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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연합
장이산의 호방한 외침에도 길드원들의 움직임이 굼벵이처럼 느릿했다.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부산의 연합 길드마저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는데 위험한 곳에 들어가자는 말에 대다수가 머뭇거렸다.
심지어 다른 길드의 길드장이나 길드원들은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미적지근한 반응에 얼굴이 시뻘개진 장이산의 입을 김이현이 재빨리 틀어막았다.
“야이 겁쟁... 읍. 읍.”
“여보. 잠깐 이리와요.”
장이산을 무너진 건물잔해의 구석으로 끌고 온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다들 전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힘든데 길드원들을 좀 생각해봐요.”
“우리 백호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게다가 정부에서도 이곳의 현장책임을 우리에게 맡겼는데 블러드 길드만 홀로 게이트에 들어가서 사고라도 생기면 통제를 하지 못한 우리들을 걸고 넘어질 거야. 만약에 블러드 길드가 성공해도 문제야. 우리가 국내에서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수포가 되버리는 거야.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생각지 못한 장이산의 냉철한 판단에 오히려 김이현의 입이 벌어졌다.
장이산이 우격다짐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었다.
자신의 남편이 한 번씩 이런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김이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여보...”
“걱정마. 아까 블러드 길드 실력 봤지? 이곳에 모인 어중이떠중이들하고 달라. 차라리 슈페리얼 등급의 게이트를 깰 거라면 이들과 함께하는 게 나아. 그러니 자기는 길드원들을 설득해줘.”
“알았어. 여보. 멋찌네 오늘... 게이트 공략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알지? 뜨밤이야.”
“으응? 여보? 여보-!”
장이산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린 그녀가 길드원들에게 돌아갔다.
카리스마 있던 모습도 잠시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변했다.
길드원들과 소통에 일가견이 있던 김이현 덕에 백호길드원들은 부상당한 인원을 제외하고 전원 게이트에 들어가기로 정해졌다.
장이산이 앞만 보고 돌진한다면 김이현은 옆에서 길드원들을 다독여주는 역할이었다.
백호 길드 말고는 게이트에 들어갈 엄두를 내는 길드도 없었다.
길드원사이에서 김이현이 장이산에게 윙크를 날렸으나 그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우리는 블러드 길드를 구출하는 것을 넘어 슈페리얼 등급의 게이트를 공략할 거다. 우리는 국내 최고다! 후아-!”
““후아!””
마음먹기가 어렵지 마음먹은 순간부터 백호길드원들의 눈빛은 달라졌다.
이럴 때마다 장이산이 항상 외치는 국내최고라는 자부심이 그들을 지배했다.
시작은 자칭이었어도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국내 최고의 길드에 도달했으니.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열정 넘치는 장이산이 길드원들을 이끌었다.
블러드 길드가 돕긴 했어도 죽은 와이번을 배경으로 찍은 백호 길드의 단체 기념사진도 언론에 금방 퍼졌다.
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 등 전부 백호가 최고라고 외쳤다.
식량과 포션 등을 챙겨 게이트 진입준비를 마친 백호 길드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게이트에 들어갔다.
그들이 진입하자 게이트 관리국 직원은 더 이상 헌터들의 희생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게이트의 내부가 밖에서 보인다지만 실제로 들어온 느낌은 사뭇 달랐다.
울창한 나무와 풀이 뿜어내는 향긋하면서도 상쾌한 공기에 모두들 코를 벌렁거렸다.
“연진아. 블러드 길드 흔적 찾고 맵핑 시작해.”
“넵.”
“다들 긴장 늦추지마. 게이트에 우리가 죽인 와이번들이 몇 마리나 있는지 모르니까.”
장이산의 명령에 단발머리의 궁수가 땅에 손을 짚으며 스킬을 사용했다.
“연진이 앞장서고 다들 정해진 위치로 이동해. 연호, 진우, 우리 힐러들이 최우선이야. 다들 알지?”
“넵.”
그의 말에 길드원들이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른 길드에서는 보기 힘든 치료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백호 길드에는 2명이나 있었다.
부상당한 인원을 제외하고 들어온 백호 길드 17명은 하나로 똘똘 뭉쳤다.
“블러드 길드의 흔적은 이쪽이에요. 저기 숲 너머로 보이는 돌산쪽으로 이동했네요.”
