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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17화 (17/241)

17화. 한가을 밤의 악몽 (4)

호진이 개미굴을 클리어했을 때, A─3섹터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알림이 떴었다.

그 보상으로 받은 것이 인벤토리였고 말이다.

호진은 한때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던전을 처음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도 보상이 있을까?’

‘보상을 받았다면 어떤 것을 받았을까?’

그에 대한 답은 용재에게 있었다.

“……개척자?”

“응.”

칭호 ‘개척자’(Pathfinder).

용재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상태이상에 내성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용재는 방금 감염자의 중독을 이겨냈다는 알림을 받았다.

“왜 말 안 했던 거야?”

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말하기 좀 부끄럽긴 한데.”

“……?”

“뭐랄까? 비장의 카드? 다른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멋지게 딱 나서고…… 뭐. 히히.”

“어…… 부끄러울 만하네.”

“…….”

까먹고 있었다.

‘용재는 예전부터 소년만화나 히어로물을 좋아했었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호진은 용재에게 말했다.

“낫는 대로 싸울 준비 해. 다른 일행들 성장 못 따라잡지 말고.”

“오케이!”

그때 화단 위에서 활을 쏘아대던 예은이 다급하게 호진을 불렀다.

“호진 씨! 이제 한계에요!”

거의 무너져가는 방패조의 진형.

‘아직은 3분 정도가 한계인가?’

그렇지 않아도 막 무기 손질이 끝난 참이었다.

호진이 입구로 달리며 외쳤다.

“방패조 옆으로!”

““방패조 옆으로!””

방패조는 호진의 명령에 복명복창하며 열을 유지한 채, 좌우로 나뉘어 섰다.

짧은 시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훈련되어 있었다.

‘박 순경님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나?’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이 어려웠다.

어쨌든 지금은 일단.

‘벤다.’

─서거걱

방패로 막힌 길이 열리자, 넘어질 듯 쏟아져 나오는 감염자들을 향해 호진의 검이 날아들었다.

스킬 보정을 받은 발도는 단 한 순간도 느려지지 않은 채,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점과 점을 잇는다.

그리고 점들 사이에 생겨난 검붉은 선.

감염자들 목 언저리에 그어진 선은 어느 순간 쩍하고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그리고.

─툭 투두둑

감염자들의 머리기 공처럼 바닥을 굴렀다.

─띠링

─[거합 스킬이 2레벨에서 3레벨로 올랐습니다.]

‘뭔가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다르더라니.’

검이 평소보다 깔끔하게 뻗어나가더니 곧바로 레벨이 올랐다.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성장이 다시 되는 기분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생존자들도 점점 레벨이 오를 것이고, 시간이 지나 부상당한 용재만 합류할 수 있다면…….’

이건 더 이상 위험이 아닌 기회다.

한층 강해질 수 있는 기회.

검을 다잡은 호진은 물밀 듯이 밀려 올라오는 놈들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

‘젠장맞을 기회는 무슨 기회. 엿 먹으라 그래.’

호진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5시간 전의 자신은 병신이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종아리와 전완근은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땀이 흐르던 모공은 말랐고, 옷은 피와 땀에 절어 무거웠다.

─콰직

그럼에도 벤다.

몸에 익은 감각과 관성적인 반응만으로 벤다.

달려드는 놈의 공격은 피하고 휘둘러서 목과 머리를 분리하는 것.

호진은 몇 시간 동안 그걸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슬슬 한계다.

어깨나 손목 같은 관절들이 삐걱이며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마비가 와도 다른 부위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근육과 달리, 관절은 그게 어렵다.

삼각근이 마비되면 광배로 검을 휘두르면 되지만, 손목 관절을 대체할 건 손목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몇 번이나 더 휘두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밀리다 보니 너무 뒤로 왔네. 앞으로 가지 않으면…….’

─미끌

순간 내디딘 걸음이 바닥에 질척이는 피에 미끄러지며 중심이 흐트러졌다.

그러든 말든 감염자 놈들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 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건…… 위험한데.’

