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안개 낀 해안가 (6)
─띠링
「치명타 성공」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사냥꾼의 눈 LV1 → 사냥꾼의 눈 LV2」
「D급 던전 ‘하픈덤의 안개 낀 동쪽 해안가’를 클리어했습니다.」
「던전의 보스 ‘광산에 눌러 붙은 어둠’을 홀로 처리했습니다. 보상이 가산됩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미완성된 이어붙인 왕(Verkettet König)’을 처리했습니다.」
「퀘스트 완료.」
「알 수 없는 힘이 몸에 깃듭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호진은 허물어져 내린 시체의 산 위에 주저앉아 멍하니 창들을 확인했다.
우선 가장 먼전 확인한 것은 ‘사냥꾼의 눈’이었다.
예전에 고블린 이후로 처음 발동한 치명타 효과는 굉장했다.
불가능과 열세를 한순간에 뒤집어엎는 힘.
앞으로 자신이 강해질수록 치명타는 더더욱 승부의 판도를 뒤집는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발동 조건을 알 수 없는 지금, 아직까진 신용할 수 없는 힘이었다.
‘급소 가격’이라는 명제가 전부라면 여태까지 단 2번만 발동되지는 않았을 터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천천히 조건을 알아봐도 좋겠지.
그다음으로는 던전 클리어 보상이었다.
「해안가 마을의 낡은 밀교(密敎)」
「종류: 도서」
「정보: 해석할 수 없는 용어들이 적혀 있는 낡은 경전입니다. 일부분이 찢겨있습니다.」
“…….”
저번에 공양을 저지한 보상으로는 ‘하이 포션’이라는 것을 받았었다.
먹거나 바를 수 있는 만능 치료제.
다소 적힌 정보가 약장수의 멘트와 같았지만, 그래도 그건 사용처가 분명한 아이템이었다.
반면 이건 어디다 써야 할지 감조차 오진 않는다.
혹시나 해서 책을 펴봤지만 알림창의 정보에 적혀있듯, 책에 적힌 글씨는 조금도 알아볼 수 없었다.
‘아니, 누가 봐도 알 만한 거 말고 좀 도움이 되는 내용을 적어주든가…….’
세삼 알림창의 비효율성에 투덜거리던 호진은 책을 덮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황상 이 책은 분명 인신 공양을 벌이던 종교와 관련이 있을 터다.
어쩌면 벽에 새겨졌던 조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호진은 그 조각의 모양과 이들의 특징을 상기하며 다음 알림을 살폈다.
마지막으로는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창이다.
보상이라고 언급되진 않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몸에 깃들었다고 한다.
솔직히 이건 찝찝하기만 했다.
이런 정체도 모를 끔찍한 것을 죽이고 난 후 얻은 힘이다.
마음 같아선 조금이라도 이것과 연관된 힘을 얻고 싶진 않았다.
딱히 변화를 느낄 순 없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빴다.
“흠, 그나저나 이름이 다르네.”
알림 창을 모두 닫은 호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D급 던전의 보스라 명시되었던 녀석의 이름은 ‘광산에 눌러 붙은 어둠’이었다.
반면 퀘스트에 등장한 이 녀석의 명칭은 ‘이어붙인 왕(Verkettet König)’이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걸까?
호진은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이곳의 보스 ‘광산에 눌러 붙은 어둠’은 마을 주민들에게 공양을 받는 존재. 혹은 인신공양을 주도하는 주체이다.
하지만 녀석은 어느 날 녀석은 자취를 감췄다.
왜?
이곳에 다리가 묶였기 때문이다.
몸에 덕지덕지 이어붙인 시체들 때문이라도 터널을 지나가긴 무리였을 것이다.
그 덕분에 ‘이어붙인 왕(Verkettet König)’이라는 이명도 가지게 됐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녀석은 왜 이런 존재가 된 것일까?
자처한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알림 창들을 미루어보았을 때.
놈은 ‘이름 없는 책(Namenloses Buch)’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추측이지만 감염자들의 몸도 다른 시체처럼 흡수할 생각이었을지 모르겠다.
‘던전 바깥의 수많은 감염자들을 전부 흡수했다면…… 과연 재앙이라 할 만했을지도.’
“뭐가 됐든, 끝나긴 했네.”
고생한 것에 비하면 보상들이 미묘했지만 끝났다는 사실에 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보상을 기대하고 들어온 게 아닌,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들어온 거기도 하고.’
몸을 일으킨 호진은 시체들 더미를 내려와 들어왔던 터널을 향했다.
올 때는 꽤 길었던 것 같은데 돌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나저나, 용재랑 예은 씨는 아직도 안 일어난 건가?’