나무 위에 올라간 최연진이 손을 뻗어 가리키자 광활한 대숲 너머 돌로 이루어진 커다란 산이 보였다.
산의 꼭대기는 얼마나 높은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산 주변에 새처럼 날아다니는 생명체가 몇 마리 보였지만 그 크기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변 지형에 관해 보고받은 장이산이 손짓하자 백호 길드원들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작은 풀벌레가 날아다니다 나무 위에서 대기하던 작은 도마뱀의 혀에 감겨 순식간에 사라졌다.
포만감도 느끼기 전에 나타난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도마뱀이 나무 위로 도망갔다.
덩굴을 단검으로 잘라내고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던 백호 길드는 일제히 멈춰섰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잔뜩 녹아내린 대지와 목이 잘린 와이번이었다.
“전투가 있었나보군. 블러드 길드원들이 혹시 죽었는지 수색해.”
블러드 길드가 와이번을 지상으로 끌어내릴 능력이 있는 것은 이미 게이트 밖에서 지켜봤었다.
다만 지상으로 내려온 와이번을 사냥할 능력이 있냐는 점은 별개의 문제였다.
장이산의 우려와 달리 주변을 수색한 길드원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소수의 인원으로 와이번을 잡았다고?”
“소수 정예로 유명하잖아요. 혹시 모르죠. 우리가 모르는 어떤 좋은 스킬이 있을 수도.”
의문 섞인 장이산의 물음에 김이현이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 그는 코웃음을 쳤다.
“괜히 이곳에 홀로 들어온 게 아니었군. 아무래도 와이번을 상대할 수 있는 특화된 스킬을 가지고 있었네. 하여튼 별 걸 다 숨기는 놈들이야.”
“그 덕분에 손쉽게 잡았으니까요.”
“우리도 그런 스킬만 보유했으면 금방 잡았지. 마법사들! 여기 나가면 내가 돈을 털어서 헌터옥션에서 마법서 잔뜩 사줄게!”
“오오- 길드장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사기가 잔뜩 올라간 마법계열 헌터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별 거 없으면 이동한다!”
“길드장님. 와이번 손질은 따로 안 해도 됩니까? 가죽이나 발톱, 이빨 등은 돈이 될 거 같은데.”
“뭐?! 지금 블러드 길드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그럴 시간이 어딨어? 빨리 움직여!”
장이산은 와이번을 해체하면 고급 재료로 써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거기에 고등급의 게이트에 들어와서 블러드 길드와 합류하지 못할수록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 역시 잘 알았다.
현재 단독으로 행동하는 블러드 길드 역시 백호 길드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 위험천만한 게이트에서 살아나갈 확률이 줄어들 거라 생각했다.
뭉칠수록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니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모두들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러나 이어지는 광경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숲을 통과한 그들이 널따란 호수에 당도했으나 모두들 입을 틀어막았다.
푸르른 물결의 호수에는 죽은 와이번들의 시체들이 잠겨 본래의 빛을 잃어버렸다.
한쪽에 쌓여있는 뼈 무더기를 보아하니 와이번들이 활발한 먹이활동을 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와이번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였지만 특이한 점은 사체만 있을 뿐 혈흔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 정도의 전투라면 블러드 길드가 전멸했을 수도 있어. 찾아봐!”
“여기 갑옷을 입은 시체입니다!”
“여기도 있어요!”
곳곳에서 외치는 길드원의 외침에 장이산이 후다닥 달려갔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몸통의 절반이 뜯겼거나 팔, 다리가 잘려나간 시체들이었다.
대다수의 시체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는 검은 원숭이가 춤을 추는 문양이 그려져있었다.
“블랙몽키 길드다. 여기서 전멸했나 보군.”
“여기 이 사람은 청향 길드의 길드장인 것 같아요!”
목이 뜯겨나간 시체에는 청향 길드장의 트레이드마크인 바다뱀 비늘로 만들어진 갑옷이 반쯤 녹아있었다.
“으음... 이곳에서 다들 당했나보군. 식수는 헌터뿐아니라 몬스터들에게도 필요하니까. 화이트윙은?”
