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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덕목
장이산은 내심 부끄러웠다.
78레벨인 자신은 최고레벨 홍영기의 뒤를 쫓는 고레벨 헌터인데 50레벨대의 헌터에게 결투를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레벨이 제일 높은 홍영기에게 지휘권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가 강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길드를 이끄는 통솔력은 검증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장이산은 블러드 길드의 중추는 홍영기라고 생각했다.
이수혁 길드장은 리더쉽과는 별개로 그가 얼굴마담인 건 분명했으니.
어찌 50레벨짜리가 랭커급 헌터에게 명령을 내리겠는가.
게이트에 들어가서 생기는 일은 결국 힘의 논리에 따라야 하는 법.
지금처럼 고등급 게이트에서 빠른 통제를 하려면 자기 자신뿐이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홍영기와 싸워서 그에게 통제권을 넘긴다는 건 다 같이 죽자는 말과 같았다.
길드장끼리라면 명분도 충분했다.
그는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길드원들이 무슨 눈초리로 그를 지켜볼지 민망했다.
자신의 팔뚝을 감싼 김이현의 제지에도 밀어붙이기로 강행했다.
아무리 와이프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좋습니다. 길드장끼리 깔끔하게 끝내고 지는 쪽은 통제에 무조건 따르기로 하죠.”
“좋아. 화끈하군. 내가 레벨이 훨씬 높으니 선공은 양보하지. 우리에겐 힐러도 있으니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아.”
“마음대로.”
참 특이했다.
블러드 길드장의 여유도 그렇지만 길드원들은 걱정이 안 되나?
뒤로 물러나서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고 낄낄대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다.
백호 길드원들은?
쑥덕거리는 것이 분명 자신을 욕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모든 건 대의를 위한 거다.
그렇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겠다.
“난 준비됐으니 시작해.”
장이산은 건틀릿을 낀 두 주먹을 마주치며 자세를 잡았다.
왼발이 앞으로 나온 후, 두 무릎을 살짝 굽혔다.
왼 주먹을 길게 뻗고, 오른팔을 굽혀 허리춤에 주먹을 갖다 대었다.
“보통은 이런 말은 안하지만 레벨 차이가 심하니 힌트를 주지. 내가 쓰는 스킬은 호포권이라는 것으로 호랑이의 움직임을 본따서 만든 권법이다.”
피식.
수혁은 저 쓸데없이 진지한 장이산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장이산에 대한 기억은 전생에서도 선명했다.
장이산과 김이현 부부는 같이 탑에 오를 정도의 강자였으니.
그때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큰 목소리와 호방한 성격으로 트러블이 많았는데 젊은 시절인 지금에 봐도 성격은 그대로였다.
다만 탑에 입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 김이현이 죽어버렸고, 장이산은 그 뒤로 말을 잃었던 기억이 났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떼에 홀로 뛰어들어 장렬히 싸우다 전사해버렸다.
수혁은 그 당시에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빌런으로써 홀로 살아왔던 그는 누군가의 죽음에 왜 슬퍼하는 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어차피 다들 헌터로써 언제나 죽음을 가까이 한 거 아니었나? 왜 저렇게 슬퍼하는 거야?
하지만 이제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예전과 달리 블러드 길드원이 죽거나 다친다면 수혁은 참을 자신이 없어졌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전 이걸로 가죠.”
수혁은 오랫동안 아공간에 묵혀있던 아이템을 하나 꺼냈다.
[고블린 족장의 제법 단단한 몽둥이 : 신체 +2]
장이산은 기분이 크게 상한 듯 보였다.
“허허허... 검을 집어넣고 막대기를 꺼낸다고?”
느리진 않지만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수혁이 다가갔다.
이윽고 몽둥이를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검이 아닌 몽둥이 따위를 피할 필요성을 못 느낀 장이산이 몽둥이를 손바닥으로 곧장 쳐낸 후 정권으로 후속타를...
뽀각.
“어?!”
예상과 달리 미증유의 힘이 담겨있던 몽둥이를 쳐내지 못한 장이산의 팔꿈치가 부러지며 뼈가 피부를 뚫고 나왔다.
고통이 극에 다다르면 느낄 수 없다더니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손으로 반격을 날렸으나 수혁이 고개를 슬쩍 젖히면서 피했다.
다시 한 번 발차기를...
빠-악.
“여보-!!!”
