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생존자들 (3)
─철컹.
비상구로 통하는 직원용 쪽문은 호진이 지닌 카드키로 쉽게 열렸다.
문이 닫히자 실내는 금세 어둑해졌다.
베터리를 쓰는 도어락과 달리 센서등은 작동하지 않았는데, 이곳도 전력이 끊긴 모양.
아무래도 식료품점보다 먼저 갈 곳이 생긴 듯했다.
이대로 지하로 내려간다면, 자신은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터.
반면 위층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전등이 없어도 꽤나 밝을 것이다.
“3층에 캠핑 물품을 파는 아웃도어 매장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전등이랑 가방,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은 후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어두운 실내가 불안했던 탓일까, 호진의 말에 만장일치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행히 이 쪽문은 비상구와 연결되기에 어느 층이든 이동 가능했다.
호진은 조심스레 비상구 문을 열고 3층으로 올라갔다.
─끼익
‘기름칠 좀 하지.’
최대한 살살 밀었지만 노력과는 달리 녹슨 문이 삐걱대는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틈으로 매장 안쪽을 살피자 예상대로 실내는 적당히 밝았다.
호진이 사냥꾼의 눈을 사용해 샅샅이 살폈지만 별다른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서자, 아웃도어 옷과 기구로 가득한 매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제대로인데요?”
매장을 둘러본 박 순경이 눈을 빛냈다.
호진의 시선을 눈치 챈 박 순경이 뺨을 긁적이며 웃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캠핑을 좋아해서.”
“아닙니다. 저는 이쪽은 잘 몰라서 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도와주시겠어요?”
호진의 말을 들은 박 순경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넵, 맡겨주시죠.”
박 순경은 순식간에 가방 코너로 가서 실용성이 좋은 가방들을 나눠주더니, 각종 랜턴들을 종류별로 설명했다.
전력 소모가 적은 랜턴부터, 멀리까지 비출 수 있는 랜턴까지 다양하게 랜턴을 챙긴 일행은 마지막으로 각자 무기를 쓸 만한 손도끼나, 나이프, 아이스픽을 챙겼다.
“형. 형은 뭐 안 챙겨?”
종류별로 무기를 챙긴 용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호진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미 챙겼어.”
“……없는데?”
남들이 안 보는 사이 인벤토리에 챙겨놓은 상태였지만 굳이 말해주진 않았다.
“나중에 말해줄게.”
남들과는 다른 능력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용재는 몰라도, 금방 헤어질 다른 일행들에게 밝힐 필요는 없지.’
그리 생각한 호진은 평범하게 가방을 메고 랜턴을 챙겼다.
그때 슬며시 다가온 박 순경이 웬 짐 꾸러미를 내밀었다.
“멀리 가신다면서요. 챙기시는 게 좋을 거예요.”
휴대용 버너와 부탄가스, 담요와 전등, 우비와 나침반.
받기 전까지 전혀 생각 못 했지만, 막상 보니 전부 필요한 것들이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필요한 게 많네요.”
“아닙니다. 그것보다 호진 씨에게 할 말이 있는데요.”
박 순경이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끼익
녹슨 문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들어왔던 비상구 문이었다.
재빨리 눈으로 인원 체크를 했지만 비는 인원은 없었다.
즉, 적어도 같은 편은 아니다.
호진이 검을 움켜쥐자 다들 무기를 따라 쥐고 숨을 죽였다.
천천히 이동해 문을 살피자,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사람이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건…… 활인가.’
그 사람은 천천히 걸어서 일행이 몸을 숨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빠른 속도로 활시위를 당기더니 일행이 있는 쪽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사각이었던 만큼 아무도 맞지 않았지만 놀란 일행 중 몇 명이 헛숨을 삼켰다.
인기척을 냈기에 더 이상 숨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호진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미 상대는 몸을 숨긴 뒤였다.
호진은 재빨리 박 순경에게 눈짓했다.
이런 상황에는 경찰만큼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다행히 바로 알아들은 박 순경이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아, 경찰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생존자들입니다. 해치지 않아요.”
“…….”
긴장한 채 살짝 떠는 박 순경의 말에도 상대는 답하지 않았다.
꽤나 신중한 성격인 듯했다.
