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안개 낀 해안가 (2)
─띠링
「D급 던전 ‘하픈덤의 안개 낀 동쪽 해안가’에 입장합니다.」
「난이도 : 보통」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축축하고 비릿한 바다 짠 내가 코를 찔렀다.
“……이곳은?”
푸르스름한 하늘빛.
넓게 펼쳐진 안개 사이로 끝없이 늘어진 갯벌과 잔잔한 파도가 어렴풋이 보였다.
저번의 던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호진은 잠시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게, 넓게 펼쳐진 바다와 하늘은 던전이 아닌 평범한 바닷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형, 여기 던전 맞아?”
용재도 호진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용재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예은이었다.
“맞는 것 같은데.”
예은은 말 대신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고, 그 끝에는 밝게 빛나는 달이 보였다.
무려 2개나 말이다.
“……확실히 현실 세계는 아니군요.”
호진도 그제야 달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그믐달처럼 가느다란 달 옆에는 통통한 작은 달이 하나 더 떠 있었다.
비록 안개 때문에 희끄무레하긴 했지만, 달빛을 인지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잠시 홀린 듯 달을 바라보던 일행들은 이내 그 푸르스름한 빛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
─철벅 철벅
주변이 너무 고요하기 때문일까.
물기로 가득한 진창을 걷는 일행들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는 듯했다.
긴장하며 나아가던 일행들은 뭔가를 발견하고 다들 말을 잃었다.
그들이 발견한 건 다름 아닌 허름한 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썩어 문드러진 울타리와 잔뜩 물이끼가 핀 돌벽.
도저히 사람 살 곳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마을 곳곳에는 발자국들이 아직 선명했다.
명백하게 누군가가 아직 이 마을에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일까요?”
예은의 질문에 호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글쎄요. 적어도 신발 자국과 보폭을 보니 사람과 비슷한 체구이긴 하겠네요.”
신발을 신었다고 해서 인간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건 섣부른 판단일 터.
그보다 호진은 다른 점이 신경 쓰였다.
일행들이 꽤 인기척을 내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조용해.”
호진이 중얼거리자 용재가 고민하는 듯 미간을 모으며 답했다.
“자는 거 아닐까?”
“……관짝에서 자는 게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호진이 어이없어하고 있자 예은이 손을 휘저으며 두 사람을 불렀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이것 봐요. 이 발자국들이요. 다 한곳으로 향하고 있어요.”
자세히 보니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들은 예은의 말대로 한곳을 향했다.
그곳은 일행들이 걸어왔던 방향의 반대쪽 해안가였다.
퀘스트 종료 시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15분.
아직 급하진 않았지만, 페널티가 페널티인 만큼 호진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걷기 시작한 지 다시 10여 분이 지나자 그들 앞에 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동굴의 입구는 셋이 나란히 들어가도 될 정도로 꽤 컸다.
‘하긴, 이 발자국의 주인들이 전부 들어갔을 정도이니 작을 리가 없지.’
안쪽도 입구보다 크면 컸지 작지는 않을 것이다.
호진은 사냥꾼의 눈을 활성화하고, 다른 두 사람은 랜턴으로 주변 시야를 밝혔다.
그렇게 일행들이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나아가던 중 안쪽에서 희미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뭔가가 웅성거리는 소리.
급히 랜턴을 끈 일행들은 앞에서 비춰오는 흐릿한 빛에 의지해 걸어 나갔다.
안에서 나는 소리들은 점차 또렷하게 들렸다.
“~는 어디에 있는 거지?”
“킨드 문드(Kind mond)도 만월인 지금, 자릴 비울 리가…….”
순간 일행들은 당황한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인간이라고?’
왜 던전에 인간들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사람들의 말소리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들의 알 수 없는 언어가 정확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
마치 잘 아는 외국어를 듣는 기분이다.
곧바로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곱씹으면 그 뜻을 이해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뚜벅 뚜벅
그때 일행들의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젠장, 조금 더 엿들으면서 상황파악을 하려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뒤에 오는 놈을 제압하는 게 최선이었다.
퇴로 확보가 필요하기도 했고, 발소리로 봐서 놈이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호진은 툭 튀어나온 벽 뒤에 숨으며 예은에게 대거(Dagger)를 내밀었다.
“제압 후 생포합니다. 예은 씨 단독으로요.”
예은이 가진 ‘기척 차단’과 ‘조용한 발걸음’ 그리고 ‘레인저의 은신용 망토’라면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조용히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래봤자 D급 던전이다.
개미굴이 E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D급에 상대 못 할 괴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모습을 나타낸 발걸음 소리의 주인의 정체는 인간이었다.
평범한 중년 남성의 모습에 예은은 다소 놀랐지만, 행동에 주저함은 없었다.
그가 지나칠 때까지 숨을 죽였던 예은은 조용히 남자의 뒤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그녀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는 손쉽게 뒤를 내줬다.
─스윽
차가운 예기를 흩뿌리는 대거가 목에 드리워진 녀석은 숨을 헉하고 들이쉬며 멈추었다.
“쉬잇.”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호진이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소리를 냈다.
다행히 의미가 통한 것인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그 모습에 호진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남성도 어설프게 따라 웃었다.
‘자, 이제 어쩌지?’
호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우선 최악의 상황은 면한 듯했다.
퇴로도 확보했고 도움이 될진 모르지만 인질도 확보했다.
