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여정의 시작 (1)
─띠링
전자음과 함께 눈앞에 도열한 푸른 창.
「현재 이호진 플레이어가 선택하실 수 있는 직업은 총 3가지입니다.」
「견습 모험가(Apprentice Adventurer)」
「기사의 종자(Squire)」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
“……죄다 몸 쓰는 직업인 건 그렇다 치고, 광신도는 또 뭐야. 얼척이 없네.”
직업 하나가 영 거슬렸지만 그래도 직업이라니, 뭔가 살짝 떨리고 두근거렸다.
원래 게임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재밌는 부분이 직업선택이 아닌가.
캐릭터의 성장 방향을 좌우하고 변곡점이 되는 포인트.
또한 ‘견습 모험가’나 ‘기사의 종자’라는 직업은 검과 중세판타지에 흠뻑 매료된 호진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우선 위부터 볼까.”
「견습 모험가(Adventurer)」
「등급:일반」
「사랑? 돈? 명예? 무엇이라도 좋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것. 그것이 모험가다. 견습이라 불리지만 그 마음가짐만큼은 어떤 베테랑보다도 진심이다.」
「획득 스킬: 미니맵/ 길을 보여줍니다.」
「획득 스킬: 손놀림/ 어떤 무기든 손쉽게 익숙해집니다.」
「획득 장비: 가죽 갑옷(Leather Armour), 숏소드(Short sword), 모험가 장비」
「직업 획득 조건: 야간 행군 5km」
호진은 예상보다 큰 보상들에 눈을 크게 떴다.
직업을 얻는 것만으로 장비와 스킬을 얻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성장할 가능성이 눈에 보였다.
조건조차도 어렵지 않다.
당장 오늘에라도 수행 가능한 조건.
다만, ‘미니맵’ 스킬은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해 보이기에 일단은 보류다.
그렇게 호진은 다음 선택 창에 손을 올렸다.
「기사의 종자(Squire)」
「등급: 레어」
「검을 갈고 갑옷에 기름을 칠한다. 기사의 전투에는 다양한 준비가 필요한 법. 기사의 종자는 오늘도 전장을 누비는 고강한 기사를 꿈꾼다.」
「획득 스킬: 기승/ 탈것을 탈 수 있습니다.」
「획득 스킬: 검술/ 창술/ 격투술/ 마상창술/ 기사의 기본이 되는 무예를 배웁니다.」
「획득 장비: 사슬갑옷(Mail), 아밍 소드(Arming sword), 라이트 랜스(Light Lance)」
「직업 획득 조건: 게이트 2개 클리어(1/2)」
“…….”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거다.
호진은 두근거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장 창술과 격투술을 익힐 수 있고, 어쩌면 검술 레벨이 하나 더 오를지도 모른다.
장비부터 모험가와는 다른 사슬갑옷과 랜스, 그리고 보조무기인 아밍 소드까지 챙겨준다.
‘말은…… 나중에 강원랜드라도 가면 되겠지.’
한 번도 안 타봤지만 스킬도 있으니, 무난하게 탈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퀘스트 조건도 앞서 클리어한 개미굴이 이미 포함된 듯, 한 번만 더 클리어하면 된다.
바로 직업 퀘스트를 받으려는 순간.
문득 아래 하나 남은 직업이 눈에 밟힌다.
“……얼마나 쓰레기인지 구경이나 할까.”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
「등급: 유니크」
「검의 교단의 교리는 하나. 검을 믿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도는 검을 휘두르는 자신 또한 믿는다. 오직 검으로만 세상을 대하니, 단련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획득 스킬: 확신/ 검을 제외한 다른 무기 사용 불가. 대신 검 사용 시 추가 피해.」
「획득 스킬: 검술의 묘리/ 현재 지닌 검의 소양에 따라 깨달음 부여.」
「획득 스킬: 검의 정수/ 검에 쌓인 시간을 흡수합니다.」
「획득 장비: 투핸디드 소드(Two─handed sword), 롱소드(Longsword), 아밍 소드(Arming sword), 대거(dagger)」
「직업 획득 조건: 오직 검만으로 매우 어려움 업적 3회 달성(2/3)」
“……?”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호진은 육성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이게 무슨……?”
