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여정의 시작 (3)
호진은 쓰러진 남성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그럼에도 고블린이 남성을 날붙이로 찌르고 놀 때를 떠올리면 드는 생각이 있다.
조금만 빨리 놈을 제압했다면 남성을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호진에게는 그런 후회가 있었다.
호진이 잠시 가만히 서 있자, 예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키 찾으러 오셨다고 하셨죠. 제가 대신 가져다 드릴게요.”
막 돌아서려는 그녀를 보며 호진은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접니다.”
아무 맥락이 없는 호진의 말.
그럼에도 예은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쳤고, 눈가는 파르르 떨렸다.
“……뭐가요?”
왠지 이상하게도 예상이 간다.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통화 드렸던 그 사람이, 접니다.”
호진의 나지막한 고백에 예은은 잠시 턱하고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많은 것이 궁금했고, 묻고 싶었지만.
정작 떨리는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였다.
“아버지는…… 제 말을 들으셨나요?”
사랑한다는 말.
늘 감사했는데, 여전히 사랑하는데.
마지막으로 그 말을 전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 때문에 늦을 것 같다는 아빠의 말에 뭐라고 했더라.
……그게 마지막 말이면 안 되는데.
예은은 떨리는 눈으로 호진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봤고, 그런 예은을 보며 호진이 말했다.
“들으셨습니다. 분명히.”
짧지만 분명한 단언.
예은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끕. 감…… 사합…….”
이상한 남자의 전화를 받은 후 정신없이 사과몰을 향해 달렸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간신히 도착한 곳에서 발견한 것은 아버지의 싸늘한 시체.
전화는 먹통에다가, 다시 나온 거리는 이미 지옥을 방불케 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괴물과 조우했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메고 온 활의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이제야.
그녀는 참고 참았던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며 눈물을 주룩 쏟아냈다.
그런 예은을 바라보며 호진은 남성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죽음 직전 눈에 일었던 광채.
‘통화를 연결해 주길 잘했다.’
호진은 가슴의 욱신거림을 느끼며 조용히 그녀 곁을 지켰다.
그렇게 주차장에는 한동안 예은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
“저도 따라갈래요.”
“……이유가 뭡니까.”
“감사하니까요. 듣고 싶은 말이 더 있기도 하고요.”
실컷 운 예은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호진을 따라가겠다고 했다.
전력 면에서 우수하긴 하지만 따라오겠다는 이유가 미묘하다.
무엇보다 호진에게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듯한 여자의 태도.
그것이 거슬렸다.
‘아버지를 구해주지도 못했는데…… 왜?’
호진은 이해가 안 갔지만, 마땅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녀의 동행을 허락했다.
물론 그녀의 활 솜씨가 강화도까지의 여정에 도움이 될 거라는 속내도 있었다.
떠나기 전 예은의 아버지를 화장한 일행은, 뼛조각을 추린 후 탑차 2대에 나누어 올라탔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익.
일행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 서야만 했다.
방치된 차량들로 인해 도로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떡하지. 형?”
“다시 마트로 돌아가서 계획을 세우는 건 어떻습니까?”
박 순경이 의견을 제시했지만, 호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몬스터와 조우한 지 16시간이 넘었습니다. 박 순경님도 잘 아시겠지만, 재난 상황은 골든타임이 있습니다.”
화제라면 5분, 실종이라면 24시간.
일정 시간이 초과하면 구조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특정하기 어렵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언젠가 생존자들의 수가 크게 꺾이는 순간이 찾아올 터.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던 예은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는 어때요?”
“……아!”
도로 위에 놓인 다마스 한 대.
다행히 키도 꽂힌 채였고 기름도 충분했다.
─부르릉
호진이 다가가 시동을 걸자 다마스는 가볍게 진동하며 빛을 냈다.
“오, 이거라면 골목길이나 차량 사이로 이동이 가능할 것 같네요!”
박 순경이 말하자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러게요. 경찰분들이 운전을 그렇게 잘하신다던데, 정말인가요?”
“그럼요, 허구한 날 하는 게 운전인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운전 하나는…… 아.”
호진의 질문에 박 순경이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호진이 웃음을 지으며 박 순경에게 자리를 비켜준 후였다.
“잘됐네요. 실력 좀 보여주시죠.”
“…….”
***
─덜컹 덜컹
“아니, 박 순경님 운전 잘하신다면서요. 뭐가 이렇게 덜컹…… 악…… 혀 씹었어.”
“아니 용재 씨……. 이게 보기처럼 쉽지……. 미친, 꽉 잡으세요.”
─끼이이익 쿵!
“…….”
“…….”
“……다들 괜찮으신가요.”
“……끄으으, 네에에.”
호진의 물음에 다들 힘겹게 답했다.
─쾅 쾅
호진이 두세 번 걷어차자 일그러진 차량의 문이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어느덧 쇼핑센터에서 출발한 지도 2시간이 지난 오후 2시.
차량의 안으로는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었다.
이미 도로라고 부르기도 힘든 김포공항 가는 길은 몰린 차량들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거대한 미로를 만들어냈다.
─푸쉬이이익
그리고 방금 그 미로에 한 획을 추가한, 전복된 다마스 한 대.
“여기부터는 걸어가겠습니다.”
호진은 한 명씩 차량에서 끌어 올리며 생각했다.
사실 여기까지 차량으로 온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길이 막혀 우회하기를 수십 번, 박 순경은 인도와 골목길 심지어 공원마저 가로지르며 차를 몰았다.
그 과정에서 괴물들과 조우했고, 그중 일부는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만 했지만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달리는 차량을 쫓아오진 못했기에 이곳에 오기까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호진이 신경 쓰였던 것은 스쳐 지나간 괴물 한 마리.