“화이트윙 길드원들만 잘 보이지 않아요. 다만 이곳에서 몇몇 헌터들이 도망쳤는지 여러 갈래로 흔적들이 나뉘어졌어요. 블러드 길드가 그 중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확실하지가 않아요.”
최연진의 보고에 장이산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어쩌면 살아있는 헌터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을 전부 살려 데려가기에는 위험이 너무나 컸다.
“지금 최우선은 블러드 길드와의 합류야. 다른 자들은 안타깝지만 우선순위를 뒤로 미뤄둬.”
“네.”
장이산이 길드원들을 살펴보자 생각보다 동요하는 자들이 늘어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게이트를 많이 겪어왔던 베테랑들이라도 이런 대규모로 헌터들이 죽은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 역시도 처음의 호기로운 자신감대신 불안감이 마구 싹트고 있었으니까.
처음으로 초조한 기색을 내비친 그가 숲 주변을 둘러보며 블러드 길드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씩 커져갔다.
***
“음?”
“왜요? 입에 안 맞아요? 이거 전투식량 신상인데. 별론가?”
밥을 푼 숟가락을 입에 넣던 수혁이 멈칫하자 박이현이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너 또 최저가로 샀지? 이거... 이거 유통기한이 왜 안 적혀 있어?! 소고기비빔밥인데 소고기가 없잖아! 너 또 길드비 삥땅쳤지?!”
“이거 좀 짭짤하니 나는 맛있다. 동생.”
“하하하하. 설마 박이현 헌터가 그랬겠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홍영기가 이때다 싶어 박이현을 공격해봤지만 마린느와 이명한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수혁은 넓게 펼쳐진 기감에 알 수 없는 무리들이 나타난 것을 느꼈다.
“몬스터의 움직임치고는 질서정연하군. 아무래도 새로운 헌터들이 게이트에 진입했나보다.”
“네? 왜 들어왔지? 우리가 들어간다고 얘기했는데. 쫓아낼까요?”
대화의 주제가 바뀌자 박이현이 냉큼 활을 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을 걱정한 게이트 관리국 직원의 월권을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블러드 길드는 현재 백호 길드가 도달한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밤이 다가오자 한차례 전투를 마친 그들은 몸을 가릴 수 있는 곳에 숨어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호수는 넓고 쾌적하지만 물이 있어 몬스터들을 계속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하는 사냥에 방해가 안 되었으면 좋겠군.”
백호 길드에도 길잡이가 있으니 결국 최종적으로는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보다 빨리 낯선 이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날이 밝자 블러드 길드를 향해 다른 헌터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것을 수혁이 느꼈다.
“전부 전투준비.”
정면에 홍영기를 시작으로 김예현과 수혁이 좌우에서, 후방에는 이명한과 마린느가, 박이현은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활을 겨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온 헌터들과 조우한 수혁은 예상 외의 인물에 눈이 동그래졌다.
“백호 길드?”
“블러드 길드장. 여기 있었네. 한참을 찾았어.”
“국내 최고 길드라더니 협회의 규칙을 어기는 겁니까? 여기는 우리 블러드 길드가 선점했다고 통보했을 텐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게이트 관리국의 요청으로 너희들을 구하러 온 건데! 이렇게 야박하게 맞이할 줄 알았으면 안 들어왔지. 우리도 상도덕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눠본 뒤, 수혁은 그들을 오해한 것을 사과했다.
게이트 관리국 직원의 오지랖을 마냥 욕하기도 그랬다.
우리들의 실력을 잘 모르니 이런 일도 생기네.
어쨌든 두 길드가 합쳐지니 가장 큰 문제가 그들에게 남아있었다.
“지휘권을 나에게 넘기게.”
“애초에 게이트를 깰 권리는 우리 블러드 길드인거 모르십니까? 남의 사냥터에 들어왔으면 제 말을 따라야죠.”
“지금 그런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야. 여기는 슈페리얼의 고등급 게이트라고! 우리끼리 이렇게 말다툼할 때가 아니라니깐!”
서로가 답답함을 느끼며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전 장이산은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치사해보였지만 블러드 길드장의 고집이 너무나 완강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50레벨대의 블러드 길드장에게 미안했지만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결국 힘의 논리에 따라야지. 지휘권에 관해 길드전을 요청한다. 길드장끼리의 전투로 결론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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