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여정의 시작 (2)
“따라오세요.”
후드는 앞장서서 일행들을 지하로 식료품점으로 이끌었다.
후드의 말에 따르면 식료품점 입구마다 문지기를 배치했고 암구호도 있다고 했다.
‘암구호라……. 괴물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군.’
그렇게 1층을 모두 막은 일행은 후드를 따라 식료품점으로 이동했다.
이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1층 입구에 도착한 후드는 문을 4번 노크했다.
─똑 또독 똑
미묘한 박자감.
노크도 암호 중 하나인 모양이다.
그러자 문 반대편에서 곧바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니 워커.”
“헤네시.”
……누가 만들었는지 상당히 술을 좋아하는 듯하다.
호진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데, 반대쪽에서 문을 여는 대신 질문을 건네 왔다.
“……위쪽이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몬스터의 침입이 있었어요. 다른 생존자 그룹과 놈들을 물리치고 오는 길입니다.”
“……다른 생존자?”
“무슨 문제라도?”
“언제 구조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사람을 늘리겠다는 말입니까?”
“여기 생존자 그룹은 강해요. 도움이 될 겁니다.”
“……기다리시죠. CCTV로 확인하겠습니다.”
잠시간의 침묵.
잠시 뒤 문 뒤쪽에서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허……. 당신이 말한 대단한 전력이 어린애와 비실거리는 중년, 갓 스물이 넘어 보이는 학생들입니까? 뒤쪽에 경찰이랑 검도복 입은 아저씨까지만 들어오라고 하시죠.”
“…….”
그 말에 후드도, 다른 일행들도 순간 표정을 굳히고 모두 호진을 바라봤다.
모두가 긴장한 모습에 호진은 다소 의아함을 느꼈다.
‘뭐지, 왜 다들 날 쳐다보는 거지?’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힘을 보여달라는 거구나.’
같은 생존자들이 상대라면 이런 무력시위보단 차분하게 대화로 풀고 싶었지만, 일행들을 위해서라도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호진은 일행들을 향해 안심하라며 싱긋 웃어 보인 뒤,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CCTV를 보고 있던 녀석이 다급하게 외쳤다.
“무…… 무슨? 싸우자는 건가?”
호진은 대답 대신 비상구의 난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투구 가르기.’
─서걱
두부처럼 썰려 나가는 난간.
“…….”
아무리 금속 중에는 강도가 무른 알루미늄이라지만 그래도 금속이다.
그 장면을 CCTV로 보았는지, 문 뒤에선 말이 없었다.
난간을 베어낸 호진은 CCTV를 바라보며 설핏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더 보여 드릴까요?”
“아, 아니. 바로 열지. 아니 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문 뒤에 남자가 허둥대자, 호진은 일행들을 보며 웃음 지었다.
“잘됐네요.”
그러나 일행들은 그런 호진의 눈을 피하기에 바빴다.
‘호진이 형, 다 좋은데…… 성격이 불같아졌다니까. 많이 변했어.’
‘왜…… 웃는 거지? 화나면 웃는 건가? 지금도 화나 있나. 조심해야겠군.’
‘역시 미친놈이네. 문은 안 썰어서 다행이다.’
일행을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와는 달리, 점점 이상한 오해를 쌓아가는 호진이었다.
용재, 신 사범, 후드는 각자 비슷한 오해를 하며 호진의 미소가 빨리 지워지길 기다렸다.
***
─끼익
“들어오시죠.”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문이 열리며, 아까 전 대화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복 차림의 남성. 아마 쇼핑센터 관리실 직원일 터.
호진이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서자 매장의 직원들과 손님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어떤 식으로 전달됐는지는 몰라도 그 시선에는 경계와 긴장,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실내는 어두웠지만 의외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는 겁니까?”
호진의 질문에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매장 내엔 비상전력이 있어서, 조금씩 아껴 쓰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식자재들도 풍족한 상황일 거다.
호진은 살짝 안도했다.
‘당분간의 식량은 받아갈 수 있겠네.’
