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생존자들 (1)
비가 얼굴을 적시며 피를 닦아 내렸다.
세차게 내리는 비와 차가운 공기에 정신은 다소 맑아지는 듯했지만, 등에 업은 용재의 숨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불안해진 호진은 걸음을 재촉했다.
─첨벙
서두르느라 고인 물웅덩이를 밟자 생각보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누군가의 시선.
뒤를 돌아보니 경찰 두 명이 호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턱을 벌리고 서 있었는데, 호진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경찰들은 호진의 옷에 묻은 피를 보더니 허겁지겁 총을 겨눴다.
“우, 움직이면 쏩니다.”
총부터 들이미는 것을 보니 이미 상황을 인지한 듯했다.
싸울 힘도 생각도 없던 호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뒤에 업은 용재가 쿨럭였다.
비 때문에 시야가 좁았던 걸까.
경찰들은 그제야 용재의 존재를 눈치챘다.
용재가 다쳤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천천히 총을 내리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먼저 다가온 것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경찰이었다.
“어떻게 된 거요?”
“괴물한테 당해서……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호진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그들은 시선을 교환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종합 병원이 있습니다. 저희가 안내하죠.”
“감사합니다.”
호진은 젊은 경찰에게 용재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흔들거리는 시야.
─쿵!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갑자기 바닥이 날아와 얼굴에 부딪혔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 당황한 경찰들이 자신의 뺨을 때리는 게 보였다.
“선생님.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이거 왜 이래?”
“김 경위님. 이 사람 온몸이 상처투성이입니다.”
“뭐야. 목이랑, 허벅지랑…… 얼레. 팔까지? 온몸이 걸레짝이네. 박 순경. 압박붕대랑 지혈제 가져와 봐. 도대체 어떻게 걸어 다닌 거야. 이봐요, 정신 차려요.”
“경위님 이러면…….”
‘아, 점점 흐려지네. 죽는 건가? 아니 근데 이 아저씨가, 왜 이렇게 뺨을 세게 때려.’
호진은 경찰을 욕하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깜박깜박 점멸하는 시야 속.
마치 필름이 끊기듯 장면들이 끊어 지나갔다.
얼굴을 두드리는 비. 자동차 시동음. 흔들리는 자동차.
누군가의 욕설 섞인 고함.
“따끔합니다.”
귓가에 맴도는 의사의 한마디.
그러나 따끔한 기억은 없다.
─지끈
대신 욱신거리는 두통에 호진은 힘겹게 눈을 떴다.
“망할 자식들. 그사이에 문을 걸어 잠가?”
“겁먹었나 보죠. 아니면 식량 때문에 그렇거나.”
“아니, 그럴 거면 우리가 구조작업 한다고 할 때 반대를 하든가.”
“사람 구하겠다는데, 반대하기에는 민망했겠죠.”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커튼 뒤로 아까 봤던 경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동네에 있을 법한 가정의학과.
주사 놓을 때 누울 법한 비좁은 침대.
그래도 환부에는 꼼꼼하게 붕대들이 감겨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욱신
“으윽…….”
저릿한 통증들이 골을 뒤흔들었다.
“깼나 봅니다.”
드르륵 커튼이 젖혀지더니 김 경위라 불리던 50대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진짜네? 어이 의사 양반. 주사실에 있는 남자 일어났소.”
“예…… 예? 벌써요? 이런 마취가 잘 안됐나.”
“거, 그러다 사람 하나 잡는 거 아닙니까?”
“아하하…… 이거 참. 배울 건 다 배웠습니다.”
곧이어 하얀 가운을 입은 40대로 보이는 남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괜찮으신가요?”
“예, 덕분에 괜찮은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호진은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려 하자 의사라 불린 남성이 급히 만류했다.
“아이고, 상처 다 터집니다. 가만히 계세요.”
담요 하나 두른 채 누워있자니 민망했지만,
의사의 말대로 통증이 꽤 있었기에 누워있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같이 온 애는……?”
호진이 힘겹게 묻자, 의사는 밝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같이 오신 친구분이라면, 옆에 진료실에서 자고 있습니다. 아, 저는 여기 의사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호진입니다.”
