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2화 (22/241)

22화. 안개 낀 해안가 (5)

먼저 움직인 것은 호진이었다.

호진은 대검을 뽑아 들고 이어붙인 왕의 측면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그런 호진의 움직임을 수백의 눈동자로 쫓는 이어붙인 왕.

“아이이이니이오아.”

놈은 괴음을 내뱉으며 거대한 앞발을 들어, 호진이 다가오는 측면을 향해 휘둘렀다.

채찍처럼 늘어난 앞발이 바닥을 쓸어 올리자 바닥에 있던 모래와 물이 사방에 비산했다.

호진은 놈의 기민한 반응에 놀랐지만 침착하게 뒤로 물러나며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애초에 탐색전을 목적으로 다가간 만큼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지는 않았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모래가 눈에 튀어 눈이 따가웠다.

─쿵 쿵

호진이 눈에 모래를 털어내며 뒤로 조금씩 물러나자 이번엔 놈이 몸을 끌며 다가왔다.

느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진에 비하면 결코 빠른 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호진은 이어붙인 왕과 거리를 유지한 채로 측면을 지나쳤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녀석의 뒤를 잡고 검을 휘둘렀다.

─서걱

피륙음과 함께 놈의 몸을 형성하고 있던 시체의 등이 갈라지고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퍼걱

갈라진 상처 속에서 돌연 뭔가가 솟구쳐 호진의 머리를 걷어찼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목이 돌아간 호진은 비틀거리는 와중에 자신을 걷어찬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상처가 나 있어야 할 자리에 상처는 사라지고, 시체와 어울리지 않는 매끈한 다리 하나가 까닥이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당황스러웠지만 멈춰서 있을 시간은 없다.

이번엔 녀석의 몸을 지탱하던 거대한 뒷발이 개미를 짓밟듯이 호진을 향해 내리꽂혔다.

뒷발 공격은 빠르고 예리했지만 범위는 넓지 않았기에 호진은 그 공격을 구르듯 피해냈다.

그렇게 놈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자 잠시 녀석은 공격을 멈추고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형적인 몸 구조로 인해 방향의 전환이 빠르진 못했다.

그 사이 충분한 거리를 확보한 호진은 구르며 입에 튄 물과 모래를 뱉어냈다.

그럼에도 찝찔한 물맛과 모래가 입안에서 버석거렸다.

일단 뒤로 물러나며 놈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호진.

호진은 방금 탐색전을 통해 얻어낸 정보들을 머리에 정리했다.

‘측면으로 이동할 때 앞발을 빠르게 휘둘렀었지.’

그 범위는 결코 좁지 않았다.

동작이 큰 만큼 한 번만 피해낸다면 접근은 가능하겠지만, 무조건 피할 자신이 없는 만큼 분명히 리스크가 있었다.

‘정면공격은…….’

한쪽에서 날아오는 공격도 피하기 어려운 마당에 어느 쪽에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는 정면 공격은 논외다.

반면 후방으로는 비교적 접근이 용이했다.

그리고 앞발과는 달리 뒷발은 구조상 휘두르는 게 불가능한지 내리찍는 모션이었다.

창을 찔러오는 것처럼 빨랐지만 앞발에 비하면 못 피할 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검을 휘둘렀을 때 손에 느껴지던 촉감이다.

‘엄청 단단했지.’

몸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시체들과 달리 그것을 잇고 있는 검은색의 눈 달린 물질.

그것들은 끈적이는 외형과 달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시체는 평범하게 벨 수 있었지만…….’

순식간에 재생했다.

심지어 재생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신체를 만들어내서 반격해왔다.

상처가 나면 오히려 증식하다니.

마치 신화에 나오는 히드라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즉, 상대에게 공격을 할 수는 있어도 유효타를 주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하, 이거 길어지겠네.”

호진은 귀찮다는 듯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미묘한 기쁨이 깃들어 있었다.

강적을 상대할 때면 피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적을 공략해냈을 때의 짜릿함.

호진의 몸에 아로새겨진 전투와 승부에 대한 욕망이 재차 꿈틀거렸다.

***

‘우선은 스탯 먼저 올려볼까?’

지금 호진에게 남아있는 잔여 포인트는 3.

근력에다 투자한다면 놈의 단단한 부분을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민첩에 투자한다면 정면으로 파고드는 게 가능할 듯한데…….’

문제는 힘들게 파고들어 타격했는데 후방과 차이가 없을 때다.

가시적으론 정면과 후방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진의 마음은 빠르게 근력 쪽으로 기울었다.

‘어차피 내가 더 빠르다. 단단한 부분에 대미지를 줄 수 없다면, 그때 위험을 감수하고 정면 돌파하면 그만이야.’

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근력에 3포인트를 모두 투자했다.