거의 2시간이 넘는 시간 기절해있다는 것도 뭔가 이상했기에 호진은 서둘러 둘을 눕힌 곳을 살폈다.
텅 비어있는 자리.
그 즉시 호진은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둘이 누워있던 자리에 전투의 흔적은 없었다.
‘일어났다면 나를 따라 숨겨진 터널로 들어오거나 공동에서 기다렸어야 할 텐데.’
달리던 호진은 동굴의 입구가 보일 때 쯤 밖에서 낯선 인기척을 느꼈다.
그 수는 최소 열에서 열다섯.
‘아직 적들이 남아있었나?’
호진은 굳이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구출은 속도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검을 뽑아든 호진은 동굴에서 뛰쳐나오는 즉시 인기척이 나는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닥
동굴 밖으로 튀어나온 호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허름한 차림새의 젊은 남녀 열댓 명과…….
“으악! 깜짝이야! 뭐야? 왜 형이 거기서 나와?”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용재였다.
검을 거의 휘두르기 직전이었던 호진은 간신히 공격을 멈췄다.
호진을 본 젊은 남녀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호진이 휘두른 검 근처에 있던 몇몇은 털썩 주저앉을 정도였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예은 씨는?”
“워워, 형 진정해. 예은이 누나도 무사해. 이 사람들도 위험한 사람들 아니고.”
호진이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묻자 용재가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펼치며 답했다.
‘하긴.’
호진이 봐도 그들은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스킬은 아니지만 축적된 경험이 상대의 강함을 가늠하게 해줬다.
일종의 전투력 측정기라고 할까.
이들은 서 있는 자세로 보나 표정으로 보나 겁에 질린 일반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사람들은 뭐야?”
호진이 천천히 납검하며 묻자 용재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여기 마을 사람들한테…… 묶여있던 사람들이야.”
그 말에 호진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화해서 말했지만 마을사람들한테 사육당하던 사람들이었다.
“형이 안 보여서 찾으러 다니다가 마을에서 발견했어. 지금도 예은 누나는 형 찾으러 다니는 중이고. 그나저나 형은 왜 거기서 나와?”
“……재단 뒤에 있던 터널 못 봤어?”
“재단 뒤? 아아 그 붉은 천이 씌워져 있던? 거기가 왜?”
용재가 당연한 걸 되묻자 호진이 약간 의아해하며 답했다.
“그래, 그 벽화가 있던 곳.”
“무슨 벽화? 붉은 천 뒤엔 그냥 벽이었잖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은 용재가 갑작스럽게 인상을 찡그리곤 되물었다.
“……아닌가? 그 붉은 천 뒤에 뭐가 있었나? 그러고 보니 형이 그걸 치운 후 쓰러졌던 것 같은데.”
뭔가 혼란스러운 듯 손톱을 물어뜯는 용재.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손톱 끝에 피가 살짝 맺혔다.
─탁
그때 그 손을 낚아챈 호진이 용재의 어깨를 짚고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됐어. 중요한 거 아니야.”
“어어?”
“됐다고. 나가기나 하자.”
“으……응.”
호진은 당황스러워하는 용재의 팔을 잡고 마을로 향했다.
기억이 혼란스럽다는 건 일종의 방어기제다.
호진은 고통스러웠지만 정신 오염을 견디고 회복해냈다.
아마 용재는 그것을 하지 못한 듯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자신이 경험한 정신 오염은 감기와 같았다.
한동안 자극하지 않는다면 몸이 천천히 적응하고 언젠가는 이겨낼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호진은 힐끗 뒤를 바라봤다.
아직도 자신이 두려운 듯 시선을 마주친 젊은 여자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딱히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처음에 준 인상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호진은 화제도 돌릴 겸 용재에게 그들에 대해 물었다.
“저 사람들은 어때?”
“어, 우선 내 말에는 반응하는 것 같더라고. 그런데 말을 하진 않더라.”
“왜?”
“글쎄. 잘 모르겠어. 그런 거 아니야? 파브르의 개?”
“…….”
‘파브르는 곤충학자란다. 용재야.’
호진은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익숙하기도 하고, 용재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알아들었으니까.
파블로프의 개.
심리학의 행동주의 이론가인 파블로프가 한 대표적인 실험이다.
그들은 호진이 검을 들고 달려들 때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한테 소리를 못 내도록 반복적인 학습을 받은 결과일 터.
‘생각해 보니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네. 굳이 따지자면 조작적 조건화이려나?’