잠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호진은 질문을 이어 나갔다.
아직 궁금한 게 너무 많았기에.
“여기가 어디죠?”
마지막 기억에는 경찰들이 종합병원으로 간다고 했는데, 여긴 아무리 봐도 종합병원은 아니다.
호진의 질문에 김 경위라는 사람이 이를 뿌득 갈더니 대신 대답했다.
“종합병원 옆에 있는 가정의학과요. 아 글쎄, 잠깐 나온 사이 놈들이 문을 걸어 잠갔다니까?”
그 말을 보충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의사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걸 보고 제가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다친 분들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하하.”
의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습니까?”
“얼마 안 됐소. 지금이 오전 4시니까. 그쪽이 쓰러지고 한 6시간 정도 지났나.”
“자아. 얘기는 그만하고 쉬세요. 저희는 그만 나가죠.”
의사가 김 경위를 끌어내자, 김 경위는 호진에게 뭔가 궁금한 게 있는 듯 못내 아쉬워하다 밖으로 나갔다.
호진은 의사가 두고 간 생수 한 통을 들이마시고는 잠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상태창.”
─띠링
「상태창」
「이호진」
「나이: 24」
「레벨:7」
「근력:14 민첩:11 지구력:14」
「스킬: 사냥꾼의 눈 LV.1 검술 LV.5 거합 LV.1 투구 가르기 LV.1」
「직업: 없음」
「칭호: 없음」
「잔여 포인트: 3」
호진은 찬찬히 이번에 얻은 스킬들을 살폈다.
「스킬: 거합 LV.1(일반) : 위기의 순간 빠르게 검을 뽑는 속도는 생명과 직결됩니다.」
「칼집에서 검을 뽑는 속도 50% 증가.」
「카운터 성공 시 2배 대미지.」
나쁘지 않다.
거합은 이번에 실용성을 입증한 기술.
연마한다면 방심하는 상대에겐 더할 나위 없는 무기가 될 터다.
「스킬: 투구 가르기 LV.1(레어) : 베기를 극도로 연마하면 철조차 벨 수 있습니다.」
「상대의 방어력이 높을수록 대미지 최대 50%까지 증가.」
「방어구 파괴 확률 증가.」
이 또한 유용해 보였다.
적이 단단할수록 검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따로 둔기류를 들고 다닐 필요는 없겠네.’
남은 건 인벤토리에 받은 보상.
보상을 확인하려는 찰나 밖에서 웅성웅성 소란이 들려왔다.
“비키세요. 아저씨.”
“뭐 하자는 거야. 먹을 거라곤 이 사탕쪼가리밖에 없다며. 근데 시체 두 짝 데리고 온 것도 모자라서 또 나가겠다고?”
“방금 소리 못 들으셨어요? 애 목소리였습니다.”
“그럼 더더욱 안 되지. 환자들도 모자라 애까지? 여기가 탁아소야? 정신 차려, 이 짭새야.”
“……뭐요? 아니, 이 아저씨가.”
“참아. 박 순경.”
뭔가 익숙한 목소리다.
커튼을 살짝 들추자 번들거리는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맞네. 그 주차장 진상.’
주차장에서 호진을 툭툭 건드리던 중년남성이 박 순경이라 불리는 젊은 경찰과 서로 노려보고 있는 상황.
“혹시 시체라면 절 말하는 겁니까.”
호진이 커튼을 젖히며 밖으로 나왔다.
눈이 마주친 중년남성은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커흐흠…… 뭐야. 일어났었어? 그래, 구할 거면 이런 건장한 사람이나 구해오든가. 아무튼 구조대가 올 때까지 문은 못 열어.”
‘못 알아보네. 하긴.’
이런 사람들은 낮잡아 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호진은 그런 그를 무시한 채 박 순경에게 말했다.
“아이 목소리라고요?”
“네, 분명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갔다 오시죠.”
호진이 담담하게 말하자.
순간 주변에 정적이 일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중년의 남성.