중년 남성은 무기가 없었고 무엇보다 제집 드나들 듯 편하게 온 것으로 보아 안쪽의 녀석들과 한패가 분명했다.
우선은 당초 계획대로 대화를 더 엿들으려 했으나, 더 이상 안쪽에서 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이러면 아쉽지만 이대로 놈들과 접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호진은 남자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천천히 동굴의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긴 터널의 끝 빛이 쏟아지는 안쪽을 들여다본 호진은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훨씬 큰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수십 개의 양초와 횃불들이 공동을 비췄고, 그곳에는 무려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여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래서 조용했던 거군.’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눈을 감고, 무릎을 굽힌 채 붉은 천으로 덮인 동굴의 한 벽면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었다.
잠시간 그 기도를 지켜보던 호진은 붙잡고 있던 남자를 툭툭 건드려 눈짓했다.
그러자 남자는 입술을 들썩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다가 입을 열었다.
“저……저기.”
그런 남자의 목소리에 가장 앞에서 기도를 올리던 노인이 역정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하노버, 또 어디서 뭘 하다가…… 누구십니까?”
고개를 돌린 노인은 남자의 목에 검을 겨눈 호진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이내 경계하며 목소리를 세웠고, 그 소리에 다른 마을 사람들도 기도를 멈춘 채 뒤를 돌아봤다.
“하노버!”
“뭐야, 누구야 저건.”
“외지인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복색이야.”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공동을 가득 채우자, 처음 입을 열었던 노인이 일갈했다.
“조용!”
“…….”
일순 공동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저 노인이 이곳의 지도자인 듯싶었다.
호진은 대답 대신 노인을 지긋이 바라봤다.
지금 애가 타는 것은 자신이 아닌 저들인 듯했으니까.
잠시 그 시선을 받던 노인은 한층 더 자세를 굽히며 호진에게 물어왔다.
“복색을 보아하니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과는 다르신 분 같은데, 하노버가 실수를 저질렀다면 제가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노인이 뭔가를 오해한 듯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귀족을 대하는 농부 같다.
“음.”
호진은 오해를 푸는 편이 좋을지 아니면 이용할지 고민이 됐다.
고민하던 호진이 침음을 흘리자 노인은 이해했다는 듯 이제까지와 다른 언어를 뚝딱거렸다.
“공용어 대신 제국어? 조금 압니다. 제국어.”
하지만 호진의 귀에는 오히려 이 뚝딱거리는 발음이 더 거슬렸다.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호진이 대답하자, 노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언어의 기적! 이렇게 훌륭한 기적이라니.”
뭔가 단단히 오해한 노인은 호진을 훑어보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아 그 대검은 성국의…… 아아. 이제 알겠습니다. 성기사(Paladin)셨군요.”
호진은 이제 와 오해를 푸는 것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연기를 시작했다.
“당신은?”
존대인 듯 말하며 말끝을 흐리는 호진.
성기사가 어느 정도의 직급인지는 모르겠으나, 노인의 태도가 한층 더 조심스러워진 걸로 보아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소 멋대로 질문하고 답해도 문제없겠지.
“저는 이 마을의 장로 빌헬름입니다.”
“장로 빌헬름.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호진은 붉은 벽면 앞, 제단으로 보이는 곳에 공양된 음식과 장신구들을 힐긋 쳐다봤다.
그 시선을 눈치챈 장로가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기사님이 보시기엔 조잡하기 그지없겠지만 예배 중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호진은 하노버의 신변을 용재에게 맡긴 후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호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은 길을 열며 머리를 조아렸고 장로가 그 뒤를 따랐다.
제단에 놓인 빵과 과일, 그리고 생선과 은빛 촛대, 구리로 된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폐허나 다름없던 마을 상태를 감안하면 오히려 너무 화려한 편이었지만, 별다른 문제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단에서 몸을 돌리려던 그때.
─쩌억
호진의 발아래에서 진득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검붉은색의 끈적거리는 무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제단의 주변은 온통 붉은색으로 덮여 있었다.
만져보니 이미 제단에 스며든 듯 미끈한 상태의 붉은색의 액체.
“이건……?”
호진의 질문에 장로는 허둥대며 수건을 내밀었다.
“이런, 신발을 더럽혀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이곳에서는 돼지를 잡아 공양을 올리기에…….”
“…….”
호진은 바닥에 발을 비벼 피를 털어내며 물었다.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곳은 어촌이다.
그렇다고 마을이 풍족한 것도 아닌데, 바위로 된 제단에 피가 물들 만큼 돼지를 바쳤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그러자 장로가 웃으며 답했다.
“저희가 몇 마리를 키웁니다. 아무거나 잘 먹어서, 키우는 데 돈도 안 들고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심이나 농장도 아닌 어촌에서 돼지가 먹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호진은 들고 있던 대검에 힘을 줬다.
그러곤 장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피가 아직 끈적거리는데, 도축한 돼지는 어디 있죠?”
“……그게.”
장로는 대답을 쉬이 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다, 어느 순간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장로님! 저번에 도망갔던 돼지를 찾았습니다! 멍청하게 바다로 들어갔는지 머리만…… 어라? 누구?”
마을의 일원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기쁜 듯이 떠들며 공동으로 들어왔다.
그 손에는 낯선 남자의 머리가 달랑거리며 들려있었다.
공동 안에는 시체같이 고요한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