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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인가 아닌가
“진실은 결코 가릴 수 없습니다. 언젠가 밝혀질 겁니다!”
길드원들과 진실공방을 가리던 김인수는 백호와 블러드 길드가 합세하자 진땀 빼며 뒤돌아 도망갔다.
도망가는 그의 뒤꽁무니를 기자들이 마구 쫓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슈페리얼 게이트를 공략했다는 것보다 김인수의 스캔들이 기자들의 구미를 더 당겼나보다.
마침내 게이트 밖이 잠잠해지자 씩씩대던 장이산이 수혁에게 다가왔다.
“저 빌어먹을 놈들을 그냥! 고추를 떼버려야지! 김인수 저 자식도 본때를 보여줄 거다!”
“일단은 다들 병원으로 먼저 가는 게 어떻습니까? 협회에 얘기해서 부산의 헌터병원으로 바로 입원을 하는 게 낫겠습니다.”
걱정스러운 수혁의 말에 장이산이 손을 격하게 휘저었다.
비록 게이트에서 발톱 빠진 호랑이의 모습을 보였지만 백호라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괜찮아. 우리도 후원받는 곳이 있거든. 그쪽과 연계된 병원에 가서 쉬면 돼.”
“그곳 혹시 서울에 있는 병원 아닙니까. 다들 지쳐보이는데요.”
“그런 것도 못 버티면 헌터라고 할 수 있나. 걱정 말고 동생도 길드원들과 어여 쉬러 가. 제일 고생했는데.”
“저희는 부산에서 휴식을 좀 취할 예정입니다.”
“그래~그래~ 나중에 서울 올라오면 연락해. 난 블러드 길드는 우리 백호와 우호 길드라고 생각할 거야. 동생도 그렇지?”
장이산의 기대감 섞인 눈망울에 수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하죠. 언제든 힘들 때 얘기하세요.”
“하하하하. 우리 애들 치료하면 화끈하게 자리 한 번 갖자고!”
장이산이 길드원들을 부축하며 대형버스에 올라탔다.
아이템과 경험치만 얻을 줄 알았던 게이트 공략에서 백호 길드라는 우호적인 인맥을 얻었다.
이렇게 세상일은 예상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예상보다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나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수혁은 자신이 미래를 겪으며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오만함을 이렇게 반성했다.
그렇다고 겸손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들 쉬러 가자~”
폐허가 되어버린 게이트 주변을 훑어보던 수혁과 블러드 길드원들이 자리를 떴다.
녹아내린 철골과 부서진 건물의 잔해에서 불어오는 먼지바람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홍영기의 강력 주장으로 부산의 온천에 온 길드원들이 탕을 통째로 빌려 묵은 때를 씻어냈다.
벌레들의 누렇게 눌러 붙은 체액과 찌꺼기들을 씻어낸 길드원들은 온천 옆 호텔에 누워 모두들 쓰러지듯 잠들었다.
드르렁. 드르렁.
온돌방에 대자로 누워 뻗은 홍영기와 이명한을 지켜보던 수혁이 호텔 로비로 나왔다.
휴식을 취하다 나온 이유는 선데이가 건네준 폰으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
- 비셔스의 빌런들이 부산항으로 밀입국했다는 정보입니다.
국내의 빌런들을 죄다 잡아먹어 빌런청정국을 만들고 있는데도 이 바퀴벌레 같은 녀석들은 끊임없이 국내로 들어왔다.
“비셔스의 수장에 관한 정보는 아직 없어?”
- 네. 백방으로 찾아보고 있지만 꽁꽁 숨겨진 것이 아직은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전생에서도 비셔스를 이끄는 수장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탑이 나온 이후, 빌런 대청소라 불리는 헌터들의 총공격에 비셔스라고 찍힌 자들은 죄다 헌터들에게 죽었지만 끝끝내 수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점조직 특성상 미국의 정보망으로도 잡기 어려운 걸 수혁이 밝혀내기 쉽지 않았다.
국내를 떠나 그놈 잡으러 전세계를 돌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
“또 누구를 노리고 들어온 거지? 아니지. 지켜보면 알겠지. 이 자식들이 더 커지기 전에 잡아야 되는데.”
- 미국에서도 현재 암암리에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헌터 우월주의 사상을 겉으로 드러내는 자들보다 숨기는 자들이 더욱 많습니다.
“그래.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낼 방도는 없지. 정보 고맙다. 내가 처리하지.”
- 예스. 마스터.