지독한 악취미다.
검으로만 싸워야 한다는 사실부터, 기본적인 방어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스킬도 모두 검. 주는 장비도 모두 검.
검, 검뿐이다.
스킬의 설명조차 막연하다.
검에 쌓인 시간을 흡수해? 깨달음을 줘?
아니 그게 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단어가 머리에 맴돈다.
‘유니크.’
일반 등급인 ‘견습 모험가’와 레어 등급인 ‘기사의 종자’의 차이는 명백했다.
그렇기에 유니크인 광신도 역시 ‘기사의 종자’보다 좋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계속 읽다 보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직업들의 경우 스킬 설명이 직관적이었지만, 광신도의 스킬들은 애매모호하다.
그렇기에 예상보다 좋을 가능성도 분명 존재했다.
물론 꽝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말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인가.”
“뭔 고양이요?”
옆에서 문득 들려온 소리에 호진은 깜짝 놀라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으앗!”
호진의 반응에 더 깜짝 놀란 용재가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런 용재를 보며 호진은 당황하며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깜짝 놀랐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고 자시고. 한창 싸우다 말고 그렇게 멍하니 누워만 있으니까 어디 다친 줄 알았죠.”
‘아, 그러고 보니…….’
호진은 고블린 챔피언을 죽이자마자 바로 그 옆에 누워 상태창을 보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 확인해도 늦지 않을 텐데, 직업이라는 단어에 홀려 그만 얼빠진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미안. 상태창 좀 확인하느라.”
호진이 빠르게 사과하자 용제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괜찮아요. 상태창은 인정이죠. 어차피 정리도 다 끝난 모양이고요.”
호진이 주변을 둘러보자 김 경위와 의사, 대머리와 아이들까지 모두 와 있었고 후드는 몬스터 사체들에서 화살을 뽑아 갈무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신 사범님이랑 박 순경님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남은 고블린들을 수색 중이에요. 가능하면 뚫린 문까지 막겠다는데, 형도 괜찮아지는 대로 따라오래요.”
호진은 한층 더 민망해졌다.
물론 움직이기 힘들긴 했지만, 수색을 부탁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정도면 리더 자격 실격이다.
‘일행들이 유능해서 망정이지.’
호진이 민망해하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문득 용재가 물었다.
“아 근데 뭔 고양이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슈뢰딩거의 고양이고 뭐고.
호진은 도박을 좋아하지 않았다.
검을 좋아하고 열심히 배웠지만, 중세 마니아인 만큼 기병과 창의 위력을 너무 잘 알고 있다.
1명의 기사는 수십 명의 보병을 상대하니 이동성과 파괴력 모두 보병과 비교할 수 없다. 설령 기사가 말에서 내린다 해도, 철로 뒤덮인 갑옷을 입고 둔기나 검을 휘두른다면 일반 보병이 할 수 있는 건 도망뿐이다.
‘비록 처음부터 익혀야 할지라도.’
호진은 ‘기사의 종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직업 퀘스트 수락」
「검의 교단 광신도(Fanatic)의 길」
「직업 획득 조건: 오직 검만으로 매우 어려움 업적 3회 달성(2/3)」
“?”
마음을 정하고 상태창을 다시 켜자 보이는 퀘스트 수락 창.
“……뭔?”
전혀 예상치 못한 문구에 호진의 입에선 바보같이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
“미친.”
호진이 인상을 구긴 채 깨진 문에 커다란 벤치를 끌어다 막으며 중얼거렸다.
“그게 그렇게 되냐.”
단지 직업정보를 읽고 있을 뿐이었고, 그 타이밍에 용재가 말을 걸어서 놀라 일어났을 뿐이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직업 퀘스트를 수락해 버렸을 줄이야.
‘누른지도 몰랐다. 젠장.’
그가 인상 쓴 채로 벤치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문으로 이동하자, 일행들이 괴물이라도 보듯 바라보며 길을 비켰다.
