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비일상 (4)
‘음……?’
뭔가 이상했다.
말은 멋들어지게 했지만, 사실 놈들이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잠시도 버티지 못할 터.
그러나 놈들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때 칠흑색 개미가 앞으로 나서자 다른 개미들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일제히 부딪치는 놈들의 턱.
─차칵 차카칵 차칵 차카칵
그건 명백한 응원이었다.
턱을 맞대는 행위는 마치 일기토를 기다리는 병사들의 군무를 연상케 했다.
훈련이라도 한 듯 일제히 부딪치는 턱들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끼리리리이이이익!”
큰 개미가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를 지르자, 일순 터널은 정적에 잠겼다.
녀석은 칼집 안에 든 호진의 검을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마치 뽑을 시간을 주겠다는 것처럼.
‘나야 고맙지.’
옅게 웃음을 흘린 호진은 곧장 스탯 창을 활성화했다.
레벨이 3번 오르며, 스탯을 올려줄 수 있는 잔여 포인트라는 게 총 9개가 쌓였다.
‘게임도 아니고 포인트라니…… 그래도 지금 상황으로 봐선 분명 실현이 되겠지.’
여태 활성화할 필요를 못 느꼈지만, 지금은 다르다.
본래의 실력만으로는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음이 자명했다.
호진은 검에 손을 얹으며 재빠르게 포인트를 각 스탯에 분배했다.
‘우선은 민첩에 3, 근력에 3을 분배.’
그러자 검을 든 손이 확연하게 가벼워지고 시야가 밝게 트였다.
아직 3포인트가 남았지만, 놈과 붙어보면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터.
호진은 상황이 급하기에 더더욱 신중하기로 했다.
─딱딱
다행히 놈은 아까와 같은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만일까, 자비일까 그것도 아니면 명예일까.
순간, 한 가지 기술이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저런 놈을 상대로는 통할지도 모르겠다.
“이걸 써볼지는 몰랐는데. 하긴. 다른 검술들도 쓰려고 배운 건 아니지.”
호진은 작게 뇌까리며 칼집과 검을 움켜쥐었다.
제정거합(制定居合) 오본목.
가사베기(케사기리).
승려의 초승달처럼 휜 법의(가사)처럼 사선으로 그어 내리는 내려베기를 변형한 발도술.
발도술의 특성상 위력 자체가 대단하진 않지만, 예상치 못한 치명상을 가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호진은 외발에 힘을 주고 오른발 끝을 비비적거리며 천천히 몸을 밀어 넣었다.
그 모습에 놈은 호진이 왜 검을 뽑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가는 듯 턱을 딱딱 부딪쳤다.
‘조금만 더.’
놈의 재촉하는 듯한 제스처에 조급해진 호진은 눈에 띄게 앞으로 나아갔다.
순간, 놀란 녀석이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턱을 내밀었다.
‘지금이다.’
호진은 빠르게 왼발을 내디뎌 거리를 확보하고 오른발에 체중을 실어 내밂과 동시에, 움켜쥔 검을 뽑아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그러곤 오른발이 땅에 닿고 검이 천장을 향하자 날을 꺾어 호를 그리며 베어 내렸다.
오직 멋과 장난으로 익혔던 기술.
거합(居合).
그것이 검술이라는 스킬의 보조를 받아 썩 만족스러운 결과를 자아냈다.
“─키에에에에엑!”
녀석의 턱 아래, 덜렁거리는 껍질 사이로 피가 쏟아졌다.
왼쪽 겹눈도 완전히 시야를 잃었는지 반으로 쪼개진 동공으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띠링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치명타에 성공합니다. 스킬 숙련도가 오릅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검술 LV3 → 검술 LV4」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거합 LV1」
‘뭐?’
단순히, 대미지를 준 걸로 스킬이 생기고 숙련도가 오르다니.
아무래도 스킬 숙련도는 검술의 동작을 정확하게 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거합 스킬은 더 못쓰겠지.’
아무리 스킬이라도 거합은 거합.
한번 기습을 한 상대에게는 의미는 없다.
‘남은 건 검술, 사냥꾼의 눈, 잔여 스탯 정도.’
눈앞을 가득 메운 개미들을 보면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뭔가 할 만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희미한 희망의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
“─키리리리리릭.”
투명한 체액을 흩뿌리던 녀석은 잔뜩 흥분한 기세로 거침없이 거리를 좁혔다.
몸처럼 칠흑색인 날카로운 두 턱은 마치 기사의 창처럼 호진을 향해 찔러왔다.
간신히 몸을 젖히며 턱을 쳐올려 궤를 비틀어보지만, 겨우 피하는 수준일 뿐 공격의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어느새 놈과 가까워진 거리.
놈의 턱만 신경 쓰고 있는 와중 묵직한 충격과 함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큽…… 뭐?”
뭐에 맞은 걸까.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가슴팍의 호구에 길게 스크래치가 파여 있었다.
아쉬운 듯 앞발을 까딱이는 녀석.
갈고리같이 날카로운 앞발로 자신을 후려친 듯했다.
호구가 아니었다면 내장을 흘리며 죽었겠지.
놈의 공격을 흘리거나 코등이싸움을 하는 것은 포기다.
애초에 상대는 인간도 아니기에, 검도에서 익힌 대련 기술은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거리를 벌리면 창 같은 턱으로 돌진하고 가까이 간다면 놈의 앞발에 치일 터.
마치 창과 도끼를 동시에 상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호진이 난색을 표하는 사이, 찌르듯이 들어왔다가 좁혀지는 놈의 턱.
마치 커다란 조경용 가위 같다.
‘잘리는 건 가지가 아닌 내 머리겠지만.’