그러곤 곧바로 놈을 향해 달려 나갔다.

거리를 유지한 채 놈의 측면을 지나쳐 후방으로 이동한 호진.

그는 놈의 후방에 도착하는 순간 무기를 변경했다.

‘투구 가르기!’

호진은 묵직한 투핸디드 소드를 높이 치켜들어 정확하게 끔벅이는 눈들을 향해 내리꽂았다.

─카가각

이어붙인 왕을 내려치자 돌 깎는 소리와 함께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장로의 단단한 비늘을 분쇄하고 순식간에 몸을 양단했던 기술이다.

그때보다 근력을 더 높였으니 필시 더 위력적일 터다.

하지만 이번엔 검을 휘두른 부분에 상처는커녕 금조차 나지 않았다.

순간 호진을 향해 날아드는 메뚜기 같은, 이어붙인 왕의 뒷발.

호진은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재차 거리를 벌렸다.

우선 검은 물질만 공격한 결과 추가적인 증식은 없었다.

아무래도 신체 증식은 시체 부위에만 해당하는 듯하다.

그러나 분명 이번에는 손끝에 감각이 있었다.

아까 놈을 내리쳤을 때와는 다른 타격감.

‘어디 한번 확인해볼까.’

검을 틀어쥔 호진은 놈이 몸을 돌리는 속도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그러곤 아까 내려친 곳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차 검을 내리꽂았다.

‘투구 가르기!’

─쩌쩍

호진의 예상대로 같은 곳을 두 번 타격하자 변화가 일어났다.

검은 부분이 자동차 유리처럼 깨진 부분 주위로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 것이다.

검은 물질에 달린 눈들은 당황한 듯 연신 눈을 깜박이며 호진의 움직임을 쫓았다.

놈의 재차 뒷발차기를 해댔지만 더 이상 그건 호진에게 위협이 아니었다.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낸 호진은 김빠진 듯 웃어 보였다.

“벌써 찾아버렸네.”

호진은 놈의 뒤로 접근해 일격을 가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수십 분.

놈의 뒷부분은 해진 누더기 옷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몇 번이나 검은 부분을 두들기다보니, 시체를 잇고 있던 물질들의 부피가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시체들을 연결하던 이음새는 더 가늘어지고 약해졌다.

얇아진 연결부위에서 떨어져 나온 시체들은 모래사장 위에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약간 지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조금만 더 반복하면 놈은 형체를 유지하기도 힘들 것이다.

호진이 잠시 거리를 벌리고 숨을 돌리고 있던 그때.

“아이으아오아아아.”

또다시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뱉는 이어붙인 왕.

놈은 더 이상 몸을 돌리지 않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뒷걸음질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녀석을 본 호진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많이 베어냈지만 여전히 놈의 덩치는 산만 했다.

이어붙인 왕은 그런 호진을 지나쳐 뒤로 물러나기만 한다.

‘저게 뭐하는 짓거리…… 이런. 망했네.’

얕보고 있었다.

설마하니 저런 방법을 취할 줄은 몰랐다.

계속 물러난 녀석은 자신의 뒷부분을 단층 절벽에 빈틈없이 붙였다.

그러곤 검은 액체 부분이 머리 위쪽으로 모여들더니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여전히 그 몸에는 수십의 눈알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조금도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 형태만은 사람이었다.

녀석은 사람을 흉내라도 내듯 눈코입이 있는 곳에 구멍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달리 명확하게 호진을 향해 뭔가를 외쳤다.

“테켈리─리!”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단지 그 어조나 행동에서는 느껴지는 바는 명확했다.

“……들어와 보라는 건가?”

상대를 향한 도발.

저 점액질 같은 녀석에겐 지성이 있는 듯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지성체들이 있었다니, 형이 알면 기뻐할 소식이었다.

‘난 하나도 안 기쁘지만.’

호진은 표정을 구겼다.

이제 약점은 명확하다.

사람 형태를 한 녀석.

분명 시체들을 연결하고 있던 저 검은색의 점액질이 놈의 본체였다.

하지만 옅게 흩어져있던 것들이 뭉쳤으니 그만큼 단단할 터다.

우선 뒤로는 접근이 불가능했고, 정면은 앞발로 몸을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측면으로 접근도 어려웠다.

아까와 달리 벽에 기대고 주저앉은 녀석은 뒷발이 놀고 있었다.

측면으로 접근하다간 앞발과 뒷발에 둘러싸일 수도 있다.

이래서 지성이 있는 녀석들과의 싸움은 까다롭다.

호진이 놈에게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난처해하자 놈은 신난 듯 더 소리쳤다.

“테─켈─리리리.”

이젠 거의 조롱하는 듯이 소리를 내는 녀석.