그때 어디선가 용재가 감탄을 터트리며 호진에게 다가왔다.
“형, 도대체 근력을 몇이나 찍은 거예요?”
다들 비켜설 때 용재가 눈치 없이 다가와 묻자, 호진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러게? 맞아보면 알지 않을까? 딱밤 한 대만 맞자, 용재야. 마침 나도 뭔가 때리고 싶었는데.”
“……저를요?”
“응.”
“……아! 박 순경님 뭐라고요? 저 필요하다고요?”
용재가 박 순경을 다급히 찾자 멀찍이 떨어져 바리케이드를 쌓던 박 순경이 고개를 저었다.
“예? 아뇨. 괜찮…….”
“하하하하, 많이 급해 보이시네. 형, 저 박 순경님 도와드리러 갈게요.”
용재가 재빠르게 도망치자, 다른 일행들도 스스슥 흩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선택해 버린 건 어쩔 수 없지.’
후회해도 달라질 건 없으니,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 마음먹은 호진은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벤치를 가뿐하게 집어 들었다.
현재 호진의 근력 스탯은 17.
이번에 2레벨 오른 스탯을 지구력과 근력에 투자하며, 17, 17, 17 스탯이 됐다.
웬만하면 지구력은 천천히 올리고 싶었지만, 이번 전투도 지구력이 아슬아슬했기에 슬슬 올릴 필요가 있었다.
지구력도 올리고 나니 몸에 활력이 돌아서 좋았지만, 가장 크게 체감이 되는 것은 근력이다.
‘다음에도 근력이나 올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문에다 벤치를 쌓는데, 뒤에서 탄성이 들렸다.
─와아!
아이들의 순수한 감탄사.
그곳을 바라보니 용재가 벤치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캐비닛을 번쩍 들어 옮기는 중이었다.
“용재야, 네 녀석 설마 근력에……?”
신 사범이 제자가 그리 멍청하지 않길 바란다는 투로 묻자, 용제가 헤헤 웃으며 답했다.
“맞는데요. 올인해서 근력만 17이에요.”
용재의 당당한 대답에 비 플레이어들은 어리둥절했고, 신 사범은 지그시 눈을 감았으며, 후드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 멍청이가.”
호진 또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용재의 현재 레벨은 3.
원래 힘 하나만큼은 좋았던 단순한 녀석이라 민첩이나 지구력을 올리라 조언했었는데, 근력에 스탯을 몽땅 투자한 모양이다.
호진이 용재를 향해 터벅터벅 다가가자. 일순 일행들의 숨소리가 조용해졌다.
누군가는 걱정된다는 듯, 누군가는 흥미롭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는 사이.
용재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어…… 형? 아니 잠깐만. 내가 형 말을 안 들은 게 아니라.”
멀리서부터 용재가 허겁지겁 변명을 하는데, 호진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손을 쑥 뻗었다.
“으앗…… 에? 어라.”
질끈 눈을 감았던 용재는 아무런 통증이 안 느껴지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눈에 보이는 건 커다란 도끼 한 자루.
“이건?”
고블린 챔피언이 쓰던 배틀액스.
호진조차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무겁다.
그렇다면 이걸 다룰 만한 사람은 용재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은 직업 퀘스트 때문에 이제 검 외의 무기를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벌써 누군가에게 주게 될 거라 생각은 못 했기에 인벤토리에 쟁여놨던 건데, 이렇게 된 이상 주인은 정해진 듯했다.
“혀엉.”
예상치 못한 선물에 용재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고마…….”
─딱!
감사 인사를 하려는 순간 이마에 느껴지는 통증.
호진의 날카로운 딱밤에 용재의 이마가 붉게 부어올랐다.
“끄읍.”
용재가 머리를 쥐어 싸자 호진은 씩 웃었다.
“민첩 올렸으면 피했을 거다.”
용재는 아파서인지 고마워서인지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끼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호진은 돌아서며 속 시원한 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좀 후련하네.’
아직도 직업 선택을 강매당한 게 조금 억울했던 호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