호진은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싸울 생각 없습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돼요. 저희가 조용히 나가겠습니다.”
“…….”
여전히 침묵하는 상대.
‘화살을 날리지 않는다는 건 동의라고 봐도 되겠지.’
그렇게 무기와 일행을 챙겨 나가려는 찰나.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소리의 근원지는 밖이었기에 호진을 비롯한 일행 중 몇몇이 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밖에 보이는 건 한 무리의 고블린이었다.
호진이 전에 봤던 녀석들보다 장비가 좋았고, 몇몇은 아까 봤던 커다란 개를 타고 있었다.
그래도 상대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저보다 몇 배는 많은 개미 떼와 홀로 싸워 보았기에.
그때 누군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색이 된 신 사범.
그는 살짝 떨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 그때 그 녀석이야.”
호진이 다시 밖을 보니 잠긴 센터의 문 앞에 유달리 커다란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다른 고블린들을 물러나게 하더니 손에 쥔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쾅 !
알루미늄 쪽문은 음료 캔처럼 잔뜩 일그러져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몇 번 버티지 못할 게 눈에 훤했다.
“이 소리는 뭐야……. 당신들,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때 뒤에서, 방금까지 대치하던 후드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활을 든 손과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많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고블린들이 일행을 따라온 모양이지만 호진은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저희가 아닙니다. 괴물들의 습격입니다.”
호진이 창가를 가리키자 후드는 천천히 다가와 창밖을 살폈다.
그러다 멈칫하더니 창문을 열어젖히고 곧장 활시위를 당겼다.
놈들과 교전할 생각이 없었던 호진은 후드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화살이 활을 떠난 후였다.
“크엑.”
짧은 단말마와 함께 개 위에 타고 있던 고블린 한 마리가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고블린들은 당황한 듯 두리번거리다 창가를 올려다보고 소리를 내질렀다.
“크륵.”
“케에에에엑.”
그 눈동자들은 호진들에 대한 적의와 살기로 이글거렸다.
개중 덩치가 큰 녀석이 도끼를 양손으로 집더니 문으로 다가가 재차 도끼를 휘둘렀다.
─쾅!!
이번에는 문이 거의 부서져서 덜렁거렸다.
이어서 녀석은 문에 다가가 문을 거칠게 잡아 뜯었고
─콰지직
당장 뜯겨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됐다.
“어쩌자고 활을 쏜 겁니까?”
“……이 아래 식료품점에 직원들이랑 손님들이 마흔 명 가까이 있으니까요.”
“……유인이군요. 그래도 쏘기 전에 한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았습니까?”
후드의 음색에는 분노가 어른거렸기에 그게 진짜 이유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유인이 목적이었다면 성공적이라 할 만했다. 실제로 놈들은 잔뜩 흥분한 모양이니까.
숫자가 많은 놈들과 이렇게 전면전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호진은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고블린들 정도는 혼자 물리칠 자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후드의 활 솜씨가 제법 뛰어나 보였기 때문이다.
덩치 큰 녀석이 걸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싸워야겠네요. 이렇게 된 거, 손 좀 빌려주시죠.”
호진은 화를 내지 않고 태연하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후드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끌어들여서 죄송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자 집중해주세요.”
호진은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놈들이 올라올 곳은 비상구와 에스컬레이터 두 군데입니다. 비상구는 철로 만들어진 데다가 두꺼운 탓에 뚫기 어려울 겁니다. 김 경위님과 의사 선생님은 비상구를 안 열리게 고정해주시고 그쪽을 지켜주세요.”
“맡겨주게. 가자고, 의사 양반.”
뚫리지 않을 거라는 말에 화색이 된 김 경위는 의사와 함께 재빨리 비상구로 향했다.
“용재, 신 사범님, 박 순경님 그리고 그쪽은 절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지키시죠.”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데 대머리가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이래서 나오지 말자고 한 건데.”
대머리가 짜증을 내자 호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아저씨는 아이들이랑 비상구 근처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그래야지. 난 싸움 같은 거 할 줄 몰라.”
호진은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제는 그렇게 안 보이던데요.”
대머리는 문득 어제 호진의 어깨를 움켜줬던 것을 떠올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크큼. 아 젊은 선생, 어제는 내가 조금 흥분해서 그렇지, 원래는…….”
