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한가을 밤의 악몽 (2)
“그래서 이 위에 생존자들이 모여 있다는 거지?”
“네. 어제 관리실에서 나온 방송에서는 그랬어요.”
호진의 질문에 오주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커튼이 쳐진 거실.
일행들은 촛불을 켜고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럼 다음은…… 아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려던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호진을 제외한 일행들의 정신이 정작 다른 데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후루룩
“크으으. 이거지.”
용재는 감동하며 그릇에 있는 라면 국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넣었다.
주연은 맛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는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맛있게 먹었어?”
박 순경이 주연의 입에 묻은 라면 국물을 닦아내며 묻자 주연은 헤벌쭉 웃으며 답했다.
“우웅!”
눈물을 그친 오주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식사 준비였다.
오주호는 동생과의 약속대로 라면을 끓였고, 일행들 것까지 넉넉하게 준비했다.
물론 전기와 가스가 끊긴 탓에, 호진이 인벤토리에 챙겨온 휴대용 가스버너를 이용해야 했다.
부탄가스 같은 소모품은 최대한 아껴야겠지만, 이번만큼은 조금도 아깝진 않았다.
30시간 만에 먹는 따듯한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스하고 익숙한 냄새와 맛.
그건 하나의 위안이었고 행복이었다.
평범한 식사는 평화로웠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게 했고, 일행들의 굳은 몸을 녹여 내렸다.
더군다나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은 주연의 애교는 일행들의 표정을 한층 녹진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않고 달려온 일행들에겐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호진은 이 편안한 휴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직 형과 만나지 못했고, 무엇보다 김포는 마음 놓고 쉬기에 너무 위험했다.
충분히 쉬었다 생각한 호진은 아까 하지 못했던 말을 마저 꺼냈다.
“자, 이제 어떻게 할지 이야기해보자.”
“옥상으로 사람들 구하러 가야지!”
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용재는 도끼를 들쳐 메며 씩씩하게 말했다.
라면에 코를 박고 먹길래 못 들은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 다 듣기는 한 모양이다.
“먼 것도 아니고, 후딱 구해준 다음 강화로 가자.”
“…….”
그러나 용재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거실에는 촛불만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밖에 감염자들이 너무 많아. 지금 인원도 많은데 더 늘어나면…….”
먼저 입을 뗀 박 순경이 더 이상 말하기 어려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까지 호진 일행은 소수였고, 그렇기에 은밀히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렇게 쉽게 도심으로 들어올 수 없었을 터다.
─아드득
“……지금 이 아파트 봤잖아. 복도랑 계단에도 감염자들이 돌아다녀. 우리가 아니면 옥상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죽어.”
용재는 그런 일행들의 반응에 화가 난 듯, 이를 악물었다.
그때 계속 침묵을 지키던 호진이 입을 열었다.
“전부를 챙길 순 없어.”
“……형!”
“그러니까 이번만이다.”
“……?”
용재는 눈을 끔뻑이며 호진을 바라봤다.
“배수로를 이용한다면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구하는 거야.”
그제야 이해한 용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호진에게 매달렸다.
“응, 내가 앞장설게. 내가 말했으니까 내가 책임지는 게 맞지.”
“그렇게 해. 다들 장비 점검하세요. 5분 후 이동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아, 이게 뭔 고생입니까.”
“휴우…….”
하지만 말들과는 달리 다들 희미하게 웃고 있는 일행들.
억지로 웃음을 참는 입꼬리들이 씰룩거린다.
‘어쩌다 이런 바보들만 모였는지…….’
호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장비들을 점검했다.
이타적이고 윤리적인 그룹.
아포칼립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가장 먼저 당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믿을 수 있고, 또 지키고 싶다.
만약 저들이 효율성만을 중시하고 목표만 맹목적으로 좇는 사람들이었다면 믿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보단 차라리 바보같이 착한 사람들이 나아.’
저 바보 같은 동료들과 함께, 호진은 살아남을 것이다.
***
‘우와.’
호진의 뒤에 따라오던 오주호는 연신 감탄을 흘렸다.
─쾅
용재가 휘두른 도끼가 또다시 달려오던 감염자의 몸체를 양분해버렸다.
보기에는 징그럽지만 그 동작만큼은 시원하고 멋있다.
“……피 튄다. 조심히 좀 처리해.”
호진이 뭔가 불만스러운지 타박하자 용재가 투덜댔다.
“이미 피 묻을 대로 묻었잖아. 이제 와서 한두 방울은 티도 안 나, 형.”
“애들한테 튄다고.”
“아하. 그럼 조심해야지!”
─쉬이익 퍽.
그때 돌연 날아온 화살 한 발.
화살은 용재 뒤로 다가오던 감염자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했다.
“집중.”
예은이 냉랭하게 말하자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앗…… 미안. 누나.”
“……주의하겠습니다.”
사실 이 그룹의 리더는 이 누나가 아닐까.
보이지도 않는 곳의 적을 한순간에 꿰뚫는 실력에 오주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반면 호진이라는 사람은 영 리더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아까부터 하는 건 명령뿐.
한 번도 싸우지 않았기에 차고 있는 검이 아까워 보일 정도다.
“다 도착했어!”
용재가 얼마 남지 않은 계단참을 훌쩍 뛰어올랐다.
그의 말대로 옥상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쿵쿵
“저기요.”
용재가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 뭐지?”
“사람…… 같은데요?”
“밖에 괴물 천지인데 뭔 소리야!”
문 너머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때 호진이 앞으로 나서며 재차 문을 두들겼다.
“5분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실 분들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구……구조대입니까?”
