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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트랑
독일 B사 마크가 정중앙에 떡 박힌 하얀 세단이 강원도 원주에 도착했다.
도시 주변에 평야지대를 낀 다른 지역과 달리 산세가 험한 강원도에는 미발견된 게이트들이 존재했다.
그런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이 산 속에 존재했고, 몬스터들을 필드에서 사냥하기 위한 헌터들이 모여들었다.
길드에 소속되어 정해진 게이트에 들어가야만 성장할 수 있는 곳과 달리 필드의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이곳은 루키들의 성지였다.
헌터가 되고 싶은 자는 강원도로 가라.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곳곳을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을 조우할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헌터옥션의 수수료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자체적인 시장마저 형성해 물물교환을 비롯한 여러 거래가 이루어졌다.
여러 악재로 인해 관광객을 잃어버렸던 강원도가 활력을 되찾으면서 다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효과를 누렸다.
경제적인 특수를 맛 본 지역 정치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줬고 전국에서 가장 프리헌터들이 활발한 곳이 되었다.
“오크 족장의 방패 사세요-!”
“네가 판 검이 쓴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깨져버렸다고! 나한테 사기를 쳐?”
“꺼져. 어디서 약을 팔아?!”
각종 호객행위와 헌터들간의 드잡이가 일어나는 원주헌터시장에 한진원이 도착했다.
깃발을 든 단체 관광객들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평화로운 모습에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팔자 좋네.”
속이 타들어가던 그는 시장의 정중앙을 지나 점점 인적이 드문 외진 골목길로 들어갔다.
약속된 장소에 다가갈수록 길거리에는 관광객대신 눈빛이 살벌한 헌터들이 낯선 이를 향해 불순한 눈빛을 날렸다.
어찌보면 헌터라기보단 빌런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헌터가 아닌 한진원은 뻣뻣했던 고개를 푹 숙이며 빠른 걸음으로 헌터들을 지나쳤다.
“어이~”
“예?”
무사히 골목길을 지나가나 했는데 눈에 기다란 상처를 입은 대머리의 헌터가 그를 불렀다.
주변의 헌터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인 양 킬킬댔다.
“보아하니 헌터도 아닌데 이런 누추한 곳에 왜 왔소?”
“제가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그래! 맞아. 만나기로 했지. 그게 바로 나야.”
“...네?”
“나랑 만나기로 했잖아.”
“그게 무슨...”
황당해하는 한진원의 앞에 바짝 다가선 헌터가 눈을 부라렸다.
“나.하.고. 만.나.기.로. 했.잖.아.”
고압적인 말투로 위협한 그가 한진원의 한쪽 어깨를 꽉 붙잡고는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나에게 돈 주기로 한 거 기억 안나? 기억나게 해줘?”
같잖은 협박이었다.
거기에 주변을 둘러싼 험상궂은 헌터들의 태도가 한진원의 억누르던 자존심에 불을 질렀다.
저자세였던 그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오오오~ 영감쟁이 소리도 지를 줄 아네? 낄낄낄.”
“나 NS 그룹 이사야! 신성길드도 우리가 지원한다고!”
“진짜요? 이사?”
대머리 헌터가 잠시 멈칫하며 주변 헌터들의 눈치를 보았다.
다른 헌터들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신성길드를 팔고는 의기양양해진 한진원 이사가 다시 한 번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퍽.
“으윽.”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한진원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렇게 말하면 쫄 줄 알았냐? 푸하하하.”
“푸하하하하. 노인네 팔팔하네? 푸하하하. 신성 길드 당장 데려와 봐. 들고 있는 아이템 좀 빼앗아보자.”
그제서야 한진원은 자신이 놀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도권 밖은 그의 입김이 전혀 닿지 않는 곳이었다.
하다못해 수행원들이라도 대동했으면 모르겠지만 홀로 온 탓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영감탱이. 지갑 좀 꺼내봐. 이사라면 돈 많겠네. 혹시 아공간 아이템도 있나?”
“빨리 하고 묻어버리자.”
꼼짝없이 죽기 직전이었다.