장이산이 쓰러지자 주변에 정적이 감돌았다.
백호 길드원들은 전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무슨 일인지 이해하려 애썼다.
“힐 스킬 있는 헌터는 빨리 오세요.”
“아...네. 네.”
허둥지둥 다가온 두 헌터가 바닥에 쓰러진 장이산의 팔뼈를 맞추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 재빠르게 다가온 김이현이 수혁을 쏘아보았다.
“...... 우리가 졌어요. 게이트에서 블러드 길드의 지시에 따르죠.”
“장이산 헌터가 깨어나면 다시 움직이겠습니다. 그전까지는 휴식을 취하죠.”
“블러드 길드장님이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지 몰랐군요. 레벨을 속인 건가요?”
“전 레벨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글쎄요. 헌터협회장과 친하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정황상 믿기 어렵군요.”
“협회에 등급판결기가 있는 건 잘 아실 텐데요.”
“...”
헌터협회에는 헌터의 등급을 판별할 수 있는 아이템이 존재했다.
그것 역시 수혁이 구해다준 것과 다름없지만 그것으로 헌터들의 레벨은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
자신의 레벨을 협회에 높여서 보고했으면 보고했지 낮추는 사람은 없었다.
레벨이 높을수록 강하다는 증거인데 굳이 낮출 이유가 없었으니까.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한 그녀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와... 분위기가 살발한데요. 길드장님이 너무 심했나?”
“하.하.하. 길드장님은 죄가 없죠. 한 대도 못 막을 거라구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안 그래요?”
“... 맞아요. 길드장님은 죄가 없어요. 저 사람이 약한 거라구요.”
백호 길드를 살피던 홍영기가 한 마디 하자 이명한과 김예현이 수혁을 옹호했다.
두 사람은 열렬한 수혁의 지지자로 무슨 짓을 해도 그는 무죄였다.
“최대한 빠른 분란을 막아보려 한 거였지. 이곳에서 뭉쳐서 시간을 끈다는 건 몬스터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밖에 안 돼.”
“마스터의 말이 맞습니다. 저런 약한 인간들은 사실 필요 없으니 버리는 걸 추천합니다.”
“아니 언니. 그건 좀.”
“아니면 저 인간들의 식량과 무기를 약탈하는 걸 추천합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건 안 되고 너는 좀 더 인간스럽게 행동 좀 해봐.”
“가장 인간다운 행동 아닙니까?”
“...”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뭔가 그렇다.
말을 말자.
살랑한 바람이 콧등을 스치자 정신을 차린 장이산이 눈을 떴다.
“으윽...”
“괜찮아요? 여보?”
“내가 왜 누워있지... 골이 흔들리네.”
“잠시 쉬고 있어요.”
누운 채로 앞을 바라보니 그를 둘러싼 길드원들이 걱정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수혁과의 전투가 떠오른 그가 급히 팔을 들었다.
칭칭 붕대가 감겨있는 팔이 찌릿하고 시큰했다.
포션과 스킬을 썼지만 완전히 치유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내가 진 건가?”
“블러드 길드장이 레벨을 숨기고 있는 거 같아요. 여보는 그거에 당한 거라니까요.”
“협회의 등급판결기는 속일 수 없어. 그건 예전에 길드장들이 모여서 실험해봤어.”
“하지만...”
“진 건 진 거야. 더 낮은 등급의 헌터가 고 등급 헌터를 이기는 모습은 종종 있었잖아.”
“해외 영상 보고 조작이라고 우긴 건 당신이잖아요.”
“...그랬나?”
언제나 승승장구해온 장이산은 마침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블러드 길드장이 이정도로 강하다면 국내 최고레벨의 홍영기는 도대체 어느 정도나 강한 것인가.
홍영기에게 싸움을 걸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이산은 길드원들의 부축을 뿌리치고 수혁에게 다가왔다.
“내가 졌네. 나는 진정한 호랑이가 아니였어.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인데 상대를 하찮게 본 내 잘못이지. 블러드 길드장 강하군.”
“역시 사나이시군요.”
“사내란 그런 거지.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다들 어색하구만. 이럴 땐 다 같이 몸을 억지로라도 부대끼길 추천하지. 이대로 움직인다면 삐걱거릴게 분명해.”
“그것도 그렇군요.”
“다들 이리 와-! 블러드 길드장한테 인사하고 악수라도 하자고!”
