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생존자들 (2)
─쪼르르륵
정수기에서 나온 뜨거운 물이 믹스 커피와 섞이며 달달한 향이 퍼져나갔다.
병원 담요를 어깨에 두른 두 아이는 대기실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들었고, 신 사범은 호진이 건넨 커피를 손에 들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다른 아이들은…….”
호진은 대충 짐작하면서도 입에 담기 어려워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신 사범의 손이 작게 떨려왔다.
“……전부 여섯이었어. 둘은 집까지 데려다줬고.”
“…….”
“그리고…… 만난 거야. 괴물들을.”
신 사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호진은 그런 신 사범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신 사범의 텅 빈 눈동자에는 자신이 비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상대할 만했어. 한 놈을 죽이자 플레이어라는 게 되었지.”
‘플레이어.’
호진만이 아니었다.
‘괴물을 죽이는 것. 그게 조건인 건가?’
잠시 말을 멈췄던 사범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별거 없다고 생각했어. 한 놈을 죽이자 같이 있던 두 놈이 도망쳤으니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 놈들은 금방 다시 찾아왔지. 이번엔 다른 괴물과 함께.”
“다른 괴물?”
“생긴 건 다른 놈들과 똑같았어. 염소같이 툭 튀어나온 눈에 초록색 피부였지. 대신 덩치가 컸어. 손에 든 커다란 도끼가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강하던가요?”
“……몰라.”
“……네?”
“몰라……. 싸워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때 경찰들이 나타났거든. 살았다고 생각했지. 경찰들이 총도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반으로 찢겨 죽기 전까진.”
“…….”
“놈도 한 발은 맞았어. 그런데 꿈적도 안 하더군. 대신 놈은 즐겁다는 듯이, 죽인 경찰의 피를 마셨어. 그사이 나는 애들을 데리고 도망쳤고. 그게 전부야. 달리다 보니 학생 두 명이 안 보였어.”
“…….”
“내 잘못인 거야? 네 말대로 관장실에 숨어 구조를 기다렸어야 했을까?”
신 사범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호진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사범님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그의 행동을 힐난하는 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호진은 아이들의 집까지 하원을 도운 신 사범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건 선택이었을 뿐.
신 사범은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이상의 위로는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호진은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신 사범이 아주 작게 뇌까렸다.
“고……맙다.”
호진은 쓰게 웃으며 몸을 돌려 용재가 있는 진료실로 향했다.
용재는 수액을 맞으며 푹 잠들어 있었다.
“너는 형한테 진짜 감사해야 해.”
호진은 용재의 머리를 툭 친 후 옆에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눈꺼풀이 미친 듯 무겁게 눈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진짜…… 이……상한…… 하루였다.’
하지만 이만큼 살아있음을 실감한 하루도 없었다.
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호진은 인생에 두 번 없을 단잠에 빠져들었다.
***
“밖에 나가자고? 진짜 다들 미쳤어?”
“구조대가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립니까.”
호진은 또다시 싸우는 대머리와 박 순경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결정하세요. 자꾸 이러시면 저희 먼저 출발합니다.”
호진의 재촉에 박 순경이 고개를 돌려 난처한 듯 웃었다.
“호진 씨, 잠시만요. 저희도 거의 다 준비했습니다. 그쵸, 아저씨?”
“뭔 미친 소리야, 이 짭새야.”
“…….”
“…….”
지금 병원에 생존자는 총 9명.
박 순경과 김 경위는 물자가 풍부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어 했다.
반면 대머리와 의사는 병원에 머무르고 싶은 모양이었고, 신 사범과 아이들은 중립을 지켰지만 밖이 두려운지 경찰들의 의견을 꺼려 했다.
호진은 그들의 의견과는 별개로 강화도로 떠날 준비를 한 상태.
잠에서 깬 용재는 상황을 알려주자마자 일말의 고민도 없이 호진을 따라오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완강한 대머리의 고집에 박 순경이 난처해하자 호진은 조금만 그를 돕기로 했다.
“구조대가 온다고 해도 금방은 안 올 겁니다.”
