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개 낀 해안가 (1)
“상태창.”
─띠링
「상태창」
「이호진」
「나이: 24」
「레벨:15」
「근력:23 민첩:23 지구력:20」
「스킬: 사냥꾼의 눈 LV.1 검술 LV.8 거합 LV.4 투구 가르기 LV.3 체력 회복 LV.3 확신 LV.1 검술의 묘리 LV.1 검의 정수 LV.1」
「직업: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
「칭호: 없음」
「잔여 포인트: 0」
천천히 자신의 상태창을 살피던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김포에 들어오고 정체되어 있었던 레벨이 15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죽을 뻔했지만, 성장한 수치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벅차올랐다.
그 외에 고무적이라 할 만한 건, 검술, 거합, 투구 가르기 스킬의 성장이다.
특히 감염자들의 머리를 가로세로 안 가리고 열심히 쪼갰기 때문일까.
잘 안 오르던 투구 가르기가 3레벨이나 오르며 진일보했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직업 스킬들.
「확신 LV.1(레어) : 만병지왕은 검. 다른 무기에 패배한다면 단련을 게을리한 탓입니다.」
「검을 제외한 다른 무기 사용 불가. 검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공격력 증가.」
「검술의 묘리 LV.1(유니크) : 검에 숙달된 자에겐 어느 순간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현재 지닌 검의 소양에 따라 깨달음 부여.」
「검의 정수 LV.1(유니크) : 검의 주인이 쌓아 올린 땀과 노력을 체화합니다.」
「검에 쌓인 시간을 흡수합니다.」
‘음, 모르겠네.’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봐도 뭐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확신’은 패시브 스킬로 보였다.
시험 삼아 용재의 도끼를 들어봤는데 의외로 들 수는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들 수만 있었다.
예전에 헬창 후임 따라 체력 단련실에서 했던 데드리프트가 생각났다.
그때도 무리하다가 허리가 나갈 뻔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다른 무기를 사용하면 신체 능력이 일반인 수준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진 디메리트밖에 없는 스킬이다.
다음 스킬은 ‘검술의 묘리’랑 ‘검의 정수’다.
설명이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기에 스킬창을 노려보기도 하고 검을 휘둘러도 봤지만 딱히 뭔가 변화를 체감할 수는 없었다.
안 해본 것은 입으로 외쳐보는 것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인벤토리도 커맨드를 외워야지 열리는 방식이니 가능성은 있었다.
‘다만, 스킬 명을 외치는 건 조금…….’
호진은 은근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호진이 기절하듯 잠든 지 어느덧 6시간 정도가 흘렀다.
해는 중천에 떴고 대부분의 부상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비 중이었다.
일행들에게 고지한 출발 시간은 오후 1시.
아직 두 시간가량 여유가 있었다.
호진은 슬그머니 일어나 옥상의 가상으로 향했다.
“큼큼.”
괜히 헛기침을 한 호진은 조용히 스킬들을 뇌까렸다.
“검술의 묘리. 검의 정수.”
주변에 흐르는 정적.
검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작게 말한 건가……?’
호진은 이번엔 직접 검을 휘두르며 조금 커진 목소리로 스킬들을 외쳤다.
“검술의 묘리! 검의 정수!”
다시 한번 흐르는 정적.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혹시나 했지만 바보 같은 짓이었다.
스킬 설명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특정한 조건들이 있어야 할 듯했다.
허무해진 호진이 고개를 돌린 순간.
“…….”
“……왜 예은 씨가 여기?”
호진이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묻자, 예은이 입꼬리를 바들거리며 대답했다.
“……갑자기 일어나시길래…… 큽. 크흠.”
“…….”
어디부터 봤는지 몰라도, 표정을 보아하니 볼 건 다 본 듯싶었다.
“……스킬입니까?”
분명 누군가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 흠흠. 네. ‘조용한 발걸음’이라는 스킬이랑 ‘기척 차단’이라는 스킬입니다. 쿡.”