먹을 것이나 폭력, 혹은 다른 무언가로 행동을 강화하거나 처벌을 반복한 것은 스키너가 주장한 조작적 조건화에 더 적합하다.
문득 호진은 대학교에서 배웠던 심리학 이론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고등학교 때 호진은 자신의 호승심에 혐오감과 죄책감을 느꼈었다.
그렇기에 진학한 것이 심리학과였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뭐, 재밌긴 했으니 됐지만.’
의외로 사람의 심리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은 즐거운 작업이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이제 와선 어디에 써야 할지 알 수 없는 것들뿐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걷던 사이 마을에 도착한 호진과 사람들.
저 멀리 집 사이를 뛰어다니는 예은의 모습이 보여 호진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그것을 본 예은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제스처를 한 뒤 마주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무사하셨네요. 다행입니다.”
호진이 먼저 말을 꺼내자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예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매번 끝까지 함께 싸우질 못하네요.”
아무래도 기절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물론 전투 시 일행들을 배려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하지만 정말 힘들고 쓰러지고 싶을 때, 힘을 주는 건 언제나 동료들의 존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
만약 혼자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반복한다면 금세 신경이 닳아 없어질 것이다.
나아가 지금은 지켜야 할 존재들이지만 언젠가는 등을 맡길 동료가 될지도 모른다.
세상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제법 많은 법이다.
이 모든 걸 전할 순 없지만.
─툭툭
여전히 시무룩한 예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호진은 게이트를 향하며 말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
이에 예은은 어깨를 곳곳이 펴며 대답했다.
그 대답하는 얼굴에는 시무룩함 대신에 각오와 열의가 들어찼다.
호진이 살짝 웃으며 게이트를 향해 걷던 그때, 새로운 알림창이 떴다.
─띠링
「던전화되었던 공간이 점차 원래 세계로 귀속됩니다.」
「게이트 소멸까지 남은 시간 2:00」
처음 보는 정보다.
던전화와 원래 세계로의 귀속이라니.
흥미롭다.
물론 지금 알 수 있는 건 보스를 잡으면 게이트가 닫힌다는 사실뿐이다.
이전 개미굴 때는 정신이 없어서 이 사실조차 지금 알았다.
하지만 알림의 정보로 유추 정도는 가능했다.
던전은 세계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공간이며, 보스를 잡으면 그 세계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저 사람들과 이교도들도 그 세계의 주민들이었겠지.’
아무것도 모르던 처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많은걸 알게 된 것 같다.
‘이렇게 정보를 얻다 보면 나중에는 이 일의 원인과 발단도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 모든 일에 만약 책임자가 있다면, 호진은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호진은 뒤를 돌아 자신을 따라오던 젊은 남녀들에게 물었다.
“이곳에 남을 겁니까? 아니면 따라올 겁니까?”
던전화 되었던 이곳이 원래 세계로 귀속된다면 이곳에 그대로 남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애초에 던전 안인 여기서 저들과 말이 통한다고, 밖에서도 말이 통할지는 모르는 일이고.
호진의 질문에 그들의 동공은 또다시 세차게 흔들렸다.
그중 일부는 호진의 검과 게이트를 번갈아 바라봤다.
“……딱히 이곳에 남는다고 해도 해치지 않습니다. 필요하시면 먹을 것도 조금 나눠드리겠습니다.”
호진의 말에 몇몇은 대놓고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럼에도 남겠다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호진이 배려하는 모습에 뭔가 확신을 얻었는지 뒤에 나란히 섰다.
좋게 말하면 오와 열을 잘 맞춘 거고, 솔직히 말하면 오리 새끼들이 졸졸 따라오는 것 같았다.
“…….”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아까까지 호진을 두려워하던 이들은 이제 그의 등만을 쫓았다.
자신과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도 별로였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초롱초롱 쳐다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만 쳐다보십시오.”
호진이 괜히 정색하는 척 이들에게 말하자 그들은 화들짝 놀라 급히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내버려뒀다간 끝도 없이 쳐다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서는데, 자신을 보며 입꼬리를 움찔거리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하네요.”
“맞아. 너무해, 형. 나도 쳐다보지 말까?”
“…….”
예은 씨는 처음이니까 봐준다.
용재는…….
‘후, 그래도 이번에 고생했으니 한 번은 봐준다.’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재와 예은은 호진의 뒤를 따르며 키득거렸다.
“은근 부끄럼쟁이라니까요.”
“형이 숫기가 없긴 해요. 예전에 같은 도장 후배가 형한테 고백했는데 형이 씹었거든요? 나중에 형한테 물어보니까, 찬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대답을 못한 거더라고요.”
응, 아니다.
역시 용재는 나가면 조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