호진의 말에 대머리와 박 순경뿐이 아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여전히 통화는 먹통이고, 전기도 나갔습니다. 그런데 시내에서 폭음은커녕 총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요. 구조대가 아무리 빨리 와도 오늘은 아니겠죠.”
잠시 뜸을 들이자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이 피어났다.
“여기 계신 분들, 12시간 넘게 사탕 말고 드신 것도 없을 텐데요. 그리고 전기가 나간 만큼 마트의 음식들도 슬슬 상하는 것들이 나올 겁니다.”
“서……설마. 음식들이 그렇게 빨리 상한다고?”
대머리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해산물이나 고기의 경우 상온에서 수 시간이면 맛이 갑니다. 어제부터 꺼내져 있던 음식들은 슬슬 파리가 날릴지도 모르겠네요.”
힘껏 불안을 조장하자 대머리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지금이다.’
더 시간을 주면 다른 핑곗거리를 찾을 터.
“저희는 바로 떠날 겁니다. 따라오시든 마시든 알아서 하세요. 용재야.”
“응. 호진이 형.”
용재가 문을 열자 대머리가 황급히 외쳤다.
“에헤이, 젊은 선생. 가네, 가. 안 그래도 같이 가려고 했어.”
그 모습을 보던 박 순경과 김 경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의사와 신 사범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 나갈 채비를 했다.
목적지는 간단했다.
이곳에서 300m쯤 떨어진, 호진이 일하던 작은 쇼핑센터.
대부분 의류나 잡화를 파는 쇼핑몰이지만 지하 1층만큼은 식료품을 팔았다.
호진의 경우 다시 돌아가게 된 꼴이지만 그 또한 식량의 수급은 필요했다.
인벤토리에 뜨거운 물을 넣은 결과, 몇십 분 후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그 말은 즉 인벤토리에 넣은 물건에 보존 효과는 없다는 뜻. 결국 보존식이 대량으로 있는 마트에 들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차장에는 매장용 차량이 있다.
다소 번거롭지만 갈 만한 메리트는 확실했다.
그렇게 생존자 그룹은 호진과 박 순경 그리고 대머리를 선두 그룹으로, 나머지는 후미 그룹으로 나누어 쇼핑센터를 향했다.
─뚜벅 뚜벅.
계단을 내려가 거리로 걸어 나가자 하룻밤 만에 변해버린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도로 위에는 사고 난 차량으로 길이 엉망이었고, 가드레일과 가로등은 멀쩡한 게 드물었다.
무엇보다 군데군데 붉게 물든 보도블록들이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연상케 했다.
피륙이나 몇몇 잔해들은 눈에 띄었지만 이상하게 시체의 수가 적었다.
아니, 의외로 생존자들이 많은 것일까.
그 해답은 곧 알 수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데 창문 너머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두려움, 호기심, 부러움.
호진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에서 그러한 감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괴물은 생각보다 없었어. 이거 참…… 어이가 없네.’
지금까지 건물에 있던 사람들.
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족히 수백 명은 넘는다.
이 거리에만 수천 명의 인간이 있겠지.
호진이 상대한 괴물들은 분명 강했지만, 인간이 아예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들이 모두 플레이어가 된다면 사냥당하는 건 오히려 괴물들일 터.
‘저 사람들은 모두 대머리 아저씨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괴물들을 죽이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니 구조대를 기다리자, 라고.’
그 믿음과 생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저들도 호진도 아직 몰랐다.
모두 각자의 선택일 뿐.
하지만 호진은 플레이어가 된 이후 확신했다.
이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재난이 아니라고.
이 변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피하고 숨는 게 아니라고.
호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쇼핑센터가 보였다.
코너만 돌아서 100m 가량 직진하면 도착할 거리.
“와, 벌써 다 왔네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박 순경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호진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아보다가 표정을 구겼다.
“박 순경님. 그 아저씨, 어디 갔습니까?”
“예? 제 뒤에 잘…… 없네.”
