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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을 찾아라(2)
“그거 알아? 우리 아버지는 너무 일이 바쁘신지 나하고 단 한 번도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어. 그랬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주신 물건이라 내가 과감하게 마셔봤지. 아버지의 기대를 채우는 게 힘들었거든... 기껏 신성길드에 넣어놨는데 실력이 형편없었으니까.”
칠흑 같은 어둠을 만들던 구름이 비켜서자 환한 달빛이 야산 한 구석을 비추었다.
나무에 몸을 기대앉은 한승훈이 바닥에 누워있는 비쩍 마른 미라에게 중얼거렸다.
“와~ 그런데 약물의 효과가 너무 좋은 거 있지? 솔직히 3팀이 다 덤벼도 내가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큭큭큭. 한번 다 줘패볼까하다가 겨우 참았어~ 내가 봐줬단 말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미라의 머리를 잡아 위아래로 흔들던 한승훈이 말을 이었다.
“역시 너도 동의할 줄 알았어. 하아... 네 덕분에 당분간은 갈증이 없겠지? 고맙고 왜 하필 나의 눈에 띠었는지는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대신 다음 생에 만나면 그때는 내가 잘해줄게.”
말을 마친 그가 미리 파놓은 땅으로 미라를 굴려 떨어트렸다.
옆에 쌓인 흙을 삽으로 순식간에 매워버린 그는 이마를 쓱 훔쳤다.
땀 한 방울 나지 않았지만 식은땀이 맺힌 기분이었다.
“이 짓도 슬슬 익숙해지네.”
그가 자리를 떠나고 땅을 갈아엎은 흔적만 미묘하게 남았다.
한승훈은 다음 날 신성길드로 출근했다.
게이트에서의 전투를 복기하고 팀별로 전술을 맞추는 훈련을 하기 위함이었다.
내심 본인의 활약이 소문나기를 기대했던 그는 곧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들 온통 블러드 길드 얘기만 하느라 자신은 언급조차 되지 못했다.
“아- 저 블러드 길드 그 자식들이 우리 게이트에 먼저 들어가서 1팀이 죄다 붕 떴대!”
“와... 그 자식들 백호랑 연합하니 어쩌니 말이 나오더니 일부러 우리 길드를 노린 거 아냐?”
“개자식들! 걔네랑 길드전을 해서 코를 납작하게 눌러줘야돼!”
“크큭. 네가 싸울 거냐? 솔저 등급 주제에?”
“싸움은 등급으로 하는 게 아니야.”
입을 터는 동료를 본 한승훈이 속으로 비웃었다.
‘으이그... 입만 살았네.’
신성길드에 충성하는 루키들은 계속해서 블러드 길드를 향해 이를 갈았다.
‘블러드 길드? 내가 한 번 싸워줘서 꺾어주면 1팀에 들어갈 수 있으려나? 아~ 기회가 한 번 오면 좋겠는데...’
한승훈은 주인공을 빼앗긴 게 아쉬워 신경질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부-웅.
거력이 담긴 도가 애꿎은 허공만 찢었다.
***
자주빛 챔피언 등급의 게이트를 깨고 나온 블러드 길드원들의 표정에 여유가 넘쳤다.
“아~ 이제 내 수준에는 슈페리얼인데~ 일명 S등급!”
“참 나... 너 혼자 더 뛰고 오던지?”
“빨리 오빠 레벨 따라잡아야지?”
“우씨.”
홍영기가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박이현을 놀리자 그녀가 주먹을 위로 올리며 때리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의 푸닥거리에 익숙해진 길드원들은 귀엽게 쳐다볼 뿐이었다.
자신의 스마트폰을 확인하던 수혁은 길드원들을 불러모았다.
“당분간은 훈련에 매진하자. 체력이 그렇게 남아도니 훈련장에서 내가 없을 때를 가정한 포메이션 B 대형을 좀 더 숙달시켜.”
“에이... 길드장님 없이 되나요.”
“그러니까 하라는 말이지! 저번 게이트에서 내가 없다고 서로 싸우고 난리난 일을 벌써 까먹었나보지? 포메이션 B가 숙달되야 길드원들이 한두 명씩 빠졌을 때를 대비한 포메이션 C, D로 넘어가지.”
“...”
수혁의 호통에 홍영기가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 수혁이 김예현과 실종되었을 당시 길드원들을 고생하게 만든 장본인이었기에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잠시 할 일이 있으니 다들 나 없다고 뺀질대지마.”
“협회의 의뢰인가요?”
“뭐... 비슷한 거야.”
수혁이 협회의 부탁에 따라 빌런을 잡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길드원들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 길드장님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저도 길드장님 도우면 참 좋을 텐데요.”