호진은 억지로 중심을 되찾으려 하지 않고 미끄러진 몸을 그대로 허공에 띄웠다.

그와 동시에 허리를 비틀며 검을 휘둘러, 감염자의 머리를 턱부터 정수리까지 쪼개버렸다.

그러곤 곧장 낙법을 친 다음 구르다시피 하며, 검을 좌우로 낮게 그어 놈들의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본국검법의 발초심사(發艸尋蛇) 초식을 응용한 동작.

호진은 그 상태로 멈추지 않고 쓰러지는 녀석들의 머리를 양분하며 몸을 일으켰다.

끝내는 다시 입구까지 나아가 올라오는 녀석들을 기계적으로 베었다.

─콰직

스스로 생각해도 꽤 자연스러운 연계였다.

다만 방금의 연계동작으로 체력이 상당히 소진되었음을 느꼈다.

이제는 놈들을 베도 기분 좋은 서걱거리는 소리 대신 마른 장작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놈들의 잘려나간 단면부터가 거칠기 짝이 없다.

검의 이가 나가고, 피와 기름이 잔뜩 낀 까닭이다.

이래서는 검이 아니라 쇠몽둥이라고 바꿔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검을 손질할 수 있다면.

물 좀 마시고 팔다리 좀 주무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커헉!”

즐거운 망상도 잠시.

헛구역질이 올라와 신물과 침이 입 밖으로 질질 흘렀다.

‘이제 다들 충분히 쉬지 않았나?’

“……방패조.”

호진이 힘겹게 부르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대신 들려오는 뭔가 끌리는 소리.

─드르륵 드르륵

호진이 달려드는 감염자를 발로 걷어차 계단으로 밀어내며 힐끔 돌아봤다.

박 순경이 말없이 방패를 한 손으로 끌며 입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누가 보면 감염자인 줄 알겠네.’

그 모습에 질린 듯 고개를 저은 호진은 박 순경을 향해 외쳤다.

“됐습니다. 제가…… 더 버텨보겠습니다.”

그 말에 박 순경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방패를 끌던 그 자세로 바닥에 쓰러졌다.

완전한 탈진 상태.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호진과 예은, 그리고 비전투인원들뿐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째 시위를 당긴 예은의 손톱들은 부러진 지 오래고 어깨는 탈골된 듯 보였다.

하물며 용재와 방패조는 의식 자체가 없었다.

일행들이 버틸 수 있는 건 고작 2시간에 불과했다.

레벨은 올랐지만 체력의 소모를 따라가지 못한 탓이다.

아무리 스탯이 높아져도 체력이 한계에 달하면 의미가 없는 법이었다.

용재나 박 순경이 간간이 일어나서 호진이 정비할 시간을 벌어주긴 했지만, 그마저도 1시간 전이 마지막이었다.

‘경보음이 멈추면 끝날 줄 알았는데…… 젠장.’

다시 생각해보면 1시간만 버티면 되는 줄 알고 일행들에게 무리를 시킨 게 잘못이었다.

하지만 엿 같은 경보음이 끝나도 놈들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아파트 앞을 메운 시체들의 인파가 경보음보다 더한 소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이 근방에 놈들은 모일 만큼 모인 건지 추가적으로 더 몰려오진 않았다.

‘그걸 다행이라고 부르는 머저리는 없겠지만…….’

호진은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내장 깊숙이 쑤셔 넣었다.

이젠 코도 완전히 맛이 간 듯 역겨운 시체 냄새조차 안 날 지경이었다.

“으아아악!”

호진이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재차 휘두르지만, 녀석들은 물론 그런 호진의 외침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천에 깔린 감염자들의 시체를 보고도 놈들은 그 무엇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마치 인육에 대한 욕망을 제외하면 공포를 포함한 모든 감정이 거세당한 듯 말이다.

호진도 녀석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몸에 한 톨 남은 힘을 쥐어짜내 즈버크하우(Zwerchhauw)에 이어 곧장 투구 가르기를 펼칠 뿐이었다.

다음 순간.