“그마안-!”
골목어귀 끝에 금발의 사내가 나타났다.
푸른 눈과 붉은 눈의 오드 아이를 가진 사내의 등장에 한진원을 둘러싼 헌터들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비...비에트랑. 나는 단지...”
대머리 헌터마저 식은땀을 흘리며 한진원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내 손님한테 함부로 하다니, 너! 손목을 자르고 간다면 봐주마.”
“비... 비에트랑... 정말 미안...”
“3. 2. 1.”
“싯팔.”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세는 그의 모습에 대머리 헌터가 한진원을 비에트랑쪽으로 밀고는 뒤돌아 도망쳤다.
“0. 땡.”
스팟.
“크아아악.”
저 멀리 있던 비에트랑이 어느새 대머리 헌터의 옆에 나타나 한 팔을 잘라버렸다.
기괴하게 휘어진 곡도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어깨에서 피분수를 내뿜으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헌터가 길에 털썩 쓰러졌다.
“목을 자르려다 참았다. 이 새끼 데려가.”
비에트랑의 말에 주변의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대머리헌터를 급히 부축해 데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얼떨떨한 한진원은 두려움을 감추려 눈을 감았다.
초장부터 비에트랑에게 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그가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 다가온 비에트랑에게 놀라 숨을 들이켰다.
“헛!”
“놀라지 마시고, 그런데 메로나는?”
또다시 장난스러운 말에 긴장했던 한진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장난은 그만하게. 내 아들은 어디 있지?”
“하하하. 이쪽으로 오시죠.”
피에트랑은 복잡한 골목을 누비며 한진원을 더욱 깊숙한 곳으로 데려갔다.
나중에는 몬스터로 인해 무너진 폐건물들이 밀집된 곳에 도착하자 가슴 한 켠에 불안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서라도 한진원은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한때는 초등학교로 보였던 부지의 운동장에 텐트를 쳐놓고 한가롭게 야영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는 자들 중 평범해 보이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피에트랑이 다가가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얼핏 보아도 열 명은 넘어가는 인원들 사이에 한승훈은 보이지 않았다.
“내 아들은 어디에 있소?”
“아들?”
피에트랑이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다 삐쩍 마른 한 사내를 지목했다.
“야! 너!”
“넵.”
“네가 아들 해라.”
“넵.”
황당한 소리에 한진원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왜? 너무 큰 애는 별로야? 다른 애로 바꿔줄까?”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퍽.
비에트랑이 곡도를 땅에 거칠게 박았다.
유려하게 휘어진 곡도의 표면으로 한진원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비쳤다.
“상납액수를 2배로 올려.”
“뭐라고?”
“안 그러면 너는 여기서 죽어.”
장난기가 사라진 비에트랑의 눈매에 살기가 돋았다.
미남자의 표본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흉신악살로 변했다.
“그동안 우리가 준 아이템 덕분에 잘됐으면 제대로 갚아야지. 은혜는 더블로 갚으라는 말 몰라?”
“......베로니카를 불러줘.”
“뭐야. 아직도 몰랐어? 걘 이미 죽었어.”
“?!”
“그녀가 죽은 이유는 네가 정보를 넘겼기 때문이라고 우리 조직에서 의심하고 있거든.”
그의 말에 억울한 한진원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난 그런 적 없어!”
“그러니 네가 정보를 흘린 적이 없음을 증명하라고. 돈으로. 이것도 깎아준 거야~ 베로니카뿐만 아니라 한 명 더 실종됐단 말이지.”
한진원이 주변을 둘러보자 비에트랑의 부하들의 손에 온통 무기가 들려있었다.
그의 무기와 비슷하게 생긴 곡도를 들고 있는 그들의 눈에 담긴 감정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무심한 저자들에게 자신은 그저 도살장에 도축되는 한낱 가축에 불과했다.
“생각할 시간을 줘.”
“3초 준다. 3. 2. 1.”
비에트랑의 펴진 손가락이 순식간에 3개가 접혀들었다.
그러나 쉽사리 한진원이 대답하지 못했고, 비에트랑의 눈가에 살기가 짙어졌을 때였다.