예은의 스킬은 존재감과 신체가 내는 소리를 옅게 하는 효과인 듯했다.
사냥꾼의 눈으로 넓어진 호진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일반인들은 목에 칼이 들이밀어지는 순간까지도 모를 거라는 말과 같았다.
‘궁수의 특성상 은폐하고 저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날 테니 꽤 유용하겠지.’
그렇다면.
“저번에 얻은 아이템입니다. 저보다는 예은 씨에게 필요하겠네요.”
호진은 인벤토리 속 ‘레인저의 은신용 망토’를 꺼내 들었다.
잠시 그것을 받아들고 효과를 확인한 예은의 눈이 약간 커졌다.
“이런 걸 받아도 될까요?”
“효율의 문제죠. 저와 같이 움직여주시는 것에 대한 답례이기도 하고요.”
“……고마워요.”
뭔가 감동한 듯 눈을 반짝이는 예은.
‘좋아. 잘 넘어갔다.’
호진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 스스로가 뿌듯했다.
“저는 가볼게요. 그럼 마저…… 쿡. 수고하세요.”
“…….”
“큽…… 귀여우시다니까.”
뒤돌아서 멀어지는 예은의 중얼거림에 호진은 세상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
‘젠장.’
‘검의 정수’ 스킬의 사용법을 알아낸 호진은 침음을 흘렸다.
알아낸 방법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기 때문이었다.
손질하기 위해 꺼낸 ‘릴리온 성국의 대검’.
그 검은 여태 보지 못한 푸른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현상이었지만 호진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스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좀만 빨리 확인했으면 아까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호진이 서슴없이 검을 쥐자, 머릿속에 낯선 검술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띠링
「정수를 흡수합니다.」
「성 릴리온 기사단의 검식 파편을 얻었습니다.」
「검식 파편: 파마의 검 1식 목엽참(木葉斬): 0/10000」
흔들리는 바람과 떨어지는 나뭇잎의 결을 읽어야 하는 기술이다.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검으로 바위도 벨 수 있을 터.
‘……?’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술의 정보에 호진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이게…… 정수.’
누군가가 평생을 쌓아 올린 기술을 머릿속에 익히고 몸으로 체화하는 것.
비로소 호진은 검의 정수가 어떤 스킬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배우기는커녕 본 적도 없는 검술이었지만, 몇 년이나 수련한 듯 머리와 몸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호진은 벌떡 일어나 검을 쥐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머릿속에 떠오른 검을 휘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홀린 듯 검을 쥐고 휘두르는 호진.
─부웅
뭔가 아니다.
뭔가가 부족하다.
검을 깔끔하게 허공을 갈랐으나 호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목엽참은 이렇지 않았다.
‘검의 각도가 문제였나? 아니면 호흡?’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문제를 깨달았다.
‘아, 보폭이 달랐구나.’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발걸음.
그에 따라 호진의 몸도 바람을 일으키지 않고 고요하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부드럽게 뻗어 나간 검 한 줄기가 가상의 나뭇잎을 양분했다.
─띠링
「스킬 파편: 파마의 검 1식 목엽참(木葉斬): 1/10000」
성공이었다.
알림창의 숫자가 하나 올랐다.
고작 하나지만 동작을 구현했다는 사실에 온몸이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
‘달라.’
지금까지 익혀온 기술들과는 결이 달랐다.
특정한 형이 없다.
연계되는 동작도 없다.
오롯이 완전한 베기를 위한 동작.
아직 출발까지 여전히 2시간이 남아 있다.
‘시간 안에 완성하지는 못하겠지만…….’
몸의 컨디션은 거의 다 회복된 상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
호진은 기분 좋게 검을 휘둘렀다.
***
‘아쉽네.’
호진은 시선 한끝에 놓인 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스킬 파편: 파마의 검 1식 목엽참(木葉斬): 8843/10000.」
처음에 하나씩 오르던 숫자가 어느 순간부터 2개, 3개씩 올랐고, 순식간에 달성치와 근접해 버렸다.