“뭐? 그럼 여긴 누가 지켜? 저 비리비리한 의사? 아니면 침대에 누워있는 니 친구?”
흥분한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제가 지킵니다.”
호진의 대답에 한숨을 내쉰 남성이 붕대가 감긴 호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야 이 새끼야. 객기 부리지 말고 침대에 누워있어. 여기서 쫓아내 버리기 전에.”
꾸욱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붕대에서 가볍게 피가 배어났다.
“뭐 하시는…… 어?”
경찰들이 손을 뻗어 제지하려는 순간.
호진은 남성의 팔목을 잡아 가볍게 떼어냈다.
마치 먼지를 털어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문으로 걸어간 호진은 경찰 둘이 간신히 끌어다 막아놓은 캐비닛을 가볍게 옆으로 치웠다.
그 모습에 밀려난 남성도, 그를 말리려던 경찰들도 입만 벌리고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면 제가 갈까요?”
호진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물었고 그 질문에 중년 남성도, 경찰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저…… 희가 갔다 오겠습니다. 여기는 부탁드리죠.”
“……힘이 장사네, 하하. 아까는 장난 좀 친 거야. 알지, 젊은 선생?”
중년남성은 잡혔던 손목을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선생님이라 불리기 쉽네.’
호진은 피식 웃으며 붕대 위로 자신의 옷과 코트를 챙겨 입고 검을 챙겨 문 앞에 앉았다.
“더 쉬셔야 하는데…….”
의사가 옆에서 쩔쩔맸지만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경찰분들 오시면 쉬겠습니다.”
저 중년남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용재를 위해서라도 경계는 필요했다.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시죠.”
김 경위와 박 순경이 모두 떠나자 병원에는 적막이 흘렀다.
“겨우 조용해졌네.”
조용하게 중얼거린 호진은 속으로 인벤토리를 불러냈다.
순간 일렁이는 타원형의 어둠이 허공에 생겨났다.
마치 크기를 줄여놓은 게이트 같은 모습.
그것을 잠시 지켜보자,
「인벤토리」
「사용 가능한 용량: 3kg/100kg」
「릴리온 성국의 대검 x1」
푸른 창이 인벤토리 항목과 정보를 나열했다.
호진이 병원에 있던 인형 하나를 집어넣자 용량이 오르고 항목에 인형이 추가됐다.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의 손을 집어넣고 인형을 떠올리자 손에 인형이 쥐어졌다.
‘이거 편리한데?’
인형을 밖으로 끄집어낸 호진은 보상인 듯 보이는 검을 꺼내 들었다.
「릴리온 성국의 대검」
「종류: 그레이트 소드」
「정보: 여명의 여신 릴리온의 창이라 불리는 기사단의 검입니다.」
보상치고는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긴 롱소드.
물론 다른 롱소드와 비교하면 길고 무겁지만 특별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예쁘다.”
호지은 칼집을 쥐고 손잡이에 힘을 줬다.
─스르릉
손잡이는 진한 고동색, 폼멜에는 깔끔한 원형의 추가 달려 있다.
곧게 뻗은 가드는 은색으로 반짝이고, 시리도록 예리한 날에 부딪힌 빛은 부서져 산산이 흩어졌다.
이걸 보고 그 누가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호진이 검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계단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텅
─뚜벅 뚜벅
여러 명의 발소리.
호진은 벌떡 일어나 검에 힘을 줬다.
그때 계단에서 작게 속삭이듯 울리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
“……호진 씨? 저희 왔습니다.”
박 순경이다.
호진은 검에서 힘을 뺐다.
잠시 뒤 박 순경이 나타나 볼을 긁적이며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아니, 바로 밖에 있더라고요. 안 나가 봤으면 후회할 뻔했네요.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순경님이랑 경위님이 구해줬는데, 제가 감사하죠.”
호진의 너스레에 박 순경이 기분 좋게 웃고 있자 김 경위와 두 아이가 뒤따라 들어왔다.
근데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이…….
“검도복?”
호진이 문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도 자신을 알아봤는지 눈이 커다래졌으나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사범님?”
검도장에서 사라졌던 신 사범과 아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