***
집에 틀어박힌 김인수는 양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풍성했던 머리가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두 손 가득 빠진 머리가 가득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가졌던 부와 명예가 곧 휴지조각이 될 처지였다.
“시바알... 왜 거기서 살아와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검과 화살이 먹히지 않는 몬스터들 사이에서 후일을 도모했던 자신이 잘못됐다는 건가?
“지들도 똑같이 도망쳐서 목숨을 구걸한 주제에 나보고 비겁자라고? 어이가 없네 진짜.”
특종거리를 잡은 기자들은 자신의 집 주변에서 서성이며 빈틈만 노렸다.
지금도 끊임없이 폰이 울리며 사실확인을 묻는 하이에나들이 즐비했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도 않으면서, 시발! 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나보고 인정하라고? 내가? 죽어도 안 하지~”
속에 천불이 나는 김인수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혼잣말로 화를 삭혔다.
이렇게라도 안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미쳐버리기 직전이었으니까.
똑. 똑. 똑.
“꺼져-!”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홧김에 김인수가 소리쳤다.
그러다 곧 생각해보니 이곳은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고급오피스텔인데 누가...?
밖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마저도 건물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챔피언 등급의 헌터인 자신이 기척을 못 느꼈다고?
무언가 홀린 듯 현관문에 다가간 김인수가 명함 한 장을 발견했다.
문틈 사이로 집어넣었나? 그러기엔 너무 깨끗한데.
문을 열고 복도를 두리번거렸으나 인기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얀 명함에 VICIOUS라 적힌 문구, 뒤편에 적힌 단어에 김인수가 실소했다.
“참 나~ 인간시대의 끝이 도래했다고? 억울하고 힘을 원하면 연락해라? 어휴... 이제 하다하다 날 놀리려고 작정했구나.”
꾸깃.
명함을 구석에 집어던졌다.
식탁에 앉아 스마트폰을 훑어보던 김인수가 온통 도배된 자신의 기사에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그대로 엎드려 눈을 질끈 감았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한참을 엎드리다 일어난 그가 향한 곳은 구겨진 명함이었다.
“내가 한 번 속아준다.”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하자 발랄한 목소리의 여자가 들려왔다.
- Honey~ 생각보다 빨리 전화했네? 주소 보내줄테니 이곳으로 와.
“그쪽은 누구...”
뚜- 뚜- 뚜- 뚜-
“와씨... 성질 돋게 만드네.”
그러나 아쉬운 건 김인수 본인이었고, 어두운 후드티를 뒤집어 쓴 그는 조심스럽게 집 밖을 나섰다.
***
“이상하게 아시아 중에서 유독 한국만 스카웃이 잘 안된단 말이야. 가입하겠다고 하는 자들은 죄다 사고가 나거나 실종되고. 그쪽은 이유를 알아?”
검은 가죽 자켓에 붉은 단발의 여성이 자신의 풍만한 가슴골을 드러내며 앞에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노골적인 그녀의 유혹에도 목석같은 사내는 들고 있는 목검만 만지작거렸다.
“한국의 지하조직들이 우리와도 커넥션이 많이 끊겼어. 다들 몸을 사리더군. 빌런헌터들이 많이 설친다고 들었다.”
“쯧쯧쯧. 실력들이 너무 없는 거 아냐? 내가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아~ 덥다 더워~”
가죽 자켓의 어깨부분을 훌러덩 넘기자 뽀얀 살결이 드러나 더욱 뇌새적인 자태가 드러났다.
“누가 이 뜨거운 나를 위로해줄 사람. 손?”
“...”
캄캄한 밤하늘 속 폐차장에는 그녀와 사내 두 사람 뿐이었다.
남자라면 그 유혹을 이겨내기 어려울 테지만 목석같은 사내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동유럽의 마녀, 베로니카의 다리사이에 깔린 남자는 아침에 뜨는 해를 두 번 다시 못 본 다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천국을 보여줘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것뿐이야. 푸훗. 당신이야말로 여긴 왜 왔어? 료마.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을 텐데?”
“이번에 스카웃하는 자가 검을 좀 쓴 다길래 나보고 쓸 만한지 판단하라더군. 그러나 비셔스에 수준이하의 녀석들은 낙원을 향해가는데 방해만 될 뿐이야.”
“생각보다 별로였어?”
베로니카의 말에 료마의 눈에 살기가 짙어졌다.
“헛걸음을 하게 했으니 경험치로 써먹었지. 지부장의 허락도 받았다.”