접근하는 것은 아까도 말했듯이 한번 리스크를 감수하면 가능은 했다.

문제는 접근 후 녀석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였다.

잘못해서 시체들만 베면 놈의 전력을 늘려주는 꼴이기에.

가능하면 한 번에 베어야 했다.

‘지금 내가 가진 스킬 중에 쓸 만한 게…… 있군.’

잠시 상태 창을 살피던 호진이 눈을 잠시 크게 떴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스킬 파편: 파마의 검 1식 목엽참(木葉斬): 8843/10000.」

남은 시간은 1시간 하고도 50분.

준비 시간은 충분했다.

***

던전의 제한 시간이란 무얼 의미하는 것인가.

호진은 버티고 선 ‘이어붙인 왕’의 행동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제한 시간 내에 던전을 공략하지 못하면 재앙이 일어난다. 즉 저놈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끌기만 해도 이득이야.’

그렇다면 호진에게도 생각이 있었다.

호진은 이어붙인 왕과 거리를 유지한 채 섰다.

그러곤 릴리온 성국의 대검을 꺼내들고 수련에 들어갔다.

잠시 호진의 알 수 없는 행동에 긴장하던 녀석은 이내 그의 행동을 비웃었다.

그야 그럴 게, 수십 분째 허공에 검을 휘두르기만 하니 긴장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이름 없는 책(Namenloses Buch)의 공양 의식 파훼. 제한시간 0:12:38」

─스윽

젖은 땀을 닦아내던 호진은 슬며시 시선을 돌려서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1시간 아래로 시간이 떨어지니 초 단위까지 표기해주는 상태창.

멋대로 퀘스트를 맡기더니 쓸데없는 부분에서 친절하다.

아니, 어쩌면 재촉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12분이라. 충분하지.’

이어붙인 왕을 쓰러트리기에 힘이 충분하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기다린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놈과 승부를 봐야 할 시간인 것이다.

12분이면 승부가 나고도 남을 시간일 터.

호진은 물 한 모금을 꺼내 마시곤 검을 움켜쥐었다.

“테켈리─리!”

이제는 정말 승리를 확신한 듯 기쁜 듯 웃고 있는 이어붙인 왕.

‘도대체 12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원…….’

궁금하긴 하지만 호진이 그것을 알 방법은 없을 거다.

12분 뒤엔 놈이 죽거나 자신이 죽을 것이기에.

‘아니, 이젠 10분이네.’

어느새 상태창이 점멸하며 10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호진은 천천히 이어붙인 왕에게 걸어갔다.

녀석은 그런 호진을 눈치챘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자신이 당하는 시나리오는 이미 놈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 순간 호진은 이어붙인 왕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속 구간은 짧았다.

다리 근육에 힘을 준 채 땅을 박차자 순식간에 속도가 끌어올려졌다.

귀에는 바람이 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마치 여름날 스쿠터를 탈 때와 비슷한 소리다.

이어붙인 왕은 호진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침착하게 대응했다.

‘이것도 대응할 수 있을까?’

호진은 일부러 이어붙인 왕의 오른쪽을 파고들었다.

그러면 왼쪽보다 오른쪽 발을 휘둘러 올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놈과의 수차례의 교전을 통해 익힌 패턴이다.

예상했던 대로 오른발을 휘둘러오는 녀석.

호진은 휘둘러지는 앞발의 방향을 보지도 않은 채 공중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해냈다.

아니, 단순히 피한 수준이 아니다.

─휘리릭

대포알처럼 솟구쳐 오른 호진의 신형은 순식간에 본체 근처에 이르렀다.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채, 이어붙인 왕의 살덩어리를 박차며 한 번 더 가속.

─빙글

호진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검을 휘두를 자세를 잡았다.

그럼에도 이어붙인 왕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공격 한두 번 정도는 그냥 맞아줘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이어붙인 왕은 자신을 보호하기는커녕 거대한 앞발들을 들어 호진의 뒤를 덮쳐왔다.

앞에서는 단단한 팔과 몸으로, 뒤에서는 자신의 앞발들로 호진을 깔아뭉갤 생각인 듯했다.

거대한 발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하지만 호진의 검은 이미 놈의 목의 향해 날아드는 중이었다.

‘투구 가르기’에 ‘목엽참(木葉斬)’을 더한 호진의 최선의 일격.

도망칠 곳도 방법도 없다.

남은 건.

베냐.

베지 못하냐의 문제다.

─서걱

손끝엔 느껴지는 기분 좋은 절삭감.

닿는 순간에 찌릿한 감각이 전신을 강타했다.

왠지 검을 어떤 방향으로 내리그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 이 순간을 겪어봤던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다음 순간.

─툭

본체의 목이 공중에서 헛돌다가 모래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