“아뇨. 그때 말고 여기 주차장에서요.”
“뭐 주차장? 무슨…… 아? 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던 대머리는 순식간에 얼굴이 사색이 됐다.
호진은 그런 대머리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언젠가는 도망치지도 못하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머리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멀거니 서 있었고, 호진은 그런 그를 지나쳐 지나갔다.
일행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무기를 챙겨 호진을 따라갔고, 대머리는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인 채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
─케에에에에엑
고블린 특유의 소리가 쇼핑센터에 울려 퍼졌다.
놈들이 실내로 진입한 것이다.
일행 중 플레이어는 개미를 잡은 용재와 신 사범 둘.
“그쪽도 플레이어입니까.”
호진의 질문에 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히 재듯이 답했다.
“3렙이요. 그쪽은요.”
“7레벨입니다.”
“……말도 안 돼.”
후드는 충격받은 듯 작게 중얼거렸지만 굳이 설득시킬 필요는 없었다.
“신 사범님과 용재는 에스컬레이터 옆으로 빠져나오는 놈들을 상대해주시죠. 그쪽은 편하게 포지션 잡아주시면 됩니다. 박 순경님은 저분이 활 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보조해주시고, 총은 최대한 아껴주세요.”
호진은 에스컬레이터에 정면에 서서 허리춤에 찬 진검을 만지작거렸다.
“정면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의 담담한 오더에 다들 군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태 호진의 말대로 움직여 손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탁닥 타닥 타닥
뭔가가 에스컬레이터를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놈들은 일행들을 발견한 듯 흥분에 찬 소리들을 내질렀다.
“께에에엑! 케르르륵.”
“크르르르. 컹컹.”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늑대 같은 짐승을 탄 고블린 기수들이었다.
에스컬레이터의 올라오는 칸과 내려가는 칸 양쪽으로 나뉘어 뛰어 올라오는 녀석들.
무방비하게 서있는 호진의 모습에, 놈들은 손에 든 도끼나 칼을 흔들거리며 늑대를 재촉했다.
─쒸이익
그 순간.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 하나가 정확하게 한 기수의 목을 꿰뚫어 버렸다.
“케륵?”
허공에 붕 뜬 녀석의 몸이 뒤따라오던 녀석과 부딪히며 에스컬레이터 한쪽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케르르르륵!”
반면 올라오는 쪽에 있던 녀석들은 잠시 멈칫했을 뿐 더욱 속도를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늑대가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자 호진은 그제야 검을 뽑아 들었다.
─서걱
섬광처럼 뻗어나간 검이 벌어진 입을 가르고 늑대의 머리를 양분했다.
툭 잘려나간 머리가 공중에 빙글 도는 사이, 하관만이 남은 놈은 혀를 길게 내뺀 채 비틀거리다 에스컬레이터에 축 늘어졌다.
그 위에서 균형을 잃은 고블린 기수는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목 위를 잃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보지 못한 뒤의 두 놈이 재차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진은 능숙하게 검을 휘둘렀고, 놈들의 머리와 몸은 장난감이라도 된 듯 툭툭 떨어져 나갔다.
개미굴에서 긴 턱과 앞발을 휘두르며 자신을 몰아붙였던 그 녀석과의 경험 덕분에, 늑대와 고블린의 연계가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개활지에서 싸웠다면 또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 호진은 전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순식간에 세 마리가 넘는 고블린 기수를 처리한 호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다가 문득 일행들의 시선을 느꼈다.
황당함, 놀람, 동경.
특히 신 사범의 경우는 벌어진 입에서 침이라도 흘릴 듯했다.
“케흑?!”
에스컬레이터에 넘어져 있던 고블린 기수는 별안간 몸을 일으키더니, 늑대조차 내버린 채 줄행랑을 쳤다.
그 모습에 일행들은 다시 한번 황당해했지만, 사실 여기까진 호진이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고블린이 상대라면 몇 마리가 오든 자신의 검에 반응할 수 없을 테니까.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
─쿵 쿵 쿵 쿵
땅이 울리는 착각을 주는 거체.
“크르르르륵!!”
신 사범이 일전에 말했던 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