호진의 뒤를 이어 다른 일행들도 하나둘 들어오고, 곧이어 매장 쪽의 사람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그러는 동안 호진은 식품이 있는 곳으로 곧장 이동해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도정 안 한 통밀쌀, 미숫가루, 통조림이랑, 에너지 바, 땅콩버터, 견과류 조금. 건조 스프랑, 물.’
최대한 열량과 영양분이 많으면서 쉽게 상하지 않는 식품들.
합류를 하기는 했지만 호진은 이곳에서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비록 전투에 지치기는 했지만, 하루빨리 형의 소식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형. 이것도 유통기한 길던데, 챙길까요?”
어느새 다가온 용재가 분유 한 통을 들고 흔들거렸다.
호진은 잠시 멈칫한 후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보니, 애기가 있더라. 그런 거까지 욕심 낼 필요는 없어.”
애초에 인벤토리를 열심히 채워봤자, 쌀과 식수만 40kg이 넘기에 다른 것들을 많이 챙길 수도 없었다.
인원을 계산해봤을 때, 이곳의 식량은 1년이 지나도 모자라진 않을 거다.
그렇지만,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거리는 관리실 직원은 초조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그러나 아까 보여준 모습 때문인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이 퍽 가여웠다.
‘예상한 대로네. 그럼 슬슬 얘기를 꺼내 볼까.’
쇼핑센터와의 거래에 대해 말할 시간이다.
처음부터 거래를 요구했으면 놈들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그냥 물건을 가져갈 거라 생각했던 상대가 거래를 요구한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지.
호진은 그리 생각하며, 가방을 닫았다.
“용재야, 대충 챙기고……?”
그만 일어나자고 말을 하려던 호진은 옆을 보고 말을 멈췄다.
진지한 표정으로 꽁치 통조림의 유통기한을 살피는 박 순경 때문이었다.
“박 순경님, 뭐하세요?”
“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말을 하려다 못했네요. 저도 호진 씨 따라갈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갑자기 왜…….”
뜬금없는 부탁에 호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유를 물었다.
“아하하……. 다른 게 아니라, 저도 김포 쪽에 누나랑 조카들이 있어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중간까지 같이 가고 싶습니다.”
박 순경이 머리를 긁적이자, 호진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직업이 직업이신데, 이런 상황에서 근무지를 벗어나도 괜찮나요?”
“이런 상황이니까 벗어나는 거죠.”
“…….”
하긴, 지구대 소속인 박 순경과 김 경위는 사건이 벌어진 후 관할 경찰서로 가봤지만, 이미 경찰서는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무전도 먹통인 데다, 명령을 내릴 사람들도 사라지자 두 사람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사람들을 구한 것이다.
정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군?
중요한 건 호진도 박 순경도 어떠한 정보가 없다는 사실이다.
박 순경과 용재가 준비를 하는 동안 호진은 쇼핑센터 측 대표를 만났다.
그리고 식량을 대가로 위에서 넉넉하게 챙겨온 무기의 일부를 건넸다.
대표는 자신들의 빈약한 무장이 신경 쓰였던 탓인지 생각 이상으로 반기며 식량과의 거래를 허락했다.
‘생각보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
호진은 최악의 경우 쇼핑센터 측 생존자들을 제압하고 일행들과 식량들을 챙겨 쇼핑센터를 떠나는 것까지 생각했었기에,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뒤 박 순경까지 준비를 마치고 떠나려는 순간, 다른 일행들이 다가왔다.
잠시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던 호진과 신 사범.
그때 신 사범이 먼저 입을 뗐다.
“가는 거냐.”
“네, 신 사범님도 원하신다면 저희와 가시죠.”
호진의 권유에 신 사범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여기 남겠다. 학부모님들을 찾기 전까지 학생들을 지키는 건 내 몫이니까.”
그런 신 사범의 대답에 호진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신 사범은 자신에겐 큰 상처를 준 사람이었지만, 도덕적이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다.
‘오히려 이런 사람이기에 상대 선수를 고의적으로 다치게 한 나를 안 좋게 본 거겠지.’
호진은 마음속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손을 내밀었다.
“건강하세요.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또 보죠.”
호진의 웃음에 잠깐 경직됐던 신 사범은 떨떠름하게 손을 뻗어 악수를 했다.
“……고마웠다. 몸조심해라.”