‘그놈은 대체?’
올림픽대로 근처 공원을 가로지를 때 본 거대한 그림자.
수면 아래로 얼핏 윤곽을 보인 녀석은 마치 고래를 연상케 했다.
만약 그런 녀석이 차량을 습격했다면…….
“저기가 백운교네요.”
호진의 손을 잡고 차량 밖으로 나온 예은은 차량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벽을 바라봤다.
꽉 들어찬 차량들로 인해 다리 위의 도로는 이미 몇 차선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문제는 저곳을 넘어가야 김포 시내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갈 거야?”
용재가 불안한 듯 묻자 호진은 잠시 멈칫했다.
위냐, 아래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위로.”
차량 아래로 포복한다면 괴물들의 눈에 덜 띌 순 있다.
그러나 전투가 발생했을 때 대응이나 회피가 어렵다.
반면 차량 위로 가는 경우 괴물들의 시선을 끌겠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적을 확인할 수 있고 적절한 대응이 가능할 터.
문제는 숨어있는 적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인데…….
그 점에 관해서는 저번에 쇼핑몰에서 고블린 챔피언을 잡으며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을 써볼 생각이었다.
‘이걸 어떻게 쓰나 고민했더니, 생각보다 금방 쓰네.’
호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선두로 가겠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호진은 말과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얇은 검은색 천을 꺼내 눈가에 둘렀다.
순간 어두워지는 시야.
「맹인 악사의 눈가리개 헝겊」
「종류: 액세서리」
「정보: 기척에 민감해집니다. 사용자의 시야를 어둡게 합니다.」
단출한 설명과는 달리 그 효과는 매우 신기했다.
이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파동처럼 울려 퍼지는 생명의 기척.
호진은 순식간에 주변 생명체들의 기척을 파악해 냈다.
‘재밌네.’
그러나 느낄 수 있는 것은 생명체들뿐.
정작 시야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천지다.
그럼에도 제대로 걷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계륵 같은 아이템을 뒤집어쓴 이유는 하나다.
“……형, 뭐해?”
용재는 뜬금없이 천으로 눈을 가린 호진을 보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만.”
호진의 예상대로라면 이제 곧.
“……형. 안 가?”
“…….”
이상하다.
문구에 적힌 효과는 「시야를 어둡게 한다」인데, 호진은 그것을 파훼할 방법이 있었다.
‘저번에는 곧잘 켜졌는데…….’
고민하던 호진이 눈을 두 번 깜빡거리는 순간.
─화악
일순 도로 위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호진이 노리던 상호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사냥꾼의 눈.’
그중에서 ‘시야가 밝아지고 넓어짐’이라는, 애매하지만 꽤 유용했던 효과.
그것이 ‘눈가리개’의 효과의 단점을 파훼한 것이다.
“됐다.”
“……형, 장난 그만하고 빨리 그거 벗어.”
용재가 못 기다리겠다는 듯, 호진의 안대에 손을 뻗는 순간.
호진은 그 손을 가볍게 낚아챘다.
“……어?”
“기다리라니까.”
말과 동시에 호진은 손을 뻗어 용재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빠각
“끕…….”
이마를 쥐어싸고 물러나는 용재.
그 모습을 본 다른 박 순경과 예은은 언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재빨리 표정을 폈다.
“저는 처음부터 호진 씨가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안대를 꺼낼 때부터 알았어요.”
“……네. 맞습니다. 그럼 출발하시죠.”
보인 건 방금부터지만, 설명하기 귀찮아진 호진은 그 둘에게 그냥 맞장구를 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사실 사물들이 명확하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시야를 어둡게 하는 효과만 사라졌을 뿐, 눈앞의 헝겊은 그대로였으니까.
다행히 헝겊 자체가 특수한 재질인지 그 너머로 흐릿하게나마 윤곽이 보이는 덕에 이동에는 문제가 없었다.
─저벅 저벅
“호진씨, 사주경계 하셔야죠……!”
호진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자, 박 순경이 황급히 따라붙으며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괴물들 위치는 얼추 알고 있으니까요.”
거침없이 걷던 호진은 무심하게 검을 뽑아 들더니, 차량의 반쯤 열린 트렁크 사이로 검을 쑤셔 박았다.
“크에에에엑!”
고통에 찬 단말마를 흘리며 덜컹거리는 차량.
그러나 호진이 트렁크 덮개를 누른 채 재차 검을 찔러 넣자 비명이 점차 잦아들고, 이윽고 정적만이 흘렀다.
“……어떻게?”
박 순경은 놀란 듯 크게 뜬 눈을 깜빡였고 호진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요. 그래도 생각보다 불편하네요.”
열어보진 않았지만 트렁크 안에 있던 것은 고블린이 분명했다.
호진은 안대의 효과로 그 생명체의 크기나 강함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라면 원래 단칼에 죽였어야 할 고블린을 두 번이나 찔러야 했다는 사실이다.
‘생각보다 눈가리개가 걸리적거리네.’
직접 손을 쓰는 건 어렵겠다고 생각한 호진은 전략을 바꿨다.
“지금부터 적의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제 주위로 붙어서 이동해주세요.”
생명의 파동을 느낄 수 있는 거리는 반경 50m 내외.
초계기 역할을 자처하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저번의 고블린 챔피언 같은 놈들이 공격해 온다면…….’
호진은 검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분명 리스크가 있는 작전이지만,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없는 법이다.
어느새 도착한 차들의 벽.
더 이상 도로 위로는 나아갈 길이 없다.
이제는 자신의 선택을 믿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