스킬을 얻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감염자들이 활동이 적은 이 시간대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곳의 냄새는 여전히 지독했다.
축축하고 끈적한 습기가 전신을 휘감고 지나가는 지하 배수구.
배수구를 걷는 생존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힘든 일을 겪어 내성이 생긴 덕인지, 주연이조차 조용히 잘 따라와 주는 중이었다.
그렇게 걷던 중에 앞서 걷던 예은이 손을 높이 들어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일시정지라는 신호.
호진이 다가가자 예은이 전방을 향해 손가락을 펼쳤다.
“뭔가 있어요.”
예은의 말대로 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뭔지, 사냥꾼의 눈을 쓴 호진의 눈에는 너무 잘 보였다.
가장자리에 푸른색 빛이 일렁이는 통로.
게이트.
─띠링
「연계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이름 없는 책(Namenloses Buch)의 공양 의식 파훼. 제한시간 3:32」
「공략 실패 페널티: A─3 지역의 복구 불가능한 피해.」
게이트를 의식하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알림창은 처음 보는 유형의 녀석이었다.
‘퀘스트인가? 게다가 ‘이름 없는 책’이라면…….’
아까 감염자들을 전부 처치하고 떴던 창에는 ‘이름 없는 책’의 공양을 저지했다고 쓰여 있었다.
‘감염자들과 관계가 있는 물건인가?’
게다가.
‘공략 실패 시, A─3지역의 복구 불가능한 피해라니.’
A─3지역이 정확히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게이트를 클리어한 지역도 A─3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울 전체가 A─3 지역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결코 적지 않은 지역이 초토화된다는 뜻.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당장 강화도조차 그 지역에 포함이 안 된다고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심지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줄어드는 제한시간.
아까까지 3:31이었는데 지금은 3:30이다.
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 갑자기 멈춘 생존자들은 의아함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플레이어가 된 일반인과 다름없는 생존자들.
이들에게 도움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호진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외쳤다.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여러분은 빠르게 김포에서 벗어나세요.”
“예? 호진 씨, 갑자기 무슨.”
“뭔 소리야, 형?”
호진의 갑작스러운 오더에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웅성거렸다.
하지만.
“조용.”
호진의 말에 웅성이던 소리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이 앞에 게이트가 있습니다. 굉장히 위험하겠지만 지금 처리해야만 합니다.”
“…….”
“지금 선택권이 있는 건, 용재와 예은 씨뿐입니다. 따라올지 말지 말해주세요.”
다른 생존자들은 선택권조차 없다.
그들의 힘으로는 도움은커녕 발목만 잡을 테니까.
그때 서로 마주 본 용재와 예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이상한 걸 묻네. 이럴 때는 그냥 따라오라고 한마디만 하라니까.”
“동감이에요.”
그들이 호진의 앞으로 다가와 서자, 박 순경이 급하게 호진을 불렀다.
“호진 씨! 저는 왜? 혹시 도움이 안 돼서 그런 겁니까?”
호진은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가 떨리는 박 순경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박 순경님이 따라오시면 주호랑 주연이는요?”
“…….”
순간 박 순경의 눈이 커다래졌다.
“방금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에요. 옆에 누군가 있어 줘야 합니다.”
박 순경은 대답 대신 분하다는 듯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 방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박 순경님은 책임지고 생존자들을 외곽으로 안내하세요.”
“……옙.”
호진이 목소리를 키워 말하자 박 순경이 물기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박순경에게 호진은 빠르게 재회할 장소를 작게 속삭여 말했다.
“기본적으로 강화 초지대교 근처에서 보는 거로 하죠. 최대한 교전을 피하면서 이동하세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만약, 이틀 이상 시간이 걸린다면 먼저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고요.”
“그런……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박순경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용재와 예은에게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제는 다소 익숙해진 위험을 향해 호진은 한 걸음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