베로니카의 시선이 료마의 목검으로 향했다.
목검 끝에 희미하게 남은 붉은 흔적이 그녀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료마는 이미 다른 헌터를 스카웃하러 갔다 왔지만, 혼자 이곳에 왔다는 얘기는 뻔했으니까.
“미안한데 김인수는 내 담당이야. 그러니 부디 내 욕구를 채워줄 게 아니라면 내가 부를 때까지는 내 눈앞에서 꺼져줄래?”
“무사는 레이디의 요청을 무시하지 않지.”
자칭 무사, 료마가 사라지고 혼자 남은 베로니카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입맛을 다셨다.
“아잉. 맛있게 생겼는데... 제법 마력이 짭짤할 거 같은데 영~ 반응이 없네. 고잔가? 어떤 자식들이 내 소문을 이렇게 내고 다니는 거야?”
유럽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소문이 일본에까지 퍼질 정도라니.
거기에 거절당하니 더 땡기잖아.
겉으로는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자부심을 느끼던 그녀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환한 눈웃음과 함께.
“Honey~ 이제 왔어?”
그녀의 뒤에 나타난 것은 후드를 뒤집어쓴 김인수였다.
그는 상당한 미모의 베로니카의 모습에 처음 마음먹었던 것과 달리 소리를 지르려던 것을 꾹 참았다.
“그쪽은 누군데 나를 찾았지?”
“밤이 긴데 이런 추운 곳에서 얘기 할 거야? 나 닭살 돋는데?”
“... 추운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 이쁜이가 춥다고 하면 안으로 들어가야지.”
“어머~ 배짱 두둑하네? 자신 있나보지?”
베로니카의 묘한 웃음에 김인수가 후드를 벗고 손을 뻗자 검 하나가 들려있었다.
김인수가 주변의 인기척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감지되는 것이 없었다.
야심한 밤에 낯선 미모의 여성과 단 둘이라니.
낮에 겪었던 사건들도 잊을 만큼 그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내가 검은 좀 쓰거든.”
“겁쟁이가 아니라 맘에 드네. 좋아. 들어가서 얘기할까?”
“좋은 곳 있나?”
“물론이지. 검 말고 다른 것도 좀 쓰는지 궁금하네?”
베로니카의 눈웃음에 김인수의 경계심이 누그러들었다.
폐차장 한 쪽에 검은 세단 한 대가 세워져있었다.
세단의 조수석에 올라탄 그가 손에서 검을 놓지 않자 운전석의 베로니카가 코웃음을 쳤다.
“대범한줄 알았더니 아니네?”
“푸핫. 이거? 습관이야. 내가 검을 잡으면 마음이 편해서.”
그녀의 시선을 느낀 김인수가 호탕하게 웃으며 검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베로니카가 반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만족한 얼굴을 하자 김인수도 마주보며 여유있는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탄 차가 출발하자 폐차장의 찌그러진 차 사이에서 수혁이 걸어나왔다.
“베로니카에 료마라... 제법 거물들이 행차했군. 김인수를 꼬시려는 건가?”
비셔스에서도 악명 높은 자들이었다.
아니, 지금은 그 악명을 쌓아가는 자들이겠지.
결국 전생의 흐름대로 김인수는 비셔스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 걸까.
빌런이 되기 직전의 기로에 선 그를 지금 단죄할 때가 되었나? 아니면 너무 이른가?
만약 김인수가 베로니카의 유혹을 벗어나 빌런이 되기를 거부할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수혁이 뒤쫓는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세단은 부산의 영도에 위치한 호텔에 들어갔다.
세단이 멈추고 두 사람이 호텔 로비로 들어올 때엔 어느 샌가 팔짱을 낀 상태였다.
잉꼬처럼 찰싹 붙어 눈웃음을 치는 두 사람은 영락없는 커플이었다.
로비에 앉아있던 수혁의 존재를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김인수에 관해 판단을 미뤄왔던 수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호텔 키를 받은 두 사람이 하하호호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들어갔을 때에도, 복도에서 지켜보던 수혁이 방 앞에 다가가 소리를 훔쳐들었을 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서 뜨거운 열락의 신음소리가 펼쳐진 뒤에야 그는 확실히 판단할 수 있었다.
“이 새끼 빌런으로 전향했네.”
왜인지 모를 가슴이 뜨거워진 수혁이 두 사람을 단죄하기 위해 검을 뽑아들고 방문을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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