처음 호진은 아파트의 생존자들에게도 그랬듯, 이방인들의 레벨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레벨은커녕 플레이어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이들을 감염자들 한복판에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호진은 그룹의 뒤에 달라붙는 감염자들을 처리하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이제와 이런 녀석들 몇 명 죽인다고 레벨이 오르진 않겠지만…… 뭔가 시야가 달라진 기분이야.’
이방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선 시야를 더 넓게 활용하고 재빠르게 위험을 배제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호진은 본인도 모르게 단련되고 있었다.
잠시 후.
예은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자 더 이상 들러붙는 감염자들은 없었다.
“후, 무슨 상황입니까?”
잠시 들뜬 숨을 통해낸 호진이 질문하자 예은이 물통을 건네며 답했다.
“전방 800m 쯤에서 전투가 있는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호진은 물을 들이켰다.
그러곤 호흡을 고르며 골목의 귀퉁이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쾅 쾅.
“……막아!”
“……조금만 더…… 야!”
호진은 스탯이 오르며 향상한 신체능력으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들을 수 있었다.
찢고 치고 부딪치며 나는 비명과 고함들.
그중 명령을 내리듯 소리치는 한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박 순경님입니다. 어쩌면 아파트 생존자들이랑 함께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들린다고? 누나도 들려요?”
호진의 말에 용재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예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헌터로 전직해 기척에 민감한 예은조차 저 소란 속에서 목소리를 구분해낼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제가 선두, 두 분이 후미에서 따라와 주세요.”
호진의 말에 두 사람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의 중요함을 강조하던 호진이다.
그가 정찰 없이 돌파하겠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말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챈 것인지 주저앉아 숨을 돌리던 14명의 이방인들도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입니다. 합류 후에는 쉴 수 있으니까. 전력으로 따라오세요.”
호진의 말에 이방인들은 모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그들의 무한한 신뢰에 호진은 부담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달리기를 다시 10여 분.
호진은 앞을 가로막는 장해물이나 감염자들을 거침없이 베며 주파했다.
점점 선명해지는 소음과 비명들은 이제 지척에 다다랐다.
코너를 돈 순간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함께 탁 트인 항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 멀리 방패로 세워진 벽과 그 뒤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대열 유지! 그 상태로 삼 보 후퇴!”
선두에서 철갑옷을 두르고 방패와 메이스를 든 사내.
박 순경이 외치자 사람들은 충실히 그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뒤쪽은 어두운 밤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바다로 빠지기라도 할 생각인가?’
위험한 생각이다.
바다에 뭐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패를 든 사람들이 바다 쪽으로 향하자 예상치 못한 현상이 벌어졌다.
감염자들이 바다로 다가가길 꺼리는 듯 덤벼드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어쩌면 물을 싫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감염자들이 무서워하는 게 있다니……,’
아파트 옥상에서의 일전을 떠올리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어쨌든 저들의 약점이 물이라면 바다로 뛰어드는 것도 최악의 경우 고려해볼 만할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다.
“박 순경님! 조금만 더 버티세요!”
호진은 앞을 가로막는 감염자들을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더니 일순 소란스러워졌다.
“엇……. 저 사람은?”
“아따. 올 줄 알았다니께요!”
그중 선두에 선 박 순경은 아예 방패조차 스르륵 내리며 이쪽을 바라봤다.
“……호진 씨?”
‘반가운 건 알겠지만 조금만 더 집중해줬으면 좋겠는데.’
“집중하세요! 1분, 1분만 버티면 저희가 그쪽까지 가겠습니다.”
“네……넵! 대열 정비! 방패 높이 드세요!”
호진이라는 희망을 본 그들은 한층 더 견고하게 감염자들을 막아냈다.
호진은 가로막는 감염자들을 잇따라 베며 점점 생존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앞으로 조금.
조금만 더 하면 합류할 수 있다.
그때.
─오오오오오오오오!
울부짖는 감염자의 소리가 항만에 울려 퍼졌다.