저벅. 저벅. 저벅.
초등학교의 정문에서 붉은 망토를 두른 수혁이 검을 들고 나타났다.
마지막 손가락을 접기 직전이었던 비에트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야. 정보를 흘린 거 맞았잖아? 슈퍼맨이라도 데려왔어?”
“난 모르는...”
서걱.
한진원의 목에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곧 머리통이 땅으로 떨어졌다.
여전히 억울한 표정의 그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배신자에게 너무 편한 죽음을 선사했군.”
“그는 배신자가 아니야. 내가 몰래 따라왔거든.”
수혁이 그의 말을 정정해주자 비에트랑이 침을 한진원의 머리통을 향해 뱉었다.
“꼬리가 잡힌 순간부터 배신자다. 죽이지 말고 팔, 다리만 잘라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비에트랑이 몸을 돌렸다.
마치 수혁이 부하들에게 당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듯.
그러나 그의 신형이 사라지면서 나타난 것은 수혁의 뒤였다.
“페이크다!”
챙.
“어라?”
사선으로 올려 벤 곡도가 수혁의 검에 막혔다.
심지어 수혁은 뒤도 쳐다보지 않았다.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지은 비에트랑이 다시 부하들 뒤편에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지?”
비에트랑의 주특기인 블링크의 유명세는 전생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적의 공격수단을 잘 아는 만큼 대비하는 법은 쉬웠다.
단지, 계속해서 비셔스의 정보를 캐내기 전 빌런들이 죽어나갔기에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비에트랑을 어떻게 살려놓고 정보를 캐낼까 뿐이었다.
이 정도 공격에는 안 죽겠지?
당혹스러운 그의 말을 무시한 수혁이 뒤로 길게 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이것 역시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준 공격이었다.
“모두 엎드려!”
비에트랑의 외침에 늦게 반응한 부하들의 절반이 반월형 붉은 검기에 모두 토막나버렸다.
“이런 미친!”
어마무시한 위력에 놀란 건 비에트랑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들 역시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눈짓을 날렸다.
‘진짜로 공격?’
“빨리 쳐! 못 죽이면 우리가 다 죽어!”
미국이나 남아공에서조차 이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쿠데타를 실패한 이유도 미국의 헌터들이 지원을 왔기 때문이었지 순수한 남아공 헌터들만으로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남아공에서부터 그와 동거동락한 소중한 부하들이기에 비에트랑의 마음속이 분노로 가득 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혁에게 도륙당하는 부하들을 본 그는 태세전환을 빨리했다.
‘최소한 슈페리얼, S급이다.’
슈페리얼 등급을 앞둔 비에트랑은 아직 챔피언 등급에 불과했다.
급이 안 맞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품에서 비상용 위성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다급하게 도망치며 전화기의 버튼을 눌러 귀에 갖다 댄 순간이었다.
콰직.
귓불을 슬쩍 스친 장미문양의 단검하나가 위성전화기에 꽂혀있었다.
“뻐킹!”
전화기만 남겨놓고 블링크를 쓴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력을 잔뜩 끌어 모은 블링크는 그가 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귓불에 스친 피의 잔향이 공중을 떠도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어디서 그런 괴물 같은 자식이 나타났지? 베로니카와 료마가 저 자식에게 죽은 게 확실하군.”
강원도의 산 속 깊숙한 곳으로 숨어든 그는 자신의 귀에서 계속 통증이 뺨으로 옮아가는 것을 느꼈다.
수혁 때문에 자신의 짐을 모두 운동장에 놔두고 온 그는 해독포션조차 없었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곡도를 귀에 바싹 붙여 자르자 멀건 피가 뺨을 타고 흘렀다.
억지로 독기를 빼내기 위해 자신의 뺨을 짓누르며 피를 계속 뽑아냈다.
“크으으윽. 빌어먹을 자식. 이 피에 대가는 꼭 치루게 해주마.”
“어떻게?”
어느새 그의 뒤편에 나타난 수혁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비에트랑의 미간이 구겨졌다.
“왓 더 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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