호진이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박 순경 뒤쪽에 있던 빵 가게의 유리문이 벌컥 열리며 대머리가 튀어나왔다.
허겁지겁 튀어나온 대머리의 손에는 크림빵 두 개가 들려있다.
빵집을 지나가다가 참지 못하고 몰래 들어간 모양.
“아, 아저씨 혼자 다니시면…… 아…… X같네. 진짜.”
한마디 하려던 박 순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빵집에서 나온 게 대머리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에에에엑.”
고블린.
대머리가 빵집에 있던 고블린을 끌고 나왔다.
게슴츠레한 눈이나 침 자국을 보니 잠자던 놈이다.
명백히 쓸데없는 교전.
‘귀찮네.’
호진은 앞으로 저 인간과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놈과 거리를 좁혔다.
‘거합.’
거합 스킬을 사용한 발도는 호진 본인조차도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빨라졌다.
고블린은 순식간에 다가온 호진에 놀라 졸린 눈을 크게 떴고, 그 상태로 다신 눈을 감지 못했다.
─서걱
마치 얼린 육고기를 써는 듯한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단 한 번의 올려 베기.
그것만으로 호진은 자신의 성장을 깨달았다.
‘이 정도였나.’
움직임도 기술의 숙련도도 개미굴에 들어가기 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대……단하시네요.”
막 삼단봉을 뽑아들던 박 순경이 놀랐다는 듯 다가와 말했다.
검술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방금 호진이 검을 뽑는 속도는 신이한 것이었다.
“후우 놀랐네, 쓰벌. 고맙네. 젊은 선생. 자 이거 하나 받게.”
대머리도 어느새 다가와 선심 쓰듯이 크림빵 하나를 내밀었다.
이미 다른 하나는 뜯어서 입에 물고 있는 상황.
그 모습에 박 순경도 호진도 할 말을 잃었다.
“…….”
화도 사람에게 내는 거지, 돌이나 나무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법.
호진이 간신히 고개를 젓자, 대머리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하긴. 크림이 조금 싸구려긴 하네. 뭐 그래도 들고 왔으니 먹어줘야지.”
말과는 달리 게 눈 감추듯 빵이 사라지는 모습에 박 순경이 중얼거렸다.
“푸드 파이터야 뭐야.”
호진은 잠시 멈춰 이쪽을 주시 중인 후미 그룹에 안전하다는 사인을 보낸 뒤 주변을 살폈다.
그러던 중 호진의 눈에 뭔가 들어왔다.
저 멀리 이쪽을 주시 중인 개 한 마리.
‘아니, 개가 맞긴 한가.’
아무리 작게 봐도 웬만한 대형견보다 크다.
놈은 이쪽을 주시하다가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신 사범의 경험이나 개미굴의 경험을 복기해보면 익숙한 패턴이다.
그렇다고 놈을 쫓아가서 잡거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호진은 후미 그룹에 재차 사인을 보냈다.
‘최대 속도로 이동.’
그 사인에 후미 그룹과 선두 그룹 모두 표정이 굳었다.
위험할 때만 쓰기로 한 사인이기 때문이다.
마트까지 남은 거리는 100m.
100m면 초등학생 고학년도 20초면 달릴 수 있다.
지금의 호진이라면 10초 안쪽도 가능할 듯싶다.
그렇기에 호진은 개활지에서 싸우지 않고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빠르게 간다.’
호진이 먼저 뛰고 뒤이어 박 순경과 대머리가 급히 뒤쫓았다.
그리고 그 뒤를 후미 그룹이 따라왔다.
그렇게 달리기를 잠시.
다행히 아무런 문제없이 쇼핑센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다들 급히 뛰느라 참았던 숨을 토해낼 때.
호진과 박 순경 그리고 신 사범만이 입구를 살폈다.
“이거 잠겼는데요?”
박 순경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자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닫았나 보네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예?”
그 대답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만 끔뻑이던 박 순경에게 호진은 살짝 웃어 보였다.
“따라오시죠.”
호진이 이곳 주차장에서 일한 지도 2년.
들어갈 방법이야 차고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