─툭

아무런 전조 없이 나가버린 시야.

아니, 생각해보면 전조는 있었다.

아까부터 온몸이 보내던 신호들은 모조리 산소가 부족하고, 근육이 한계에 달했다는 신호들이었으니까.

어찌 됐든 눈을 감았다 뜨고 눈자위를 비벼 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몸속에 있는 차단기라도 내려진 것 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호진이라 해도 보이지 않는 적을 벨 수는 없다.

이젠 정말 끝이다.

─띠링

[지친 체력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커허헉.”

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맑고 깨끗한 공기가 폐 속 깊은 곳까지 들이닥치고, 장기 곳곳에 산소를 잔뜩 머금은 신선한 피들이 수혈됐다.

흐릿하게 돌아온 시야.

“크에에에엑.”

호진은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감염자의 아가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감염자 녀석들과 나란히 침이나 질질 흘리고 다닐 뻔했다.

어느덧 레벨 3이 되어버린 ‘체력회복’ 스킬은 정말 뒤지기 일보 직전에서야 발동되는 듯했다.

숨이 깔딱이는 사람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는 느낌이랄까.

덕분에 아까부터 공포영화의 하이라이트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연출하는 중이었다.

없었으면 죽었겠지만, 아슬아슬할 때 발동되는 메커니즘 때문에 열이 받는다.

“됐으니까 다 들어와. 이 새끼들아. 오늘 체력회복 스킬 레벨 하나 더 올린다.”

호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계단으로 나아갔다.

─저벅 저벅

“……?”

하지만 그럼에도 더 달려드는 놈들이 없다.

‘뭐지?’

호진이 의아해하며 쓰러진 놈들을 발로 슥슥 밀어내고는 천천히 나아갔다.

─졸졸졸졸

피가 냇물처럼 멈추지 않고 흐르는 계단.

벽면부터 천장까지 붉은색 융단이 뒤덮인 그곳에, 더 이상 몸을 비척거리는 녀석들은 없었다.

오로지 머리와 몸이 분리된 시체만이 수도 없이 깔려있을 뿐.

그 순간 뭔가 번쩍이는 빛에 호진은 인상을 찡그렸다.

“……?”

고개를 돌린 곳에는 깨진 작은 유리 조각 하나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호진이 몸을 돌리자,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가 건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아…….”

호진이 낮게 탄식함과 동시에, 푸른 알림 창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띠링

「이름 없는 책(Namenloses Buch)의 공양행위를 저지했습니다.」

「매우 어려움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가산됩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띠링

「전직에 성공하였습니다.」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로 전직합니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확신 LV.1」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검술의 묘리 LV.1」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검의 정수 LV.1」

「획득된 장비가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드디어 끝난 건가?’

전직을 했다는 기쁨보다도 이제 이 짓을 그만해도 된다는 사실에 호진은 안도를 느꼈다.

육체적으로도 한계점에 달해 있었지만, 그만큼이나 인간의 모습을 한 녀석들을 계속 베는 정신적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철퍽 철퍽

호진은 사방에 깔린 감염자들의 잔해를 피해 피 웅덩이를 밟으며 옥상의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벽돌로 쌓은 화단 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상자들과 생존자들.

불안에 떠는 그들과 달리, 예은이 쓰게 웃으며 호진을 반겼다.

아마 그녀도 퀘스트 종료를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끝……났네요.”

호진은 말없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단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쳤는지 그 소란 속에서도 곤히 잠든 주연이와 탈진해 쓰러진 방패조, 도끼를 껴안고 잠들어 있는 용재까지.

‘아, 박 순경님은 아직도 입구 쪽에 쓰러져 있네.’

데려와야 하나 고민하던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갔다가는 자신도 옆에 같이 드러누워 못 일어날 것 같았다.

대신 호진은 잠시 눈을 감고 몸을 젖혀 얼굴에 쏟아지는 햇볕을 느꼈다.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

한번 감긴 눈꺼풀은 다시 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지만, 잠시라면 괜찮지 않을까.

호진은 화단에 몸을 맡긴 채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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