그제야 대답을 하는 문 너머의 생존자들.
의심은 이런 세상에서의 미덕이지만, 막상 구하러 왔는데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보니 오주호는 답답함을 느꼈다.
“잠깐만요.”
주호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서서 문 앞에 섰다.
“저 B동 802호에 사는 오주호라고 합니다. 구조대 맞으니까 빨리 여세요.”
“오주호? 오 선생님 아들 오주호 맞는가?”
주호의 말에 반대쪽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비 아저씨?”
“잉. 경비 아저씨여. 문들 여쇼. 아는 학생이구만.”
─덜컹 끼익
그렇게 문이 열리고 생존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 12명.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
일행들을 본 생존자들의 표정은 미묘했다.
때마침 조용히 다가온 경비 아저씨가 주호에게 속삭였다.
“주호 학생……. 거시기, 저 짝이 정말 구조대 맞는겨?”
하긴 오주호가 봐도 구조대처럼 보이진 않긴 했다.
도끼에 검에 활을 든 구조대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나마 경찰 방패와 진압복을 입고 있어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구조대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구하러 온 거 맞아요. 저쪽이 삼촌인데 서울에서 경찰 하세요.”
주호는 그런 경비 아저씨에게 적당히 진실만을 말하며 안심시켰다.
구하러 온 것도 맞고 삼촌이 경찰인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구조대는 아니지만. 흠흠.’
그 말에 금방 화색인 된 경비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곤조곤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은 그 소식에 다들 긴장을 풀며 기뻐했다.
주호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웃음 짓다가 문득 옆을 봤다.
내심 뿌듯해하는 일행들의 모습이 주호의 눈에 들어왔다.
주호는 자신을 구하러 와준 게 이들이라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웃음 지었다.
***
잠시 생존자들이 진정되길 기다린 호진은 생존자들을 향해 말했다.
“저희의 최종 목적지는 강화도이고, 지금부터 도심 외곽으로 나갈 겁니다.”
“저어……. 강화도에는 쉘터가 구축된 건가요?”
젊어 보이는 애기 아빠의 질문에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릅니다. 강화도로 가는 건 저희의 개인적인 목적입니다. 남는 것도, 중간까지만 동행하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쉘터라는 말에 잠시 기대에 찬 표정을 짓던 생존자들은 시무룩해졌다.
“2분 남았습니다.”
호진의 말에 생존자들은 잠시 시끄러워졌으나 잠시 후 그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다.
“저희는 외곽까지만 같이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답변이다.
호진은 그들의 대답을 빠르게 수용하며 간단한 지시들을 내렸다.
소리 내지 말 것.
빛을 내지 말 것.
침착하게 명령에 따를 것. 등등.
생존자들은 그 말들을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흐흑, 흐흐흐흑.”
돌연 구석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이 몸을 들썩였다.
웃음이라기보단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에, 다들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요. 저분은?”
호진의 질문에 경비 아저씨가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으게. 이게 믿기 어려우실 텐디요…….”
“…….”
호진은 대답 대신 경비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미 믿을 수 없는 일은 충분히 겪어왔다.
지금 호진은 유치원생의 두서없는 말에도 귀를 기울일 자신이 있었다.
믿으니까 말해보라는 호진의 시선에 경비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반나절 전쯤 한 남자가 찾아왔지라…….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하얀 가면……?”
“그라지요. 하얀 가면이었지라. 문을 열어 줬는디 다짜고짜 어떤 신을 믿느냐는 둥, 알 수 없는 소리를 씨불여 쌌는 이상한 놈이었다니깨요?”
“…….”
“그때 여기 2층에 사는 건달, 그니까 지금 저 짝에 웃고 있는 저 양반이 그 남자에게 다가가 화를 냈지라. 흰소리 하덜 말고 꺼지라고. 그때 그놈이 건달 귀에 뭐라 뭐라고 속삭였소.”
“……그리고요?”
“그게…… 끝이지라. 그 후에 가면 쓴 놈은 조용히 뒤돌아 사라졌어야. 그런데 건달 놈 상태가 이상한 겨. 가만히 서서 땀을 주룩주룩 흘리는디, 눈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아무튼 난리도 아니었다니깨요.”
“그리고 저 상태인 겁니까?”
“야~그라지요. 싸납긴 했어도 듬직했었는디. 이게 뭔 일인지…….”
호진은 경비의 말을 들으며 끄덕였다.
어디까지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유익한 정보였다.
하얀 가면과 신.
세상이 이 모양인 만큼 어쩌면 사이비종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사이비종교가 생겨나기엔 좀 많이 이른 감이 있지만…….
‘나부터가 조만간 광신도로 전직하게 생긴 마당에 뭘.’
호진은 문득 떠오른 전직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경비 아저씨가 잘 좀 챙겨주십시오.”
“그라요.”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호진의 말에 모두 약간 긴장했다.
선두는 용재와 호진이다.
─덜컹.
문이 열리고, 한 발 한 발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는 일행들.
하지만 올라올 때와 달리 막아서는 녀석들은 없었다.
‘어쩌면 올라오며 잡은 녀석들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네. 생각보단…….’
아니, 그래도 플래그는 안 세우는 게 좋다.
여기서는 조용히 지나가는 편이…….
“이거 생각보다 쉽겠는데 형?”
옆에서 걷던 용재가 웃으며 말을 건넸고, 순간 움찔한 호진은 뺨에 경련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하하, 친절도 해라. 우리 용재.”
“그치? 형이 모르는 것 같더라.”
─빠득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다 저놈 탓…….’
“안 돼! 잡아!!”
“으아아악!”
그때 뒤에서 소란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