장이산은 백호 길드를 불러 모아 수혁의 앞에 대령했다.
“여기는 이호민 헌터로 검을 제법 써. 이 친구는 최연진. 우리 길드에서 길잡이를 맡고 있지. 그리고 이 친구는......”
백호 길드를 소개한 그는 블러드 길드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반갑소. 장이산이오. 잘 부탁해요~ 이런 기회에 회식이라도 해야 되는데 너무 아쉽네?”
“회식 좋죠. 혹시 술 좋아하세요?”
“술 좋지이~ 홍영기 헌터가 따라준다면 내가 안 빼고 다 마시지. 그 귀한 걸~”
“하하하하. 이산이 형님 말이 잘 통하네요.”
어느새 장이산 형, 동생하며 어깨동무를 한 홍영기였다.
박이현과 김이현, 두 쌍이현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혀를 찼다.
그렇지만 어색했던 전과 달리 길드원들끼리 인사를 나누며 좀 더 분위기가 밝아진 것은 장이산 덕분이었다.
수혁은 다른 사람을 휘어잡는 장이산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제가 많이 배웁니다.”
“나도 오늘 많이 배웠어~ 언제나 방심하지 않기.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내가 그동안 겸손을 몰랐는데 오늘 알았네. 친하게 지내자고 수혁 길드장.”
“저야말로.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그래? 그럼 까짓 거 형동생 하자고! 형처럼 생각해. 나도 동생처럼 생각할게.”
“알겠습니다. 형님.”
“하하하하. 오늘 영기도 그렇고 수혁도 그렇고 좋은 동생들이 많이 생겼네.”
뒤끝 없는 장이산 덕에 백호와 블러드 길드의 연합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수혁은 백호길드의 헌터들을 포지션별로 분배해 길잡이들은 제일 최전방, 탱커계열은 전방, 궁수와 법사, 힐러들은 중앙으로, 마린느를 비롯한 백호의 검사들을 후방에 위치시켰다.
“이동합시다.”
수혁의 명령에 두 길드의 연합체가 한 뜻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던 박이현과 최연진의 눈이 마주치더니 동시에 발을 멈췄다.
“전방에서 소리가 나요.”
“소리?”
콰아아아- 으악.
귀를 기울이자 그린와이번이 브레스를 내뿜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비명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쩌면 도망친 헌터들일 수도 있어.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해.”
호수에서 본 흔적을 기억한 장이산의 말에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전투준비. 탱커들은 곧장 와이번의 시선을 끌도록.”
“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모두들 진형을 유지한 채 속도를 높였다.
곧이어 비명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자 다들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아아악!”
“시바아아아-!”
수풀을 헤치고 보이는 그린와이번은 입을 벌려 바닥에서 비명 지르는 헌터를 잡아먹기 직전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박이현의 화살이 먼저 움직였다.
슈유우욱. 푹.
“쿠오오오-”
목에 화살이 꽂힌 와이번이 성난 울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리자 박이현이 다급히 외쳤다.
“거기서 벗어나!”
“히이이익.”
먹이가 되기 직전의 헌터는 비명만 지를 뿐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헌터는 와이번의 발에 깔려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린와이번의 목덜미가 꿀렁하더니 박이현을 향해 브레스를 내뿜었다.
“어딜! 워 배리어!”
그녀의 앞에 나타난 홍영기가 자신의 방패로 브레스를 막아섰다.
산성 브레스가 배리어에 막혀 좌우로 갈라지며 땅을 녹였다.
“원거리 공-격! 하늘로 뜨지 못하게 막아!”
슈슈슈슉. 퍼-엉.
쏟아지는 화살비와 화염구에 와이번의 몸이 휘청이는 사이 쇄도한 장이산과 다른 헌터들이 각자의 스킬을 날렸다.
“호포권-!”
헌터들의 다구리(?)를 맞은 와이번은 곧 손쉽게 쓰러졌다.
와이번의 밑에 깔려있던 헌터를 꺼내오자 넝마가 되어버린 백금갑옷과 함께 산발이 된 머리가 보였다.
“김인수?! 힐러! 이 사람 치료해줘요.”
부산 연합길드의 대표를 맡은 화이트윙 길드의 김인수였다.
덜덜덜 양 팔을 감싼 뒤 몸을 떨던 그가 울부짖었다.
“어서 여기서 도망가야 해! 이러다 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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