“...저도요.”
“일단은 만렙을 찍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결국 나중에는 날 도와야 할 일이 생길테니 지금은 훈련에 매진해.”
먼 훗날 탑에 오르기 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자 과제인 빌런 대청소가 있다.
실력자들이 탑에 들어가는 사이 빌런들이 활개치는 걸 막기 위한 셈이다.
그때가 되면 다들 돕기 싫어도 수혁을 도와 빌런들을 사냥해야 한다.
그리고 겸사겸사 빌런 잡아먹는 모습은 좀 보여주기 그렇고.
***
또다시 선데이와 한강변의 굴다리 밑에 들어간 수혁이 궁금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맨날 이 굴다리 밑으로 오는 거야?”
“혹시 모를 위성의 촬영을 피하기 위해섭니다.”
“어차피 미국의 정보요원인 네가 다 컨트롤 할 수 있는 문제 아니야? 먼데이도 본토에서 정보를 다 걸러낼 텐데.”
수혁의 질문에 선데이의 두 눈이 창밖을 살피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아 얘기를 못 드렸지만 먼데이에 따르면 저희 정보국 내부에 비셔스의 간자들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조금의 위험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래. 알았으니 인상 좀 펴.”
“전 원래 이런 얼굴입니다만?”
“...처음엔 그러지 않았어. 너희를 권속으로 삼은 날 원망하나? 내 앞에서 거짓은 얘기할 수 없겠지.”
수혁의 질문에 선데이의 입이 살짝 다물어졌다.
거짓은 하지 못할지언정 말을 늦게 할 수는 있었다.
잠깐의 침묵 이후 선데이가 수혁과 눈을 맞췄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지배당한다는 사실에 원망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마스터께서 얼마나 빌런을 사냥하고 헌터의 경찰 역할에 충실한지 잘 압니다. 그 진실된 마음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한, 저는 언제나 마스터의 충실한 부하입니다.”
“... 고맙군. 나의 영향력 때문에 너희가 꼭두각시처럼 행동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다행이네.”
“저 뿐만 아니라 먼데이와 Mr. 토마스까지 진정한 마음으로 우러나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귀와 볼이 붉어진 선데이가 수혁에게 서류봉투를 넘겼다.
봉투 속에는 신성 길드에서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헌터들의 신상이 적혀있었다.
제일 첫 페이지에는 짧은 스포츠 머리에 각진 얼굴을 한 30대의 남성이었다.
“첫째는 최근 1팀에 들어간 강우혁입니다. 헌터옥션에서 출처불명의 돈으로 귀갑병의 대검이란 고급 아이템을 사서 후보에 넣었습니다.”
“계좌로 흘러들어온 돈이 아닌가.”
“네. 직접 현물을 얻어온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부피가 적은 마석이 담긴 아공간 아이템을 이용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좋아. 그 다음은?”
서류를 한 페이지 넘기자 이번엔 팔뚝과 목에 문신이 가득한 젊은 여성이었다.
뇌쇄적인인 외모에 두툼한 입술에는 색기가 넘쳤다.
“그 다음은 현재 2팀에서 마법계열헌터로 활약하는 김세연입니다. 그녀 역시 헌터옥션에서 고급 냉기마법서를 주문해 조만간 1팀으로 승급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현물인가?”
“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물결이 햇빛에 반짝이는 평화로운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하긴, 내통하는 헌터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지. 좋아. 다음은?”
“마지막으로 3팀에서 실력이 급성장했다는 한승훈입니다. 이자의 아버지는 NS 그룹의 한진원 이사로 3팀에 낙하산으로 꽂아주었답니다. 맨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실력이 형편없었다지만, 최근 게이트에서 큰 활약을 보였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세 사람에 관한 정보를 외운 수혁이 마지막 서류를 꺼냈다.
서울의 지도가 표시된 서류 곳곳에 붉은 동그라미가 쳐있었다.
“최근 실종신고가 급증한 곳입니다. 연희동과 신촌동, 홍제동 쪽에서 밤에 외출한 인원들이 실종된 사례가 급증했습니다. 현재 이 지역과 가장 가깝게 사는 사람은 강우혁이고, 제일 먼 자는 한승훈입니다.”
“좋아. 이들이 언제 NS 그룹의 내통자들과 연락할지 모르니 24시간 먹는 것, 입는 것, 똥 싸는 것까지 모두 감시해. 그 외에 내가 직접적으로 접촉해 확인해보지.”
“알겠습니다.”
세 사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빌런은 이 안에 있다.
***
꼴깍. 꼴깍. 꼴깍.
“캬아아아-”
500cc의 맥주를 한 입에 털어 넣은 강우혁의 앞에 각각 2팀과 3팀의 멤버이자 친한 동생들이 자리했다.