한편 옆에서는 박 순경과 김 경위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에헤이, 박 순경. 다시 생각해 보지.”
“선배님, 저는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누나랑 조카들이라고?”
“넵.”
“그려, 그럼 가야지. 어찌 실탄은 충분한가?”
김 경위는 주머니에서 실탄 상자 하나를 꺼내 박 순경에게 쥐여주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선물에 박 순경은 당황했다.
지금 상황에서 총과 총알은 금보다도 귀하다.
여분의 실탄을 챙기지 않은 박 순경에게 남은 총알은 3발.
“받어. 어차피 난 손 떨려서 잘 쏘지도 못해. 박 순경은 쐈다 하면 만발이잖어. 그리고 난 아직 총알 많어.”
김 경위가 씨익 미소 지으며 자신의 리볼버를 툭툭 두드렸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박 순경은 깊게 허리를 숙여 상자를 받으며 인사했다.
그러는 사이 쇼핑센터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둘러보고 온 의사는 미리 챙겨놓은 응급 치료 키트를 건넸고, 아이들과 대머리조차 어색하게나마 호진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건넸다.
짧은 동행이었지만, 그새 정이라도 든 것인지 호진은 진심으로 그들의 안전을 기원했다.
“저희는 강화도로 갑니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시거나 가실 곳이 없으시면 찾아오세요.”
그 말에 신 사범이 문득 뭔가 기억이 났다는 듯 물어왔다.
“형이 강화도에 있다고 했던가?”
“네 맞습니다. 뭐…… 제가 걱정할 만한 사람은 아니긴 하지만요.”
“기억이 나는군. 한때 동네에서 유명했으니까.”
“……좀 그렇긴 했죠.”
“어떤 사람인데 그럽니까?”
박 순경이 궁금한 듯 물어오자, 호진은 잠시 침음을 흘리다 답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그렇기에 이런 세상에서 더 잘 적응하겠지.”
신 사범이 피식 웃어 보이자, 호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형이라면 분명 이미 이 세계에 적응을 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렇게 인사를 마친 호진과 용재, 박 순경은 지하 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뒤.
“근데. 그쪽은 아까부터 왜 따라오는 겁니까?”
계단을 내려가던 호진은 고개를 돌려 졸졸 따라오던 후드를 향해 물었다.
“아직도 뭐가 의심스러운 겁니까?”
후드는 호진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따라가는 게 아니라, 저도 주차장에 볼일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머쓱해진 호진은 뺨을 긁으며 다시 내려갔고, 어느새 굳게 닫힌 문에 도달했다.
─덜컥
문이 열리자 서늘한 지하 주차장의 공기가 호진의 코끝을 간질거렸다.
낮임에도 깜깜하기 그지없는 지하의 풍경에 일행들은 각자 랜턴을 꺼내 들었다.
반면 ‘사냥꾼의 눈’의 효과로 호진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호진은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일행들을 주차관리실로 이끌었다.
그곳에 매장용 차량의 키들이 수납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터벅 터벅
소리를 죽였음에도 일행들의 발걸음 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주변이 너무나 고요한 탓이다.
알바를 하며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고요한 적막에 호진은 뭔가 낯섦을 느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도착한 관리실.
번호를 눌러 문을 열려 하는 순간, 박살 난 문고리가 보였다.
─끼익
호진이 문을 열어젖히자, 어두운 사무실 의자에 앉아있는 인형(人形)이 보였다.
“…….”
코끝을 찌르는 시취에 호진은 잠시 멈춰 섰다.
“윽, 이건 또 뭔 미친.”
호진의 뒤에 붙어온 용제가 랜턴으로 의자를 비추더니 욕설을 내뱉었고, 박 순경 또한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죽은 시체의 얼굴에는 손수건이 덮여 있었고, 두 손은 가지런히 모여 있다.
관리실은 이미 하나의 묘실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다가온 후드가 시체와 일행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을 꺼냈다.
“……미안합니다. 누군가 여기 올 거라 생각 못 해서.”
“……그쪽은?”
호진의 질문에 후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입니다.”
그 대답에 호진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예은이었던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간 중년 남성.
그의 딸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