“형……. 이건!”
“…….”
감염자 머리를 터트리던 용재가 호진을 돌아보자, 호진은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두두두두두
땅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공명하듯 울려 퍼지는 감염자들의 울부짖음.
─오오오오오오!
아파트에서 화재경보기가 울린 후와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다.
저 울부짖음은 감염자들의 대규모 습격을 알리는 징조.
설마 도심도 아닌 이곳에서 이 정도 규모의 감염자들이 몰려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놈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못한 자신의 불찰이었다.
탁 트인 곳에서 놈들을 막는 것은 무리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멈추지 마! 계속 길을 열어! 빠르게 합류한다!”
호진은 감염자들을 베어 넘기며 일행들을 챙겼다.
이렇게 된 이상 도박이긴 하지만 정말 바다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지금이 아까 말한 최악의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앞만 보고 감염자들을 베어나가기를 한참.
─서걱
박 순경이 이끄는 생존자 그룹과 호진 사이에 있던 마지막 감염자가 쓰러졌다.
“호진 씨! 뒤에!”
박 순경의 다급한 외침에 뒤를 바라보자, 방금 지나온 골목길과 대로에서 감염자들이 물밀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달려!”
호진의 외침에 일행들은 박 순경이 이끄는 그룹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방패 열어!”
박 순경의 구호에 이어 붙었던 방패들이 한 칸 간격으로 벌어지고 그 안으로 호진의 일행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호진이 들어서자 박 순경이 급하게 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제 어쩌죠?”
“후, 여기서는 못 버텨요. 놈들이 싫어하는 거. 바다 맞죠?”
박 순경은 잠시 놀란 표정을 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정확히는 바다가 아니라 물일 겁니다. 소나기가 왔었는데 놈들이 몸을 피하더군요.”
예상이 들어맞았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바다로 들어가 놈들이 없는 곳까지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답에 박 순경은 당황하며 답했다.
“놈들이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바다에 들어간다 해도 해안가를 따라서 쫓아올 거예요.”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제가 미끼가 됩니다. 시간을 끄는 동안 다들 피하세요.”
“그건 너무 무모한……!”
박 순경이 급하게 반박하려하자 용재가 그 말을 끊었다.
“박 순경님. 형 말대로 하죠. 형은 저놈들 다 죽이고도 남아요.”
용재의 말이 조금 과장되긴 했지만, 사실 호진도 감염자들 상대로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긴 했다.
─오오오오오오오!
우리들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놈들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서두르세…….”
호진이 박 순경을 재촉하려던 그 순간.
─즈쾅
어디선가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건…….’
“엎드려!”
갑작스러운 호진의 외침에 생존자들과 일행들 모두 방패 뒤로 몸을 힘껏 웅크렸다.
─쾅!
─삐이
폭발음과 함께 눈앞을 뒤엎는 시꺼먼 연기.
폭약 냄새가 진동을 하는 와중에 귀에서는 작은 이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연이어 들려오는 폭발음.
─쾅! 쾅! 쾅!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땅이 흔들린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돌 부스러기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육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호진이 일행 앞에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포격은 점차 범위를 넓혀 감염자들이 빼곡한 대로와 건물들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끝나지 않을 듯 떨어지던 포격이 멈추자 일행의 앞에는 평평하고 새까만 대지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뭐야……?”
용재가 넋이 나간 듯 서서 묻자,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귀를 막았던 손을 떼며 답했다.
“박격포여. 아마도 팔 하나 박격포 같은디…….”
달리 포에 익숙한 사람은 없는 듯, 그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친 사람 있습니까?”
호진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 이방인들과 생존자들.
모두 무사한 듯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지금 할 것은 하나뿐이다.
“일어들 나시죠. 움직이겠습니다.”
당장 위험에서 벗어났다지만 이곳이 안전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일행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는 순간.
─팟 팟
어둠속에서 강렬한 빛들이 일행들을 향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