방금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온 강우혁이 달려온 곳은 치킨집이었다.
갓 튀긴 치킨에 시원한 맥주가 그간의 피로를 잊게 만들었다.
더불어 동생들의 선망어린 시선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건 덤이었다.
“우혁 형님. 대단하세요. 저도 언젠간 1팀에 갈 수 있겠죠?”
“그래. 당연하지. 너희들 내가 이끌어 준다! 조그만 기다려. 이번에 산 대검으로 내가 크게 활약해서 길드장님도 나한테 쩔쩔 맨다니까?”
“이야~ 역시 형님. 쩔어요. 난 이제 3팀에 불과한대...”
“힘 내 임마! 형이 쓰읍... 아...나... 이거를 얘기해 줘야 되나? 아... 손해가 심한데...”
그의 표정을 본 동생이 곧바로 종업원을 불렀다.
“맥주 추가요.”
“역시 울 지혁이가 내 맘을 잘 아네?”
“헤헤.”
한 번 더 맥주를 들이킨 강우혁이 두 사람의 머리를 테이블 중앙으로 끌어모았다.
대단한 비밀인 양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그가 조심스럽게 소곤거렸다.
“너희들 아공간 아이템은 있어?”
“아뇨... 그게 얼마나 비싼데.”
“그럼 지금부터 헛돈 쓰지 말고 무조건 아공간 템 사. 무조건이야. 그 다음에 게이트에 들어가서 몬스터들 잡고 나온 부산물들 어떻게든 아공간에 쑤셔넣어. 몰래.”
그의 말을 들은 김지혁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보였다.
“잡템을 왜...”
주변을 쓱 훑으며 입을 모은 강우혁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몬스터의 손톱이든 껍질이든 하다못해 거시기(?)든 다 모아. 지금 몬스터들 먹으면 정력에 좋다는 소문 들었지? 닥치는 대로 다 사주는 사람들이 있어. 거기다가 팔면 돈이 굉장히 짭짤해. 그 다음에 옥션에서 좋은 아이템을 사란 말이야. 알았어?”
“으엑... 찝찝한데 그걸 사먹는단 말이에요?”
“그건 모르겠고, 어떻게든 돈을 끌어 모아야 좋은 아이템을 사지. 너희 언제까지 각 팀에서 막내만 할 거야? 빨리 1팀으로 와서 날 보좌하라고. 그러라고 내가 정보 주는 거야.”
대단한 이야기를 한 양 침을 삼킨 강우혁이 앞에 놓인 치킨의 다리를 크게 뜯었다.
아그작.
튀김 부스러기가 테이블에 우수수 떨어졌다.
쩝쩝대며 치킨을 먹는 그들 맞은편에 수혁이 홀로 앉아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를 마시는 그의 존재를 치킨집 내부의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
다 마신 빈 잔 옆에 맥주 값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한 직원이 슬그머니 자신의 주머니에 현금을 집어넣었다.
“이게 웬 떡이냐?”
치킨과 맥주를 저렇게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붉은 약물을 섭취한 건 아니었다.
흡혈귀가 되었다면 결코 먹지 못했을 테니까.
치킨집에서 강우혁이 한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약물과는 관련은 없어보였다.
“그 다음은 김세연인가?”
“아잉~ 오빠~ 아- 아-”
서울의 최고급 호텔,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에서 격렬했던 두 남녀의 열락(悅樂)이 끝나고 김세연이 커다란 자신의 젖가슴을 남자의 상체에 문댔다.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행동에 흰 머리가 희끗한 주름진 남성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우리 세연이 체력 따라가기 힘드네. 내가 최근 애들 따라다니면서 레벨 업도 더 했는데 말이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우리 회장님은 가만히 있어요. 누나가 다 해줄게?”
“으허헛.”
만족스러운 두 남녀가 서로 껴안은 채 서로의 체온을 즐기다 늙은 남성이 아차하며 옆에 놓인 서랍을 열었다.
시중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아공간 반지를 김세연의 약지에 끼워주자 그녀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 회장님~”
“널 위해 준비해놨어. 잘 써.”
그녀의 애교에 살살 녹던 남성은 뿌듯한 얼굴을 지었다.
그들이 누워있는 방의 무드등은 침대 가장자리만 밝혔고, 빛이 없는 구석의 그늘진 소파에는 수혁이 앉아있었다.
턱에 손을 괴고는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리던 수혁이 자리를 떴다.
“NS 그룹 회장의 연인이라... 좋은 구경했지만 아직은 애매하군. 판단을 조금 보류해야겠네.”
호텔 위에서 뛰어내린 수혁이 건물의 옥상을 날아다니며 마지막 목표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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