저 단단해 보이는 턱 사이에 잘못 낀다면 검조차 무사하지 못할 듯했기에, 호진은 공격 한 번 못 해보고 점점 뒤로 밀려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공격을 막아내며 물러나던 호진은 바닥에 그어진 선을 밟았다.
“이건…….”
용재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싸움이 길어져 체력이 빠진 채 이겨봤자 그 뒤에는 무수한 개미 떼에게 죽겠지.’
호진은 방어가 아닌 공세만이 이 싸움을 끝낼 방법임을 직감했다.
‘근력에 3.’
순간 온몸에 저릿한 기운이 깃들었다.
“머리!”
별안간 호진은 배에서 끌어 올린 소리를 내질렀다.
뒤에선 개미들조차 움찔한 정도의 기합.
대련처럼 타격 부위를 외친 호진은 올곧게 검을 휘둘렀다.
어떠한 기예도 담기지 않은 검.
그저 빠르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단순한 동작.
그러나 검도를 시작한 이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수십, 수백 번을 휘둘렀던 동작이다.
그래서일까.
스스로 생각해도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만한 깔끔한 궤도를 그린 검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어떤 동작보다 빠르고 강렬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검은 놈의 턱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빠르고 정확했지만 너무 단순했기 때문이다.
놈은 턱으로 막은 검을 밀어 올리며 그대로 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호진은 개미의 턱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내려쳤다.
“머리!”
전진해오던 개미는 다시 급하게 고개를 흔들어 검을 막아냈다.
만약 그대로 찔러 들어왔다면 호진이 먼저 급소를 찔렸겠지만, 개미 또한 머리가 으스러졌을 터.
“머리, 머리, 머리!”
호진은 멈추지 않았다. 타격대를 치듯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온 힘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피하는 것만으로 빈틈을 내어주기에, 전력을 담은 내려치기는 격검에서 금기시되는 공격이다.
하지만 동굴은 칠흑의 개미가 좌우로 피할 만큼 넓지 않았고,
놈은 종의 특성 탓인지 뒤로 몸을 빼는 동작만은 느릿했다.
그렇기에, 호진은 평생 해온 검도와는 정반대되는 검을 휘둘렀다.
녀석은 열심히 막았지만 점차 턱의 이음새에서 체액이 흐르고, 머리에 자상이 나더니 턱을 당겨 넣기 시작했다.
위축, 공포, 두려움.
지금 놈에게 깃든 감정이 눈에 밟히는 듯하다.
놈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는 동귀어진할 뻔했던 아까 전의 공격뿐이었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기세에서 밀린 개미는 점차 둔해졌고 결국 싸움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호진은 그런 개미에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죽음을 선고했다.
“머리.”
깔끔하게 떨어진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검술 LV4 → 검술 LV5」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투구 가르기 LV1」
일순 개미들의 동작이 고장 난 듯 멈춰 섰다.
마치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턱 하나, 더듬이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정적 끝에 먼저 소리를 낸 건 호진 쪽이었다.
“……가도 되는 건가?”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미들에게 들리게 말했다.
뭐 일기토 같은 경우에 승리한 적장을 보내주기도 하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개미들이 호진의 말에 화답해줬다.
……화난 듯 턱을 부딪치며 다가온다는 게 문제였지만.
“젠장…….”
***
몇 마리를 몇 분이나 베어 넘긴 걸까.
중간에 한 차례 레벨 업이 없었다면, 호진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레벨 업으로 얻은 스탯을 모두 지구력에 투자해가며, 그저 버티었다.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미처 쳐내지 못한 놈들의 턱이 몸의 이곳저곳을 찢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입안에는 끈적하고 비릿한 쇠맛이 가득했지만, 호진은 멈추지 않고 그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다시 몇 분이 흘렀을까.
아니 몇 시간이 지난 것일지도 몰랐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호진은 귓가에 울리는 전자음에, 언제부터 감았는지 모르겠을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직 전투 중임을 깨달은 호진은 검을 들어 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주변에 더 이상 살아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띠링
「A─3섹터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인벤토리’가 생성됩니다.」
「E급 던전 ‘노예개미 굴’을 클리어했습니다.」
「혼자서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이 가산됩니다.」
「매우 어려움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가산됩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뭐가 잔뜩 뜨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끝났다는 것 같다.
호진은 비틀거리며 벽에 등을 기대고 거칠게 숨을 쉬었다.
한참 전부터 고갈된 산소를 갈구하듯 온몸이 저리고 떨렸으며,
눈앞은 노랗다 못해 수시로 블랙아웃이 일어났다,
“이게 바로 정글 차이지.”
아까부터 속에 담아뒀던 말을 중얼거린 호진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다행히 용재는 잘 빠져나간 듯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쉬다 가고 싶었지만, 언제 문이 닫힐지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 쉴 수는 없었다.
나간 용재가 걱정되기도 하고.
호진은 침침한 눈 대신 벽의 촉감을 의지해 밖을 향했다.
아까 분명 입구가 보였었는데, 조금만 가면 되는 거리였는데.
좀처럼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고 또 걷던 와중 돌연 공기가 달라졌다.
축축하고 습한 샤워실의 습기.
그 습한 공기가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샤워실 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자 손끝에 미적지근한 뭔가가 닿았다.
흐린 눈을 비비며 바라보자 눈앞에 용재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있었다.
“하, 쉬지를 못하겠네.”
칼집을 짚고 일어선 호진은 용재를 둘러업고 샤워실 밖으로 향했다.
검도장에 들어섰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텅 빈 관장실.
‘사람들은…… 없네.’
멈칫거린 것도 잠시, 호진은 희미한 시야에 의존해 밖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물방울이 뺨에 내려앉았다.
─투두두둑 쏴아아아아
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